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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지음 / 모로 / 2023년 1월
평점 :
‘당신은 구할 수 있었잖아요, 당신이 우리를 버렸잖아요, 당신은 그럴 힘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정의를 맡겼잖아요, 정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잖아요, 당신은, 당신은…..’
저자는 판사다. 7년간 변호사 일을 하며 험한꼴을 당하고, 법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판사가 됐다. 분노에 찬 상대편 대리인에게 넥타이를 잡힌 채 끌려다니거나, 무능한 변호사라는 쌍욕을 듣거나, 협박을 받는 일에서 벗어났지만, 세상의 온갖 추악함을 엄청난 양의 서류를 통해 재판을 통해 만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공정하고 냉정한 판단을 해야하는 고뇌로 시달리는 더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신문에서 정치와 사회면을 보며 분노가 끓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만 번쯤)한다. 악행에 대한 형벌이 가벼워서, 권력자에게만 가벼운 형벌이 주어지는 것만 같아서, 너무 불공정한 세상이라서 분통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내리는 판사들에게 쌍욕을 날린다. 이런 사법부가 있는 이 나라 이 땅엔 정의란 업노라고 분노한다. 나도 수차례 분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이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분명 큰 오류다. 여기 적어도 정의에 대해 재판정에 서는 인간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판사가 있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이 있다. 우리가 말도 안되는 판결이라고 분노하는 사건들의 판결에도 법의 기준이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엄청난 업무량에도 어떻게든 가장 좋은 판결을 위해 재판을 미루고 미뤄 국내외 사례들을 다 뒤져 공부하고, 새로운 판례를 만들기도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분들. 시력 저하와 근골격계 질환, 계속 머리를 써서 대부분 이른 나이에 반백이 되는 와중에도 최대한 공정하고 올바르게 판결하려 애쓰는 판사들이 우리나라엔 여전히 많다.
판결문은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만을 추출해 일정한 볍률 효과를 부여할 뿐 모든 감상은 배제하는 글이다. 그나마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글은 형사 판결문의 ‘양형 이유’부분이다. 양형 이유는 공소 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판결문 마지막에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곳이다. 대부분의 사건엔 내용을 쓰지만, 피고인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 공들여 쓴 양형 이유.
책의 1장은 이런 양형의 이유가 따라 붙은 사건들과 양형 이유로 이루어져 있다.
2장은 판사로 일하면서 안타까웠던 사건들과 사연들
3장은 정의와 인간에 대한 판사의 고뇌로 이루어져 있다.
2장에서 사건이 너무 간략하게 소개돼 아쉬운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책의 전체를 다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많은 분들이 읽으면 좋겠다.
- 우리 사회의 가정폭력에 대한 불개입 풍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가정은 사적 영역이므로 공권력 개입은 가급적 자제되어야 하고 신중하게 한다는 명제는, 그 가정이 가정으로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양형 이유 일부)
위의 글처럼 이는 판결문이 아니고, 사건에 대한 설명 후 양형 이유가 기록되어 있어, 마르고 어려운 글이 아니다. 저자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영화, 문학 등을 많이 접하시는 것으로 보여진다. 책에 많은 부분 언급이 되어 있다. 종종 나도 아는 책이 나올 때면 이런 멋진 분과 나도 같은 책을 읽었구나! 하고 즐겁기도 했다.
더 집중해서 꼼꼼히 읽지 못한 마음이 아쉬워 책을 구매했다. 조만간 꼭 재독해서 내용을 곱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