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시작된 대화였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으로 학을 떼고는 하는 아버지의 경제 (엄밀하게 따지자면 경영이지만) 이야기는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찬란한 치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괴씸하게도 거기에는 어두운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대론이 부상했고, 요즘 젊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 결국 현재가 있기 위해서 그런 일은 -잘못되었지만- 끌어 안고 가야하는 문제라고, 그러한 요구는 순진한 욕심에 기인한 편집증이라는 식으로 나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한 경영인들의 이력을 봐라.. 내 생각으로 우리시대 신화가 있다면 그러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와 경영주의의 그 혼용에 말이다.


 한 친구는 하루가 멀다하고 업데이트 되는 '헬조센' 자료를 수집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아마 유행처럼(?) 일상 영역에 쓰이는 헬조센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마 진행되고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 친구가 왜 그와 같은 일을 하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아마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나는 궁금하다. 그와 같은 개개의 사실을 모으는 까닭은 뭘까? 그리고 그것이 모인다고 무엇이 되기나 하는 걸까? 근거 있고 구체성 있는 헬조센을 현실화하기 위해?


 나는 아마 이전/이후의 구체성을 규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존적인 역사성의 자각은 일상이고, 그러한 활동은 스케치 정도면 적당한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로 재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현실은 전방위적이기 때문이다. 으레 이런 문제를 통해 우리는 어제와 다른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으로 장단을 맞추고 싶은 유혹을 받지만, 원인적으로나 결과적으로 메타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생각해 보라. 경영인의 불법한 행위에 대한 공개적인 보도와 거기서 반응하는 질타가 과연 그 사안에 구속되어 있지 않은 다른 경영인들에게 얼마나 경각으로 작용할지. 한 영화의 예화처럼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부족'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방법'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문제의 방향도, 정답도 장담할 수 없는 이 빈곤한 세계에서, 그런데도 나는 실로 실체성 없는 이유에서 부단히 잊고 살아가는 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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