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즐거움 -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들려주는 120편의 철학 앤솔러지
왕징 엮음, 유수경 옮김 / 베이직북스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철학과 만나다

  심리학이 사람의 생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철학은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간 심리학과 철학이란 학문과 친해지기 위해 적잖이 노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소통에서 상처받지 않고, 진실로 인간적인 사람이 되고자 했던 작은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꼭 노력한 만큼의 결실을 주는 건 아닌가봅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도 저 자신에 대한 인간성 회복도 순간순간 부딪히는 삶의 부조리를 겪고 나면 애초에 노력은 온데간데없고 험상궂은 얼굴과 냉소로 가득 찬 모습만 남게 됩니다.

<철학의 즐거움>은 그런 저에게 많은 힘이 되었고, 반성의 계기를 주었습니다. 삶에 대한 고민과 좌절이 앞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석학들의 진심어린 이야기들로 인해 시원하게 해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생각해 주는 만큼 나 역시도 누군가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확신과 신념이 오히려 인간관계에 있어 나쁜 영향을 주는 장애가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공부하고, 많이 생각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가치를 깨닫고자 했던 노력이 반대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고 매도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이라는 끝 모를 길 위에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 '여기 여기는 그렇게 걸어선 안 되는 거였어.'하고 짚어주는 그들의 가르침과 충고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부쩍 커진 자신감으로 앞으로 걸어야 할 미지의 길도 경쾌하고 힘차게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철학의 즐거움>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참과 진리, 생명의 존귀함, 고귀한 덕, 인간의 본성, 우정, 사랑, 삶의 즐거움으로 주제를 구분하고 있지만 모두 삶이라는 영역 내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야기는 보통 2~3 페이지를 넘지 않는데 짧고 간단한 내용이지만 섣불리 다음 페이지로 눈을 돌릴 수 없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읽고 나면 깊은 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되니까요. 

 깊어진 생각을 통해 지난날의 경험이나 작은 기억의 조각까지도 수면 위로 떠올라 반성과 평가를 내리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 평가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겠다.'라는 판단의 정리를 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철학의 즐거움'이라는 지적으로 충만한 사유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 것처럼 철학하는 자의 즐거움도 계속되리라는 걸 오늘의 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디어 2.0] 서평단 알림


'미디어는 변하고 있다'(주된 사용도구로써의 미디어)라는 명제는 이제 미래를 내다보는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게 느낄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좋아하는 드라마나 쇼․오락 프로그램의 시청시간을 놓친 경우 TV편성표를 뒤져가며 재방송 날짜를 찾아보거나 아니면 유선방송에 의한 편성시간에 의지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언제든지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있으며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면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시대에서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되는 미디어는 기존 미디어가 가지고 있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정보전달의 한계를 극복해 여러 경로를 통해 수평적인 정보의 유통이 이루어지고, 보다 많은 능동적인 미디어 소비자를 양성함은 물론 기존 미디어에 대해서도 시대에 맞는 변화를 하도록 유도하는 식의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물론 단점 또한 존재한다. 가치 없는 정보의 홍수와 익명성을 무기로 한 무책임한 공격들,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저작권 문제 등등 해결해야 할 숙제 또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빠르게 진보하는 미디어의 변화속도에 맞춘 신속한 대처가 필요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미디어, 즉 이 책의 제목이자 저자가 화두로 삼고 있는 대상인 미디어2.0에 대해서 살펴보면 미디어 2.0은 그 전 단계인 미디어 1.0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생산자와 수용자가 확연히 구분돼 있지 않고, 그 경계가 흐리며 다양한 종류의 정보들이 분산되어 개인의 취향에 맞게 수용되는 것을 말한다. 즉 개인들이 중심이 되며 다양한 채널을 통해 주관적이고 전문적인 내용들이 노출되고 유통됨을 말한다.

언젠가 한 포털의 카페를 방문했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차분한 목소리의 여성이 라디오DJ처럼 음악방송을 송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그 카페에 머물렀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광고 듣겠습니다."하는 멘트만 빼고는 일반 라디오 방송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제는 인터넷을 이용해서 DJ까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나 또한 작년부터 시작한 블로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물론 활동영역은 책 리뷰쓰기에만 국한되어 있지만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글로 올려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비록 보는 사람은 소수일지라도 나만의 미디어를 가지고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미디어 1.0이 갖지 못한 통 큰 가치를 실현하는 것부터가 미디어 2.0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개인 각자가 어떤 식의 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해서든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의사를 내비치는 행위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분홍빛 손톱
아사노 아쓰코 지음, 김난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10대에 관한 청춘소설을 읽을 때면 제가 10대였던 시절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됩니다. 지독한 장난꾸러기였던 저와 제 친구들, 새침한 척하지만 좋아하는 아이에게 만큼은 적극적이었던 여자아이들...소설의 장면을 상상하며 읽다보면 저의 그 시절의 풍경 속에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소설 속 내용에 맞춰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분홍빛 손톱>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이없는 루머에 휘말리는 루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어이없는 풍문에 솔깃해 했던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올랐고, 이별에 가슴아파하는 요스케를 통해선 바보스럽게 놓쳐버린 저의 첫사랑 그 아이가 문득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홍빛 손톱>에는 제 경험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루리와 슈코의 관계지요. 이 소녀들은 이성에게는 끌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성인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요.

루리는 타인을 향한 '방어막' 같은 게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죠. 그래서 가족은 물론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에게조차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게 대하게 됩니다. 반면에 슈코는 오히려 타인의 편견어린 시선이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하는 '벽'을 만들어 버립니다.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인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이 주위의 눈총을 받고 있음을 자각하지만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벽이 점점 높아만 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루리와 슈코는 동성이나 이성 관계 모두 온전치 못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소외됐으며 한 사람은 악성루머에 시달리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꺼림칙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들은 만났고, 서로에게 마음이 끌려 처음으로 인간적인 '관계 맺기'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루리는 변하게 됩니다. '상관없음'과'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일상이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슈코를 통해서 일상을 비롯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것은 언니인 키라와 루리의 대화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키라도 루리의 변화가 '사귐'에서 비롯됐다는 걸 느끼지만 그 대상이 '여자아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숨어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루리와 자신을 둘러싼 벽을 허물고 들어온 루리라는 아이를 마주한 슈코. 여기가 끝이 아니기에 추억은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슈코의 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관계는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될지도 모릅니다. 모진 세상의 풍랑 속에서 숱한 상처를 받을지라도 꿋꿋하게 버텨 이겨내는 당찬 그녀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호준씨의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을 읽는 동안은 마치 오래된 졸업사진을 보는 듯한 반가움과 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넉넉했던, 어딜 가도 자연이 마련해준 편안한 쉴 자리와 마음이 맞는 동무들과 만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어린 시절의 달콤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추억의 그 모습들을 이젠 이런 책으로 밖에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무겁기도 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초가집, 돌담 등이 있던 과거의 풍경들은 거의 모두 사라졌고, 이들을 보기 위해선 민속촌이나 민속박물관으로 가야한다. 또한 정보의 홍수와 미디어의 범람 속에 각종 오락물이 넘쳐나 풍물패, 서커스 등의 과거의 볼거리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그 자취조차 찾기 힘든 실정이다.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했고,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과거의 유산들은 이렇게 점점 설 자리를 잃고 하나 둘 씩 사라져가고 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이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 졌으며, 그나마 박물관의 한 구석에 자리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법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은 지키기 힘들더라도 다른 형식의 방법을 통해 사라지고 있는 과거의 모습을 일부 보존할 길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지역 축제를 통해 보존하는 방법이 있다. 요즘 난립하는 지역축제로 인해 축제 자체의 의미가 혼탁해진 감이 있지만 지역의 다양한 축제야 말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유산들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박물관과 민속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체험관을 확대 보급하는 것이다. 나 역시 종이 박물관에서 (비록 체험자의 편의에 맞춘 단순한 과정이었지만) 직접 종이를 만들어 보는 체험을 통해 과거에 종이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제'와 연관시키는 방법이다.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보성 녹차 밭의 성공을 벤치마킹해서 보리밭 관광지를 육성하는 방법이나 옛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도구들로 음식집이나 찻집을 인테리어 하는 방법, 사극 세트장을 활용하는 방법 등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곧 돈이 되는 방법들을 찾아 활용하면 자연스레 과거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삶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옛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배틀넷을 통해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요즘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과 손때 묻은 딱지와 구슬이 주는 즐거움을 모른다. 물론 어느 게 더 좋은 거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가장 '인간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답은 금방 나올 것이다. 사라져가고 잊혀져가지만 어떻게든 그 일부라도 지켜야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광경이 있다. 너무 어린 날에 본 광경이라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분명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이른바 공장지대였고, 주택가는 그 공장지대를 피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 주택가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낯선 장소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꼈지만 돌아갈 궁리를 하기 보단 이상한 기계음으로 시끄러운 그 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거기서 보게 되었다. 닭털로 보이는 수북한 뭉치들이 벨트 위에서 어디론가 올라가고 있고, 한쪽에서는 털이 뽑힌 닭들이 어떤 창고 같은 장소로 옮겨지고 있었다. 충격을 받기보다는 어린 마음에 신기하고 놀라웠다. '쟤들이 이런 곳에서 저렇게 되고 있구나!'하는 다소 무감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그런 광경을 봤다면 어떨까? 그때 내가 봤던 것보다도 훨씬 청결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고기화'되고 있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그 때의 나처럼 무감각하게 반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지금의 아이들은 나의 경우처럼 우연히 라도 그런 장면을 보게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사육과 육식>의 저자 불리엣이 구분한 사육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사육시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적어도 그 경험을 할 당신엔) 그렇다면 앞선 언급한 경험에서 '무감각한' 반응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게다가 난 그 때 보다도 더 어렸을 때, 돼지를 살육해서 고기를 발라내는 과정을 지켜봤었고, 거기서 나온 간과 피를 맛본 경험도 있다.(어렸을 때 유난히 눈이 나빴는데 그래서 돼지 간을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저자가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는 사육시대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전기사육시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로 때로는 동물이 신성시되기도 했던 때다. 이는 원시 토템신앙이나 신화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사육시대'. 이 시대는 인간의 이해에 따라 동물들이 철저하게 대상화된 때이다. 그래서 동물의 위상을 땅에 떨어졌고, 동물의 가치는 필요에 따라 돈으로 지불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후기사육시대'. 이제 인간들은 동물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식탁 위에 오르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사육동물의 권리에 대해서 논하고, 시체로서의 육식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 왜 인간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더 나아가 윤리적 불안까지 느끼게 되는 걸까? 저자는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력이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주장하며 약자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이 의문에 답한다. 그리고 이런 '후기사육시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와 의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상력'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전기사육시대'의 동물이 인간과의 관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인간과 동물 공존하기 위해선 서로가 동등하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하며 높아진 인간의 위상을 낮추고, 낮아진 동물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나는 '사육시대'적인 사고를 지녔다고 했다. 그러나 닭목을 비틀고, 돼지 배를 가르는 일상이 계속 되지 않는 이상 나의 그런 사고는 그 당시에만 한정될 뿐이다. 지금의 나는 정말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육식에 있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진 않지만, 이따금씩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인간의 먹이로만 키워져야 하는 동물들의 현실을 볼 때는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 말이다. 언젠가 강호동씨가 나오는 TV프로에서 별안간 '동물도 고통을 느낄까?'라는 내용으로 엉뚱한 내기를 벌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정답은 거의 모든 동물이 고통을 느낀 다는 것.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적어도 이 작은 사실만이라도 잊지 않는 다면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불편한 동거'는 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