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세계문학 단편집 러시아 편을 읽고 있다
고리키의 < 스물 여섯과 하나>를 읽는데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리스 레싱의 <지붕 위의 여자>와 비슷해다

빵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열악한 노동환경에 이삼층짜리 석조건물 전체가 어깨위에 세워진 듯한 현실에 눌린 노동자들에게 건물 2층의 16세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한 줄기 빛으로 그들을 비추고 있다..아니 그들이 비추게 하고 있다.
팍팍한 현실에 청량한 유일한 희망. ㄱ
그녀가 그들에게 빵을 가지러 오는 시간만이 그들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런 그녀는 그들에게는 성역이다.

- 우리는 그녀를 사랑했다. 이 한 마디로 모든것이 설명된다. 인간이란 언젠가 누구에겐가 자신의 사랑을 쏟고 싶어한다. 비록 때로는 그것으로 억압하고, 때로는 더럽히고, 가까운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헤칠수 있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하지만 존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창비 세계 운학- 러시아. 135p)

그런 그녀에게 남자가 생긴다. 아니 생기게 된다. 병신출신사내하나가 여자로 거들먹 거리고 제빵공들 중 한명의 도발에 걸리고 만다. 그 어떤 여자도 빠져나갈수 없다고. 한달이면 된다고..

상관도 없는 여자를 의도하지도 않은 상황에 몰아넣은 이 남자들.. 기가 막히다.
그러고 그녀가 그 남자에게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왜? 그녀는 여신이니까. 그들에게..
이 내기로 그들의 삶에 긴장과 활력이 돈다. 이전에는 맛 볼수 없었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 이전과 다름이 없어 보이는 그들과 그녀의 관계.
그러나 그들의 관계에는 미묘한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역시나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것.. 날카로운 호기심. 비수처럼 예리하고 차가운 호기심.

약속된 기한의 날..
그녀는...
비 오는 날.. 헛간밖에서 기다리는 그들..
그리고 밖으로 나오는 병사. 따라나오는 그녀.
눈에 환희와 행복을 가득 담고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쏟아지는 욕지거리. 더러운 말들.. 욕설과 악담..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

-우리는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우리를 강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녀에게 주었고 이 최상의 것이 비록 거지들의 별것 아닌 것이라고 해도, 우리 스물 여섯 명에게 그녀는 유일했다. 우리는 얼마나 그녀를 모욕했던지... !!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시종일관 사나운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비 세계 문학- 러시아편 .148p)


아마 이 소설이 여기에서 마무리 됐다면 도리스 레싱의 지붕위의 여자를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붕위의 여자 역시 일방적인 남자들의 시선에 노출된채 그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욕설과 폭력을 당하지만..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일까? 가만히 있다가 한마디 한다 ˝꺼져요.˝ 분노를 억누르는 느리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화가 나서 지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비키니입은 여자를 보고 싶으면 옥상수영장으로 가라고.
남자는 그 이상을 기다리면서 여자옆에 한 마디도 안 하고 서있는다. 계속 버티고 있다보면 여자쪽에서 무슨 말을 하지 않을까 하고..

- 여자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를 내쳐 버린 것이다. 그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 한 채, 몇 분이 흐르도록 그대로 서 있었다. 계속 버티고 있으면 여자 쪽에서 무슨 말이라도 ㅅ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몇분은 빨리 지나가고, 여자가 시간을 의식하는 기미는 없었다. 등과 넙적다리와 팔에 어린 긴장감. 그가 가기를 기다리는 긴장감 빼고는 (창비 세계 문학 -영국. 252p)

여자라면 알것이다.
저 긴장감을.. 두렵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숨 죽이고 있어야 하는 저 긴장감..
벌건 대 낮이라고 해도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도발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무력하지만 두려운 상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저 긴장감..
왜 안가지?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냐? 어떻게 해야하지?
다행히 이 소설속 남자는 여자의 반감에 눌려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고리끼의 소설에서는 누군가 타냐의 재킷소매를 낚아챈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서두르지 않고 손을 올ㄹㅕ 머리칼을 메만지면서 큰 소리로, 하지만 침착하게 그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 ˝에이, 당신들. 불쌍한 죄수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그녀는 마치 우리가 그녀 앞에 없었다는 듯이 우리가 길을 가로 막지 않았다는 듯이 똑바로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래서 우리 중 아무도, 실제로 그녀의 길을 가로 막지 않았다. 우리의 포위를 빠져 나가자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아까처럼 큰 소리로 도도하게 깔보듯이 말했다.
˝에이, 당신들, 돼지 같으니라고 더러운 것들... ˝
그리고 그렇게 꼿꼿하고 아름답고 도도하게 사라져거렸다.
(창비 세계 문학- 러시아. 149p)

시원하고 통쾌하기는 하다.
얼마나 멋진 여자아닌가.
일방적인 폭력앞에 당당하게 욕을 해 주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니..
하지만 현실은 레싱의 지붕위의 여자라는 것이다.
참다 참다 소심하게 `꺼져`한마디 던져놓고 어서 가기를 긴장하면서 기다리는.. 더 이상 아무말도 못 하고..

같은 상황에 남자작가의 시선과 여자작가의 시선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아마 고리끼는 혁명가로서 여자라면 이런 부당함이나 타락한 비인간적인 주변을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예 고리끼와 레싱의 소설의 의도자체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혁명가로써 여자도 실제로는 레싱의 지붕위의 여자일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폭력앞에 두 손 꽉잡고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타냐처럼 저렇게 당당하고 아름다운 퇴장을 하는 여자가 되기를 바라는 의도는 알겠지만 남자의 시각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병주고 약 주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저런 집단 폭력앞에 저렇게 당당하게 치고 나올 수 있는건지 고리끼는 저런 상황을 안 당해봤을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요즘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박선생님들의 비인간적인 행태들때문에 더 불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두 손 꼭 쥐고 어서 이 순간이 가버리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여자들... 세상은 고리끼가 살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자들의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보다 더 못 해졌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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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25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선 당당하게 말하는 걸로 끝나지 않죠. 끝없이 돌아오는 보복과 앙심과 폭력. 그래서 소설도 계속 되는 거겠죠. 상투적이라는 소릴 들어도 그런 일들은 계속 일어나니까 말이죠. 도리스 레싱이 `모든 책은 풀어야 할 문제`라고 했듯이.
합리적 논리라거나 정당성, 올바름? 그건 각자의 명분일 때가 참 많습니다. 박작가가 사과문에서 스탕달 뒤에 숨어 그렇게 보이려 했듯이.

지금행복하자 2016-10-25 07:31   좋아요 0 | URL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를 감추고 숨어버리는 것처럼 추한일이 있을 까요? 잘못했으면 그냥 잘못했다 하면 되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모든 책은 풀어야 할 문제라는 말 기억해 둬야 겠어요.. 금방 잊어버리는 몹쓸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만요~

cyrus 2016-10-25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안 해본 남자들이 여자의 친절을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자신의 문제점을 받아들이기 싫어서(혹은 잘 몰라서) 여자가 자신에게 잘못 대했다는 식으로 돌립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10-25 22:07   좋아요 0 | URL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인데..
자신들만의 이상대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조심해야할 일이에요.. 남녀를 떠나서, 아무래도 남자가 지금은 기득권을 가진편이어서 좀 더 각성해야할 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