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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비록 쓰기는 '그대는'이라고 썼지만),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근원적인 멍청한 질문, 심지어는 촛불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의미조차도 지양하고서 "왜 촛불을 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로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낙관적인 감각이 어떻게 바뀔 수 없는 비관적 표현으로 전환되는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정말 촛불이 아니면 할 게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번 정부에서 부여지는 노골적인 불안-미디어에서 촛불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일면 성공적인 추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촛불이 결국에는 미디어 마사지에 결속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자발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촛불이란 행동이 결국에는 결박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적나라하게 (생동감 넘치고 자발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방송 3사의 '배신'이라는 문구는 애당초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여기서 촛불은 문제를 의식하다는 점에서 낙관적이지만, 촛불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최근에 있었던 재보선에서의 '능욕'은 정확히 그 지점을 가리킨다. 정말로 촛불 아니면 할 게 없기 때문에 촛불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확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무기를 드는 순간, 확고함의 명증은 사라지고 폭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과 응징이 뒤따른다. 목적이 방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단이 목적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촛불의 몫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희망을 찾는다면, 우리가 경험할 수 없었던 그 무력감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아닌 어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그 엇감각에 있을 것이다. 촛불이 내재한 표현 불가능성의 한계를 전복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함-바로 촛불이 사라진 상황이다. 희망은 여기에 없이 저기에 있다. 촛불 바깥을 보아야 한다. 촛불의 밝힘만을 응시해선 안 된다. 촛불의 최면으로부터 촛불의 바깥을 직시해야 한다. 광장에서 펼쳐지는 '촛불아 모여라'라는 피켓은 그런 아이러니를 비춘다. 민주당의 피켓-"국정원 대선개입/대통령은 사과하라!"는 얼마나 웃긴가. 해임-OUT-해체. 모두 이뤄질 수 없는 불가능성을 염두에 둔 비극의 원천이다. (이 불가능성은 어떤 차원을 그려주는가? 바로 그걸 행동하는 주체성의 결핍이다. 여기서 우리의 상상이 도달하지 못하는 장면이 드러난다. 그건 바로 수행자인 대통령이 촛불을 드는 것이다.)


 촛불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촛불이 시험에 오르는 것은 바로 촛불이 사라진 시점에서부터 물어진다는 것, 바로 이점에 있다. 문제는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촛불이 '우리 세대'에 던지는 의미는 더 없이 여기엔 희망 없음의 공백을 얘기해 주지 않는가? 모든 정치는 (그리고 지금 이 글조차도) 서울이라는 메트로 폴리스를 필수로 한다. 개인도 양심과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해묵은 실존 신념은 모든 정치를 비극으로 환원시킨다. 교통체증, 분리배출. 이런 질서 차원이 생각하지 못하는 위치를 체감해야 한다.


 (이것이 매우 독단적인 생각이지만) 이제 옳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밤이라는 무대. 흥미롭지 않은가? 정치가 마치 24시 편의점처럼 일대 각성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 되어버렸음은 흥미롭지 않은가? 정치도 핫시스로 버닝해 가며 야자로 해치워야 하는 호모 코레아니쿠스. 프로이트의 문제의식, 꿈을 꾸지만 그런 꿈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점, 그것은 우리의 어떤 층위를 밝혀주는가? 정말 다시 바보같은 질문, "왜 촛불이란 말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면 흥미롭게도 '촛불'이라는 검색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많은 피사체들에서 촛불이 공유하는 의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밤이라는 무대, 그런 밤을 밝히는 정의로운 불빛, 그리고 횃불처럼 치켜든 촛불. 거리를 불태우는 노이즈된 촛불들,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타오르는 촛불, 전경 앞에 스마트 촛불(?)을 내미는 시위자와 그런 촛불에 입김을 부는 전경 간의 찰나 등. 우리는 여기서 (애써 찾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진) "왜 우린 촛불을 선택했는가?"하는 원천적인 이유가 예외적으로 밀려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렌트는 "… 항상 희망으로 무장했는데, 그들의 그 같은 평가는 옳았던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촛불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촛불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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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 시대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민주화 과정에서는 아주 생명력 있었지만, 정작 민주화라고 하는 추진력이 급격히 사그라지던 '대타협' 시기 이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자리하게 되었다고 역사적으로 말해지는 시점부터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민주화가 됨으로써 '어떤 민주주의?'라는 질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시대는 민주주의의 공백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시위에서 '국가의 주인은 곧 국민'이라는 권리 장전을 찾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것은 심지어 적대자로 설정되는 국가조차도 '권력은 곧 국민으로부터'라는 사탕발림을 애용하고 선전한다. 이러한 단층은 우리 민주화가 어떠한 속성인지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논자인 캐서린 문의 지적처럼 "21세기는 비상하게 변화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습, 언어의 다변화, 새로운 노동윤리와 정치적 기억에 적응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 민족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새롭고 다채로운 요구와 의미들이 구축돼야 할 것이다." 이른바 민권의 외침이 인권을 깨우는 것이다. 우리의 타자들, 국민의 변두리가 우리를 명분으로 해서 우리가 예기치도 못한 말을 걸어오는 상황들 말이다.



 "나는 1990년대 후반 이래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어느 이주노동자 보호시설에서 두 명의 한국계 중국인 노동자들 곁에 앉으면서 내가 느꼈던 친밀감과 거리감을 나는 언제고 기억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도움을 찾아 와 있었다. 한 남성은 건설노동을 하면서 수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받고 싶어 했다. 경영자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지불해 주었지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지불하지 않은 채 달아나 버렸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은 얼굴과 두 손, 양팔에 붉은 상흔이 가득했는데, 지하철 터널 안에서 작업 도중 일어난 폭발로 인해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많은 치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던 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의료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 우리는 물론 한국어로 함께 대화했고, 내가 재미교포라고 소개하자 그는 친밀감과 연대의 제스처를 취하며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사이듯 말했다. '교포에 생활이 … 여기 … 정말 … 서글프죠?'"



 여기서 민주화는 민주주의란 찌꺼기에 어떠한 응답을 해야 하는가?



 인용 전문은 『당대비평』 29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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