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오래전 도시로 유학을 와서 청소년의 대부분을 외롭게 보냈던 시절이 떠오른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곳에서 부모님의 살뜰한 보살핌도 없이 시작한 삭막한 도시생활은 이내 떠나온 고향하늘과 그 정겨운 뒷산과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넘쳐나는 나날이었다.

한달주어진 생활비로는 전화요금도 만만치 않았던 시절

방한칸의 절대고독과 무료하기만 했던 시간들을 달래준 것은 지금은 남도 어디쯤에서 국어선생님으로 있는 친구와의 손편지였다. 밤을 새워 그리운 마음을 담아서 쓴 편지를 빨간 우체통에 넣고 돌아서면, 이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고향의 냄새. 편지는 떠나온 고향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친구의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허공같은 시간을 견뎌낸 날들. 친구가 있어. 그리고 편지라는 매개체가 있어 나는 사춘기시절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지나올 수 있었다. 중학교시절부터 시작한 그녀와의 편지는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는데, 당시 우리가 나누었던 감성 풍부한 대화들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은 스위스 로잔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루시드폴이 미국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님에게 2007년 8월 무렵 처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인 마종기님과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인 이 책을 기획하신 이는 '사이의 이야기'라고 칭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사이 존재'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마음의 우주'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책으로 아주 사적이지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 하나를 만나게 된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일상의 소소한 것, 예를 들면 날씨, 산책길, 가족모임, 여행, 그 길에서의 단상, 친구, 그리움, 이국 하늘밑의 고독, 과학, 요즘 관심갖는 분야,.. 까지도 담아낸 마치 일기같은 편지는 독일유학생활의 단상을 담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연상되기도 했다.

만만치 않은 학구열과 그에 따른 고통과 환희, 거기다가 폭넓은 예술적 소양, 자연에 대한 시선등, 어떤 한 분야의 프로는 모든 분야에 대한 애정과 시선도 프로패셔널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두 사람은 좋은 시와 좋은 음악의 기준으로 '이해하기 쉽고도 그것이 가지는 생명력'이라는 부분에 의견을 일치한다. 또한, 먼저 전문적인 분야의 외로운 학문의 길을 밟아온 선배가 다시 그 길에서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를 향한 삶에서 우러나는 진정어린 충고의 말들. 그리고 기꺼이 그 말들을 소중히 간직하는 후배의 모습.  삶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세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따스한 나눔이 가슴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들을 묶어주는 공통점은 주전공이 과학이라는 분야이면서도 공히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제2의 인생인 예술의 삶에도 열정을 다하고 있다는 점일게다. 덧붙인다면, 외국생활에서 연유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그들을 친구, 라는 공감대로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

따라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삶'을 언급하면서 늦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는 마종기님과 그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루시드폴의 우정이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답기만 하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뜨거운 인식욕은 새삼 부러운 대목이기도 하고,

책과의 씨름으로 밤을 하얗게 새운 뒤, 

비록 육신의 피곤이 있을지라도 지적 포만감으로 충만한 채 

창을 통해 밝아오는 여명의 새벽을 맞이하는 것을 좋아했던

내 지난날을 회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행복했다.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 네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이것이 저를 밀어가는 힘이자 목표라고 여겼어요."

 

갑자기 마음이 푸르러진다. 루시드폴과 이제 막 고희를 넘긴 마종기님과의 편지에서 자극을 받은 탓이다. 그 두 사람과 나 사이에 아름다운 '사이의 이야기'가 하나 피어나는 거 같다.

 

모처럼 캐나다에 사는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물어야겠다. 요즘, 너 소식이 뜸하더라. 레스토랑은 여전히 잘 되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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