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2
미우라 시온 지음, 윤성원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온 세상에 봄이 온 지가 꽤 되었는데도 연일 쏟아지는 격무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생활과 나의 생각은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만 있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때맞춰 나타난 그 제목에서도 열정이 느껴지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미우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따뜻한 청춘소설, 이 책은 자연스레 나의 지난 날을 떠올리게 했다. 내 찬란했던 청춘의 꿈과 희망과 그리고 고통까지도.

 

우리 어렸을 때는 오리, 십리 걸어서 학교다니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개넘고 산넘어서 학교에 다니던 이웃마을 친구들이 있었지만, 학교가 있던 소재지에 살았던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서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과 즐거움을 알았다.

읍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하루에 다섯번 다니는 버스는 등학교시간에는 맞지가 않아 우리 동네 아이들은 4Km되는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아침일찍 교복에 책가방을 들고서 함께 모여서 재잘재잘 걷다보면 그 먼길이 순식간에 다 걸어버려 어느새 교문에 도다르곤 했다..언젠부터 모여서 가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각자 나선 등교길...그 등교길을 40분에 걸려서 걸었었다. 그리고도 힘든 줄을 몰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은 바로 십리길을 나 혼자의 생각에 리듬에 맞춰서 걸었던 등교길의 추억이었다.

 

100M달리기는 언제나 공포였다. 선생님의 출발호각소리를 기다리는 심정은 늘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고, 달리는 도중에는 넘어지지나 않을까 공포스러웠다. 같이 달리는 친구와의 거리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은 내가 달리기를 제일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히 기록도 별로다. 허들이나 배구, 뜀틀넘기, 배드민턴 그리고 오래매달리기는 늘 우수한 점수를 받았는데, 유독 달리기는 다리짧은 나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때 생긴 오래달리기는 예외였다. 이 책에 나오는 하코네역전경주에서는 속도도 중요했지만, 오래달리기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와 끈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건 자신있었다. 그리고 너끈히 완주를 해내면서 달리기에 대한 콤플렉스를 치유할 수 있었다.




이십대 중반 어느해 12월 말에 지리산 등반에 나섰다. 새해 첫날 천왕봉에서 새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나선 산행길. 장터목에서 추위와 바람과 싸우며 잠들지 못한 채 날을 꼬박 세운 채, 함께 산을 지켰던 사람들. 각자 가슴에 품었던 소망들은 비록 달랐을지라도 그 소망이 더할나위 없이 간절했을 것은 당연지사..낯선 이들까지도 친구로 느껴졌던 그 밤이 생각난다. 새벽 4시에 산을 타기 시작했다. 사위는 조용하고 칠흑같기만 한데, 한치 앞도 안보이는 산길을 앞사람의 발자국을 표시삼아 한 발 한 발 목표를 향해갔던 막막했던 시간. 그리도 드디어 1등도 꼴등도 없이 모두 천왕봉에 올라서 붉게 떠오르던 태양을 향해 마주섰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을 만났다.




자꾸만 기억속에서 줄지어서 나오는 기억들이 내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대학 3학년때 가졌던 영호남화합도보대행진도 생각난다. 4일에 걸쳐서 하루에 80리씩 걸었던 시간들. 잊고 있었던 아주 세세한 느낌과 상황, 기분까지 생생히 살아나는 시간을 가졌다. 낙오되지 않고 완주해냈을 때의 그 가슴 가득 차오르던 환희, 자부심. 세상이 두렵지 않았던 시간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에서 나오는 10명의 선수들은 바로 어제의 나와 다름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들이 갖고 있는 상처, 영광, 우정, 희망, 가족, 꿈 등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한번씩은 고민하고 겪어왔던 문제이다. 하코네역전경주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간세대학의 육상부 선수들. 지독한 고통을 인내한 뒤에 맞이하는 각자가 성취해내는 환희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낸다. 하코네역전경주는 비록 단 이틀에 걸쳐서 치러지지만, 1년 동안 준비해오면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은 달리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담아낸 인생의 여러 단면을 표현한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코네역전경주는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완성될 수 없다.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조심스러운 마음이나 자존심도 대던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 하지만 달리는 동안은 혼자여서 타인의 생각이나 인간관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마음과 마주할 수 있다. 취향도, 살아온 환경도, 달리는 속도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달린다는 고독한 행위를 통해 한순간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이어지는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말이다. 인생은 홀로 나와 마주하며 끝없이 달리는 외로운 길, 그러나 우리네 삶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코네역전경주처럼 말이다.




달리는 것에 대한 이 마음이 사랑과 흡사한 것이라면.....사랑이란 그 얼마나 일방적이고 보답 받지 못하는 것일까?'하고 가케루는 생각했다. 한번 매혹되면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좋고 싫은 것도, 득실도 초월하여 단지 끌려들어간다. 행선지도 알지 못한 채 깜깜한 어둠에 집어삼키지는 별들처럼. 힘들어도, 괴로워도,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어도 달리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1권 279P)




마치 신년 벽두에 눈앞에서 펼져지고 있는 역전경주 실황을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는 읽는 동안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마흔을 넘긴 나에게  꿈을 잃지 않고, 정직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은 신선한 샘물이자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잊고 있었던 패기 가득했고 푸르렀던 나의 청춘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 그래, 이것이야..사는 것은 바로 이들처럼 최선을 다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거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잖아. 그 길에는 우리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숱하게 우리를 절망케도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것에 굴하지 않는 용기, 희망을 품는 것,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을 완성하는 것..바로 그것이지. 

고통스러워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 자신과의 싸움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힘, 눈에 보이는 기록이 아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끈기였다(2권 p171)




이제야 기나긴 겨울과 그 추위를 견뎌내고 드디어 잎을 피워내는 산야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곧 찬연한 빛깔의 꽃을 피워낼 것이다. 우리는 그 꽃의 우열을 결코 가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꽃의 빛깔과 크기는 다 각양각색으로 자기의 성질에 맞게 최선을 다해서 피워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삶을 뜨겁게 사랑해야겠다. 다시 투지가 솟는다. 나만의 삶을 완성해야지. 나의 청춘은 지금부터다. 

선택받지 못해도 달리기를 사랑할 수는 있다. 억누를 길 없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은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가 품고 있는 고독과 자유처럼 내 속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그것을 가질 수 있었으니.언제까지고  그것은 남아 있을 것이니 이제 됐다.(2권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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