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시와 소설은 늘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호흡의 길이와 그 음율이 시를 읊는 자는 날 때부터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어느 정도 공부와 노력,,그리고 풍부한 경험으로 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내게 있어서 시와 소설은 그렇게 영역을 달리 했다..

그런데, 소설을, 그것도 범상한 소설이 아닌 <토지>라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하소설을 쓴 박경리님의 시라니..

이분이 시도 쓰셨구나...라는 새로운 자각에 작가의 약력을 꼼꼼히 살펴보니 그동안 3권의 시집을 발간하셨다. 토지 15권을 읽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작가의 삶과 문학의 세계를 다 안다고 자부했던 평소의 내 생각이 얼마나 부족하고 경솔한 생각이었는지 몹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긴 같은 문자로 하는 예술의 영역일진대, 소설로 이미 일가를 이룬 지 오래건만 시가 대수랴..




소설은 픽션이 더 가미되기 때문에 저자와 동일시하지 않고 스토리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갖지만, 시는 저자의 감성과 생각이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 다가와 독자와 소통하는 장점이 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다 읽고 난 지금 이 순간, 작가의 시는 내게 있어서 경이로움이요, 정겨움이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며, 지독한 아픔이다.

제목이 주는 서정은 2008년도 마지막 날에 이 책을 받아든 내게 참으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옛 성현의 말씀에 의하면 이미 세상사에 미혹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움켜쥐지 못해 오늘도 안달하는 나의 일상속에 박경리님이 주는 메시지는 참으로 편안하면서 진솔해서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작가의 유일한 혈육이자 시인 김지하님의 부인이신 김영주님의 말을 빌려보면, 불꽃같은 정열로, 분노로, 사랑으로 생애를 사셨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수놓으시듯 정성으로 글을 쓰셨다는 박경리님은 글쓰기를 통하여 삶을 완성하시고 죽음도 완성하셨다고 한다.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최상의 완벽한 삶이었으리라.




유고시집인 이책에는 총 39편의 시가 실려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남기신 이 시집에는 작가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 양가 할머니 이야기, 삶에 대한 성찰, 여인네의 삶 등 다방면에 대한 정겹고도 냉철한 시선들이 네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져 시 속에 녹아 있다.

 

1. 옛날에 그 집 -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 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2. 어머니 -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3. 가을 -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4. 까치설 -

    죽음의 예감, 못다한 한 때문에 울고

    다 넋이 있어서 우는 것일 게다

    울고 있기에 넋이 있는 것일 게다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울타리와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박경리님이 타계하신지도 손가락 헤어보니 어느새 9개월이 넘어간다. 이렇게 유고시집으로 작가를 뵈어도 아직은 님의 빈자리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지금이라도 원주의 그 살림집을 찾아가면 언젠가  공지영이나 여러작가들이 방문했을 때 손수 푸성귀 뜯어 상을 차려 내오셨다는 소탈하고 정겨운  작가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옛날의 그 집> 중에서 따 온 제목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라는 작가의 편안한 고백은 늑대, 여우, 까치독사, 하이에나 울부짖는 세상속에서 살아온 그 모진 세월을 이겨내셨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또한, 님의 말처럼 남몰래 쓰는 시가 있었기에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오셨으리라. 그러나 작가의 한삶을 생각해 볼 때 그 고백이 이리도 아픈 것은 왜일까? 넉넉하고 담대하고 인자하고 강했던 작가의 삶이 때로는 너무도 고독했다는 것을 나는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일 잘하는 사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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