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마음이 괜스레 헛헛하고 사는 것이 덧없을 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까운 산사를 찾곤 한다.

일주문을 지나서 사찰까지의 그 인적드문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걸어가다보면 마음자락이 절로 정연하고 투명하게 정리되는 느낌..

그 느낌이 좋아서다.

봄에는 봄빛으로, 여름에는 또 시원한 녹음으로, 가을에는 제 가진 것 모두 오롯이 자연속으로 되돌리는 계절의 만상들을 보며

자꾸만 흩어지는 마음을 추스리곤 했다.

어느 해 상실의 고통으로 삶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

그 시간의 한 토막을 선연한 빛깔로 자태를 뽐내던 채송화 꽃잎에 치유받은 기억이 있다.

이른 여름날 아침, 금새 동터오는 햇살에 빨간색, 진분홍색, 노랑색, 색색으로 피어나던 앉은뱅이꽃.

무심코 댓돌을 내려서며 허방을 딛던 내 발걸음을 와락 잡아끌었던  소박한 꽃밭..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한없이 한없이 색의 향연속으로 빠져들었던 무념무상의 순간. 내 등뒤로 쏟아지던 한낮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빛도 감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 기억은 요상하게도 당시 내가 가졌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양 느끼게 해주었다..그렇게 나는 상실의 아픔을 치유했었다.

 

살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누구나 겪게 된다.

친구가 있어, 가족이 있어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때때로 인간의 다정한 위로의 말로도 결코 치유가 되지 않는 나만의 아픔도 있다.  그럴 때면 아무 말 없이 그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는 풀잎, 바람, 강물, 꽃, 산. 그리고 리에처럼 꿀벌과 함께 하는 시간.

자연의 침묵과 함께 깊은 사유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유리알처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며, 모든 문제의 답은 결국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에 시간의 흐름속에서 지혜로운 자아성찰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거 같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바로 자연의 일부라는 자각에서도 연유한 것이리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와 살아가는 리에, 엄마는 아빠를 잃고서는 아빠친구에게 의지한다. 그런 엄마에게 반항하던 리에는 동거하던 남자친구가 어느날 아침 떠나가는 상실의 고통을 맛본다. 그 남자친구는 리에 친구와 사귄다. 반항심과 공허함으로 고통받던 리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도쿄 시외에 있는 '꿀벌의 집'이라는 양봉회사에 수습사원으로 취직한다.

그곳에는 리에처럼 각기 다른 이유로 상처를 안고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가족처럼 챙겨주지만, 일정 거리 이상은 다가가지 않는다. 그래서 상처입은 각자는 스스로 설 힘을 키우고, 서로의 아픔도 지켜봐줌으로써 위로가 되어 준다. 마치 꿀벌처럼.

그곳의 사람들이 기르는 꿀벌이 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인간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왕벌, 일벌, 수벌이 서로가 관계맺고, 그 관계속에서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때로는 그 조직안에서 도태되기도 하는 냉혹한 자연의 섭리까지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그리는 작가는 넘치도록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려낸다. 자연도 그러했듯이 인간의 고통과 기쁨도 또한 그렇게 담담하게 들려준다. 자연의 일부처럼...자연이 흐르는 시간속에 변화되듯이, 인간의 상처와 영광도 자연속에서 그렇게 흘러간다.

작가는 상처와 아픔을 직시할 때, 우리가 성장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더불어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자연속에서 다른 생물과 함게 어우러져 살아갈 때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삶이 더 넓고 더 깊어진다고 말한다.

특별한 사건없이도 잔잔하게 구성된 소설의 뒷맛이 이리도 잔잔하게 오래 여운을 남겨 줄 줄 생각 못했다.

꿀벌의 집, 참 담백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그런 소설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그렇듯 마음이 편안해지는 초록빛 수채화같은 소설.

가토 유키코. 하얀눈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 자연주의자로서 불리는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자연의 의미가 이 소설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구현되었다.

밤이 되어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은 채 더 요란하고 누구도 잠들지 않은 그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리에가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꿀벌의 집'같은 전원생활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자연에게서 온 자연이 바로 그들의 본향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미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과감히 전원생활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애초에 가진 선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비록 전원으로 돌아가지는 못할지라도 '꿀벌의 집'같은 전원소설을 가까이 한다면 잃어버릴 뻔한 순수한 자연의 감성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 감성이 각막한 도시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활력소가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본형님의 '낯선 곳에서의 아침'에서 본 구절이 떠오른다.

 

산이 부른다


인디언들은
자신이 힘들고 피곤해지면
숲으로 들어가 자신의 친구인 나무에
등을 기대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웅장한 나무로부터
원기를 되돌려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어리석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