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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광경이 있다. 너무 어린 날에 본 광경이라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분명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이른바 공장지대였고, 주택가는 그 공장지대를 피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 주택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낯선 장소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꼈지만 돌아갈 궁리를 하기 보단 이상한 기계음으로 시끄러운 그 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거기서 보게 되었다. 닭털로 보이는 수북한 뭉치들이 벨트 위에서 어디론가 올라가고 있고, 한쪽에서는 털이 뽑힌 닭들이 어떤 창고 같은 장소로 옮겨지고 있었다. 충격을 받기보다는 어린 마음에 신기하고 놀라웠다. '쟤들이 이런 곳에서 저렇게 되고 있구나!'하는 다소 무감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그런 광경을 봤다면 어떨까? 그때 내가 봤던 것보다도 훨씬 청결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고기화'되고 있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그 때의 나처럼 무감각하게 반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지금의 아이들은 나의 경우처럼 우연히 라도 그런 장면을 보게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사육과 육식>의 저자 불리엣이 구분한 사육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사육시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적어도 그 경험을 할 당신엔) 그렇다면 앞선 언급한 경험에서 '무감각한' 반응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게다가 난 그 때 보다도 더 어렸을 때, 돼지를 살육해서 고기를 발라내는 과정을 지켜봤었고, 거기서 나온 간과 피를 맛본 경험도 있다.(어렸을 때 유난히 눈이 나빴는데 그래서 돼지 간을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저자가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는 사육시대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전기사육시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로 때로는 동물이 신성시되기도 했던 때다. 이는 원시 토템신앙이나 신화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사육시대'. 이 시대는 인간의 이해에 따라 동물들이 철저하게 대상화된 때이다. 그래서 동물의 위상을 땅에 떨어졌고, 동물의 가치는 필요에 따라 돈으로 지불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후기사육시대'. 이제 인간들은 동물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식탁 위에 오르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사육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논하고, 시체로서의 육식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 왜 인간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더 나아가 윤리적 불안까지 느끼게 되는 걸까? 저자는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력이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주장하며 약자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이 의문에 답한다. 그리고 이런 '후기사육시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와 의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상력'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전기사육시대'의 동물이 인간과의 관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인간과 동물 공존하기 위해선 서로가 동등하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하며 높아진 인간의 위상을 낮추고, 낮아진 동물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나는 '사육시대'적인 사고를 지녔다고 했다. 그러나 닭목을 비틀고, 돼지 배를 가르는 일상이 계속 되지 않는 이상 나의 그런 사고는 그 당시에만 한정될 뿐이다. 지금의 나는 정말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육식에 있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진 않지만, 이따금씩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인간의 먹이로만 키워져야 하는 동물들의 현실을 볼 때는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 말이다. 언젠가 강호동씨가 나오는 TV프로에서 별안간 '동물도 고통을 느낄까?'라는 내용으로 엉뚱한 내기를 벌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정답은 거의 모든 동물이 고통을 느낀 다는 것.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적어도 이 작은 사실만이라도 잊지 않는 다면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불편한 동거'는 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