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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위로 -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곽미성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11월
평점 :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제일
큰 고충은 외로움이 아닌 언어를 통한 이해 차이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언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속어나 비어가 아니더라도 문화를 모르는 데서 낯설게 다가오고 본질을 넘어 이해와 사상에 대해 다른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를 말해도 뉘앙스도 이해가 안 되거나 직역을 해도 이상한 말에 행동을 달리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
못하며 빈축을 사게 된다. 남의 나라 말로 절실히 느낀 것은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라도 자국언어에 어리숙함에
배려를 보이는 것에 이해가 아닌 당연한 자신의 문화를 이해못하는 데서 보이는 낯설은 행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던 프랑스 언어를 접할 수록 프랑스 사람과 언어에 저자는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프랑스의
언어가 보여주는 문화. 부드럽고 낭만적이며 달콤한 말들이 가득할 것만 같은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이다. 하지만 현실은 퉁명스러움과 직설, 들을 수록 얄미운 것이 프랑스
사람들의 언어 문화라고 한다. 그렇다고 표현에 인색한 것 같은가 물으면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집요한 것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잘 하는 말이 ‘쎄 빠말(나쁘지 않아)’, 미국에선 굿, 액설런트가 쓰일 상황에 이 말만 한다고 한다. “뭐 기대는 안 했는데 쫌 하네” 이런 식으로..
‘여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볼 래?’, ‘뭐, 푸틴의 영토에선 숨도
쉬고 싶지 않아.’ ‘캐나다는 어때? 풍경이 예술이야.’, ‘생각만해도 지루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나. 아이슬란드가 훨 나아.’, ‘베를린은 어때 출장 때 좋았는데.’ ‘독일인과 보내자고? 왜 그런 우울한 일을 해야 해?’ - 저자와 동거인과 대화 중 이해차이
프랑스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의심하고 사유를 증명해야 하는 데카르트처럼 자신을 ‘카르테지앙
(데카르트주의자)’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투덜대야 명석하고 흥미로운 존재로 인정받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그것이 프랑스인이 투덜거리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표현이 무미 건조하고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십일 만에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주 뻥스 아부’(내가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헤아리고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내 것처럼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명. 혼자가 아니고 나를 의지해라 당신의 비극은 나의 비극이기도 하다란
표현이다.
막상
영화를 보고 영화, 시나리오 제작하겠다는 의지에 건너간 프랑스. 이상한
말들의 온전하게 들리는데 20년이나 걸렸지만 아직도 자신 삶의 완전체 언어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부족함과 결핍, 외로움을 모국어에서 찾기도 하지만 프랑스어는
자신의 삶을 바꾸며 확장 시키며 그 민족의 사람들은 갈수록 좋아지게 하는 희망으로 다가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