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픽션일 것이다.


 전의 직장을 퇴직하고 한 4개월을 놀게 되었다. 분명히 하자면 그런 타동형보다 놀았다는 자동형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집은 나를 배려하기 위해 직접 외색하지 않았지만 달라진 공기를 나는 은연 중에 느끼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나왔고, 나와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나는, 스펙이 무덤처럼 쌓이는 현실과 그 어떤 접점도 찾지 않고서 무의미하게 열람실을 오가는 동선만을 그리며 일상이라는 사치스러운 복을 누리는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샌가부터 사용자성이 문제 되지 않는 계약직, 그러니까 사용기간에 정함이 있는 있는 근로지위에 일을 하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노후 앞에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은 '로또'였다. 일이 없어 늘 고용불안에 놓인 아버지가 퇴근하고 가장 먼저 집에 돌아와 서툰 노트북을 키고 확인하는 건 지난 당첨된 로또 번호들. 자신의 말씀으로는 매주 기대를 품게 되는 낛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고 지난 로또를 화제로 삼는 모습 속에서 나는 깊게 자리한 불안의 증거를 느끼고야 말고, 그때마다 내가 있는 자리의 현실이 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채워지지 않은 45개의 공백들이 내 자리처럼 느껴지고-나 자신이-그 대상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지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허겁지겁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배속한 부서에는 나와 같은 계약직이 4명이 배정되었다. 약식이지만 면접도 보고 이런저런 설명회도 있었던 만큼 어디선가 마주쳤을 테였지만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로 첫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라는 집합은 전적으로 내 망상에 사로잡힌 개념이지만,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별다른 인사 없이 서먹한 채로 담당할 업무를 배우기 위해 흩어졌다. 셋이었다. 한명은 그날 출근하지 않았다.


 일은 처음 무언가를 한다는 그 막연함에서 가졌던 내 걱정과는 달랐다. 어차피 나중에는 보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식의 차별도 없었고(있었다손 치더라도 당사자인 나는 느끼지 않았다), 질문이 있으면 성심껏 답해주며 많은 걸 도와주었다.


 업무를 맡은 첫날이기에 딱히 회사가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 않았으므로 셋은 중간중간 어쩌다 마주치게 되었고, 짧게나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회사, 실질적으로 쉴 수 있는 시간이 비인간적일 정도로 너무나 짧다..)


 A는 먼 타지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소위 남들이 돈 먹이고 뒤 봐줘서 들어간다는 회사에 있었는데, 무연고로 들어간 탓에 오히려 그게 화근이 되어서 사내에서 찍혀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나온 지금 후회는 되지만 다시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이면 그때의 선택도 같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이유가 안타까웠고, 그래서 실없이 웃었다.


 B는 멀지 않게 지낸다고 했다. 같은 회사의 계열사에 친구 소개로 갔었는데 일이 너무 단순하고 그래서 지겨워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럼 여긴 좀 다른가요?" 물었다. B는 그건 아니라고, 비슷하다고 답했다. "그럼.."하고 내가 개운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B는 그때는 여유가 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웃었다.


 C는 가까운 곳에 산다고 말했다. 놀다보니 조급한 마음이 생겨서 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A는 4개월 정도는 요즘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C는 그 마음씀을 고맙게 생각한다. 궁금했는지 A는 C의 내력을 물어왔다.


 "지역 전문대 나왔어요."

 "아.. 타지는요?"

 "군대 때 정도."

 "계속 여기서 사셨구나."

 "다른 데 가면 또 그만큼 나가는 돈이 있으니까요.."

 (향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고..)

 "과는 무슨 과 나오셨는데요?"

 "들으시면 웃으실 텐데."

 "왜요?"

 "사회복지과요."


 그 말을 들은 A는 웃었고, C는 "것 봐요."하며 같이 웃었다.


 우리는 그날 아침을 등지고 퇴근했다. A와 서로 고생했다고 수고를 전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A를 볼 수 없었다. 기숙사로 문제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었는데, 그게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근처에 살고 있는 나로써 도와줄 수 없어 아쉽게 생각했다. 출근한 나는 B의 모습을 확인하고 인사를 건넸다. 피곤한 기력이 역력했다. 첫 업무를 마친 B는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결국 우리 가운데 C만이 남게 되었다. 물론 이 서술은 기만적이다. 눈앞에 적게는 수십이 오가며 작업이 이루어지고, 때에 따라 수백에 달하는 사람의 동선이 어지러이 엇갈리는 그 현장에서, 나는 분명히 홀로가 아니다. 하지만 개폐된 그 공간에 문득 이따금 내가 우리 가운데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심박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그럴 때면 C는 쉼호흡을 했다. C는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이따금 저 문이 열리지 않아 영원히 갇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불안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내가 약해보이지는 않을까 C는 내심 걱정도 했다. C의 친구는 그렇게 걱정이면 관두라고 했다. C는 별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C의 친구는 "집에 눈치 안 사려면 별 수 없겠다."고 농을 건넸다. C는 뒤따라 웃었다. 나는 다만 그 짐작할 무게를 가늠하며, 여전히 태어나지 못한 그 미숙함을 생각할 따름이었다.


 밤이 찾아오고 있다. 이야기는 픽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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