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역사 교사인 제 눈에 지금 세계는 기억 상실을 앓고있어요. 과거의 실수들이 초래한 결과를 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죠.」

「제가 이야기하려는 건 단기 기억도 장기 기억도 아닌…… (심층 기억이에요. 아주 깊은 심층의 기억 말이죠. 자, 지금부터 당신의 의식 아래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의 지층들을 함께 발견해 보기로 해요. 당신을 당신이게 만드는 바로 그것을 말이에요. 심층 기억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셨어요?」

「나는 누구지? 그는 마치 거울 속의 사람과 대화하듯묻는다.
내가 아닌 것 같아. 거울 속에 보이는 이 사람은 누굴까? 이게나란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 몸과 이 얼굴을 갖게 됐을까? 과연 이 외피가 내가 진정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스스로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괴물에 불과한 이자는 누굴까? 다 그놈의심층 기억 때문이야. 그 비밀의 동굴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즐거운 곳이었다. 과학 교사였던 어머니는 엄한 분이었는데, 수시로 이렇게 말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절대숨기면 안 된다. 고백하는 순간 절반은 용서받은 거야.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을 숨기는 건 나쁜 거란다. 르네야,
잊지 말아라, 고백하는 순간 이미 절반은 용서받은 거야.)

어린 르네는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들이 실제로는힘 있는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역사가들이 퍼뜨린정치 선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장 〈므네모스>라는 이름의 파일을 만들어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아버지한테 들은 놀라운 이야기들로 파일을 채워 나갔다.

「아빠 말을 잘 기억해 두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얘기해 줄 수는 없단다. 거짓에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진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거든.」

당시 스물세 살의 대학생이던 르네는 복잡한 절차를밟아 아버지를 파피용 클리닉이라는 전문 병원에 입원시켰다. 이 병원은 모든 것은 기억이다〉라는 짧지만 강렬한 문구를 모토로, 벌어진 두개골에서 기억을 상징하는게 분명한 나비들이 빠져나오는 이미지를 로고로 쓰고있었다.

그는 영웅이었어. 영웅이라고 꼭 좋은 건 아니야. 제일 먼저죽으니까. 끝까지 살아남는 자들은 비겁한 자들, 보신만 생각하고 어떻게든 전투를 피하는 자들이야.
그런 자들이 자식을 낳고 천수를 누리는 거야. 

그런 자들의 입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돼. 이미 세상에 없는 영웅들은 그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는 거지.

므네모스 망각의 여신 레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밤의 여신 닉스에게는 쌍둥아들인 잠의 신 히프노스(최면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됨)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타나토노트> 같은 단어의 유래가 됨)가 있다. 잠에서 깰 수 있고 없음이 이 두 형제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이다.

히프노스한테는 모르페우스(형태학 morpholog‘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됨)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는 친숙하고편안한 형태로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꿔 가며 나타나 사람들이 잠들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신이다.

닉스에게는 망각의 개념이 의인화된 손녀 레테가 있다. 여신 레테는 종종 저승에 있는 동일한 이름의 강과혼동되기도 한다. 레테강에서 영혼은 과거의 자신을 깨끗이 잊고 차분하게 환생을 준비한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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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다른 곳에‘, 내게 낯선 곳에 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 부족함을 메워주는 타자성(他者性)의차원으로 나를 이끌어주었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을 늘 거부하면서도 결국 내 것이 아닌 정체성들만 하나하나 덧붙이며 살아온 나를 말입니다."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나는 결코 세상 그 누구도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라 졸라에 있는 마르쿠제의 집에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 몰래 등 뒤에서 당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신은 라 졸라의 드넓은 해변에서 바닷물에 두 발을 담근 채 걷고 있습니다. 당신은 쉰두 살입니다.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 사진은 내가 참 좋아하는 당신 사진 중 하나예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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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보가 나왔지만 나의 베스트는 지금도 변함없이 루빈스타인이다.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는 가면과 민낯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행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야. 그렇지 않아?

어쩌다 음이 흐트러져서나는 소리가 아니라, 그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심적 상황의 표현이라고(그렇다, 심적 상황의 표현‘이라고 나는 그때 실제로 말했다). 그리고 그뒤에 헤어지면서 받은 그녀의 전화번호 쪽지를,
나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원이란 매우 긴 시간이다.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하지만 그날, 거울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이상하게도 일말의 께름칙함을 머금은 위화감 같은 것이었다. 께름칙함? 뭐라고표현하면 좋을까…… 그것은 자기 경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살아가는 사람이 느낄 법한 죄책감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법에저촉되지는 않을지언정 윤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사칭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어차피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그런 유의 행위가 가져오는 불편함이다. 

그래도 반은 의무적으로, 반은 습관적으로 그 소설을 계속읽어나갔다.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도중에 내던지는 건 옛날부터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재미있는 전개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ㅡ 실제로 그럴 확률은 매우 낮지만,

아마도 내가 아까부터 느껴온 막연한 위화감 탓인 것 같았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나라는 내용물이 지금의 그릇에 잘 맞지 않는다, 혹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정합성이 어디서부턴가 손상돼버렸다는 감각이다. 가끔 그럴때가 있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당연히 거울 속의 나도 이쪽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ㅡ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 만약 나 자신이아니라면 -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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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 힘으로는 동생의 목숨을 구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뭐라도 조금이나마 알아줄 수는 있었을 텐데, 그애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무언가를 말이야. 

여자친구의 오빠가 말했다. "자네가 그때 읽어준 아쿠타가와의 톱니바퀴에, 비행사는 고공의 공기만 마시기에 갈수록 지상의 공기를 견딜 수 없어진다.… 뭐 그런 말이 나왔었잖아. 비행기병이라던가. 그런 병이 정말로 있는지는 몰라도, 그 문장이지금도 기억나."

 그것은 무언가를 우리가 살아간다는행위에 포함된 의미 비슷한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연에 의해 어쩌다 실현된 단순한 시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 두 사람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요소는 없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우주를 가로지른 끝에 이리도 덧없고 침침한 별밤하늘에서 위치를 찾아내는 데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별을 나 자신의 수호성으로 삼게 되었을까? 이야기를 시작하면 은근히 길어진다. 하지만 기회가 생긴 김에 잠깐 이야기해보자.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간결한 전기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것만으로 그럭저럭 행복했다. 어쩌다 팀이 이기고 있을 때는 게임을 즐기고, 지고 있을 때는 ‘뭐, 인생에는 지는 훈련도 중요하니까‘라고 생각하려 했다. 

잠수부가 오랫동안 주의깊게, 수압에몸을 길들이듯이,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 가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간소한 제본, 일련번호를 기입한 오백 부에 일일이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서명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하지만 예상대로 거의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을 돈 내고 산다면 어지간히 별난 인간이다. 실제로 팔린 것은 삼백 부쯤 될까. 나머지는

그것은 나의 소년 시절 일어났던, 어쩌면 가장 눈부신 사건 중하나였을 것이다. 가장 축복받은 사건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내가 야구장이라는 장소를 사랑하게 된 데는 그 이유도 있을까?

망원경을 반대쪽에서 들여다보는 것처럼신기할 만큼 투명한 기억.
몹시 멀고, 몹시 가깝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나는힘이 남아도는, 흉악한줄무늬 인디언들에게 둘러싸여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깃발 아래비통한 성원을 보내고 있다.
고향에서 심히 멀리 와버리고 말았다. 고해류 속의 작고 고독한 섬에서내 가슴은 조용히 욱신거린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그 소년과 똑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종종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사과하고 싶어진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라고,

그녀는 실로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범상치 않음은 결과적으로나뿐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을 그녀 주위로 모이게 했다. 자석이 오만 가지 형태의 유용무용한 쇠 부스러기를 끌어당기듯이.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얄팍하고 피상적이었는지, 나중에 가서 통절히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강한 개성 -혹은 흡인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평범하지 않은 외모가 있기에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F*가 풍기는 세련미와 추한 외모의 크나큰 격차가 독자적인 다이너미즘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힘을 의식하고 조정하고 행사할 줄 알았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바 없이 훌륭한, 이른바 궁극의 피아노곡으로 선택한 것은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 몇 곡과 슈만의피아노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곡만 남긴다면 뭐가 좋을까?
딱 한 곡만?
그래요, 딱 한 곡만, 하고 F*는 말했다. 말하자면 무인도에 가져갈 피아노곡.
어려운 질문이다. 집중해서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슈만의 사육제)"라고 나는 끝내 마음먹고 말했다.

연주가 아무리 기교적으로 완벽하다 해도, 그것을 구사하는방법이 음악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육제>라는 곡은 그저 무기질적인 손가락 운동으로 전락해버린다. 매력의 태반이 사라져버린다. 사실 대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난곡이다. 어지간한 피아니스트는 감당하지 못한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살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슈만은 미치기까지 했는데, 내가 다소용없게 만들어버렸다‘고, 이거,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의견 같지 않아?"
"근사해." 내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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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가 말했다.
"네가 말한 그대로 말해 보련? - 이 집안 사람 모두 나를멸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안에서 무슨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영리하다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보다오히려 내게 더 사물을 꿰뚫는 눈이 있다.
또 호리는 나와 마주치면 나 같은 건 아예 무시하고 오히려내 뒤편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시선을 준다 라고 말한 적이있었어."

아니, 분명히 보았다. 얼굴 표정이라기보다는 온몸을 흐르는긴장감 같은 것 – 굳어지던 그 모습 한 순간 바짝 긴장하는느낌.
불연속적으로 토막난 그녀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알아들을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 그녀가 한 말 속에 숨어있는 결정적이고도 명확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신랑감 후보자로 호리와 카메니가 거론되었다. 호리 - 오래트터 신뢰와 성실로 일관해 온 사람, 소지주의 자제였으나,
그 당이 임호테프의 소유로 넘어감에 따라 땅을 잃은 호리. 그을 던 친척뻘인 젊은이, 카메니.

갑자기 피곤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녀는 몸종에게 향긋한새의 향유로 자신의 손발을 마사지시켰다. 마사지의 박자에 따라 그녀의 몸이 서서히 풀렸다. 뼈마디마다 욱센거리던 신경통이 향유에 녹아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죽음인가!‘
승복할 수 없는 죽음 - 예고도 없었고, 아무도 모를 죽음 .
늙고 쇠약하여 죽는 죽음 -퍼뜩 다른 생각이 스쳐갔다. 이건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야!
범인의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것이다.

달려온 호리가 시체 앞에 우뚝 멈췄다. 에사와의 약속 때문에오던 길이었다. 노마님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그러나, 상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던 말을 멈춘 헤네트의 표정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무슨 사고가 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그녀의 야비하고 짓궂은 표정이 김샜다는 듯한 실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레니센브는 두 여자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여자는증오, 다른 한 여자는 사랑 ㅡ 어느 쪽이 위험한 얼굴일까? 그녀는 혼자 저울질하고 있었다.

"당신은 노프레트가 이곳으로 오면서 불행은 시작됐다고 말했었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악의 씨앗은 이미 집안내부에 잠재해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녀의 등장으로 그 숨은 악이 밖으로 드러난 것 뿐이지요.

 그녀의 등장이 이 집안의 후미진 곳을 노출시켰지요. 카이트의 부드러운 모성애는 자기와 아이들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로 변질했고, 소벡은 명랑하고 쾌활하던 청년에서 허풍장이 바람둥이로 바뀌었지요. 귀여운 응석받이 이피도 잔꾀나 부리는버릇없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헤네트는 충성을 가장하던 껍데기를 벗고 쌓인 증오를 표출했으며, 사티피는 약한 자나 못살게 구는 겁장이에 불과했음이 밝혀졌습니다. 임호테프주인님조차 말많은 폭군으로 전락해 버렸지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마 모든 것은 생겨나서 자라나기 때문이겠지요.. 바꿔 말하면, 가령 사람이 점차로 다정하고현명하고 보다 향상된 상태로 성장하지 못할 때엔 오히려 비뚤어진 방향으로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깁니다.
아니면, 생활 범위가 너무 좁다 보니 폐쇄적인 일상에 얽매여, 넓은 마음과 시야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고 할까요. 혹은 병충해처럼 하나의 병원균이 한 사람씩 차례로 전염시켜 급기야모두 병에 걸리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만은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어요."
"바로 그겁니다. 내가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그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의 기질로 억압된 기분을 풀어 버

그의 내부 어느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불평불만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 언젠가 오솔길에서 본 뱀처럼 말입니다.

죽음… 생을 생각하다 보니 한 바퀴 돌아 원점, 다시 죽음의 문제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호리가 죽게 된다 해도, 나는 그를 잊지 않을 테야! 호리는 내 마음속에서 그치지 않는 노래가 될 거야 - 영원히……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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