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 500년 조선사를 움직인 27인의 조선왕, 그들의 은밀한 내면을 파헤친다!
강현식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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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와 심리학의 만남

조선의 역사를 단지 시대적 흐름이나 왕의 계보를 통해 조명하는 방식을 벗어나 다양한 주제를 통해 접근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전쟁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는 <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나 조선시대에 창궐했던 갖은 역병을 토대로 한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심리학'이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조선의 역사,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조선 왕들의 심리를 추적해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는 책이 있으니 바로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하지만 심리학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본다는 신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염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본디 심리학이라는 것이 내담자의 신상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체계적인 접근으로 조심스러운 진단이 이루어져야 할 분야인데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한 사료조차 충분치 않은데다가 가장 중요한 사료로 치부되는 실록마저도 '승리자들의 역사'로 그 한계가 분명한 상황에서 과연 왕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역사에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끌어들였음에도 동어반복이나 피상적인 접근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은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부대 속에 조선의 역사라는 술을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다. 우선 책은 9장으로 마디를 정해 비슷한 심리패턴을 지닌 왕들을 나눠 서술하고 있다. 태조에서 단종까지는 익숙한 내용에다 적절한 심리용어가 더해져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세조에 이르러서는 세조의 사뭇 다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로 인해 세조가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어떤 면에서는 단종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정심이 낳은 역사의 희생양은 아닐까 하는 새로운 생각을 해보게 됐다.

이 책이 조선의 역사와 왕의 심리를 다루는 만큼 가장 관심 있게 살펴본 부분은 바로 반정의 희생자인 연산군과 광해군, 반대로 반정의 주인공인 중종과 인조에 대한 것이다. 책에서 연산군은 불온한 가정환경이 나은 시대의 탕아로 규정짓고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종래에는 부적격한 군왕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즉위 초에는 괜찮은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이는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 나는 연산군에 관한 다른 관점, 즉 <왕의 투쟁>이란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연산군이 공포정치의 맛을 안 뒤 그것을 곧잘 이용했다는 견해에 마음이 실린다. 아첨하는 자들이 왕의 눈과 귀를 흐리는 가운데 연산군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가 빠른 것이었으리라.

한편 광해군에 관한 키워드는 열등감이었다. 명의 세자책봉 거부나 선조와의 불화 등으로 광해군의 불안해진 심리가 적자인 영창대군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어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공감할만한 내용이지만 광해군이 생사를 오가는 전장을 누비고, 끊임없이 왕위계승문제에 시달려야 했으며 항상 불안한 상태의 중간자적 입장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열등감 이전에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 열등감과 더불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광해군이 조선의 여느 왕보다 친국을 단행한 횟수가 가장 많은 왕임을 고려해볼 때 안전을 중요시하고 또 그를 위해서 극한의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반정이라는 이름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을 밀어내고 각각 왕위에 오른 중종과 인조는 즉위한 과정은 비슷할망정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중종이 왕위찬탈자들에 의해 뜻에도 없던 왕위에 오른 반면 인조는 자신이 직접 개입해 왕좌를 차지했다. 하지만 갑자기 왕이 된 중종보다도 자력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국정운영이나 대외관계에서 엄청난 실패를 거듭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품이나 왕으로서의 미덕 면에서 인조는 참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던 왕이었다. 어쩌면 동생에 대한 복수심으로 왕위를 노렸던 그가 제대로 제왕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던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조선 왕들의 심리를 토대로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는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은 증거부족이나 과대해석으로 인해 취약한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아주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역사는 인간의 기록이고 인간의 기록은 누적된 경험의 산물이기에 경험의 맥락을 짚어보는 시도야말로 역사의 감춰진 의미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보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한 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억지추측이나 과대추리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런 부분이 없지 않으니 보완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심리학의 만남은 역사적 접근과 학문적 접근이 동시에 이뤄지는 만큼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새로운 시도로 역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뜨게 한 점만은 높이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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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사이드의 남자 1 뫼비우스 서재
칼렙 카 지음, 이은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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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어린 조카가 한 명 있다. 너무 어리기에 한없이 주는 애정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이따금씩 칭얼거림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식사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경우 나도 모르게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 아이를 바라볼 때가 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부당한 대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누려야 할 여유와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그 녀석에게 약간 약이 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낌없는 온정과 사랑으로 그 아일 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엄마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다, 적정한 때가 될 때까지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야할 권리가 있는 바로 그 아이를 위해서이다.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에는 자신이 가진 이름보다 범인이나 살인범 더러는 미친놈으로 불리는 게 자연스러운 한 남자가 나온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가 아이인 시절에 앞서 내가 언급한 사랑과 보살핌의 절대적인 결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탄생조차도 축복받지 못했으며 가족이나 그 어떤 이웃으로부터 아이로서 누려야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불행한 탄생에 약간의 장애가 더해져 온갖 비난과 멸시, 끔찍한 혐오와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아이는 자신이 평소에 즐기던 놀이를 하던 중 친했던 누군가로부터 또 다른 형식의 폭력까지 당하면서 이른 나이에 세상의 모든 악행을 죄다 경험하는 상황에 이른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던 그 아이가 바르게 성장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아주 자명하다.

소설은 1896년 고도의 성장과 거기에 발맞춰 고도로 타락해가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정말이지 당시의 뉴욕의 모습을 처절하리만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그것도 극과 극의 대비를 통해 당시의 풍경을 그림처럼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화려한 건물 속에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거리의 부랑아로 혹은 퇴폐업소의 손님으로 살아가는 그네들의 모습 속에서 당시 뉴욕의 극명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대도시 안에서 거친 삶을 사는 이들의 대부분은 일거리를 찾아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이었다. 당시 노동이민자들의 삶이 다 그렇듯 낮은 임금과 중노동, 불결한 환경이 그들과 함께 했고, 때때로 찾아오는 생존의 위협마저 그들 스스로가 강담해야 했다. 부패한 경찰과 그들의 푼돈을 노리는 다양한 무리들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연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 있는 거대도시 뉴욕에서 끔찍하게 살해된 아이들의 시체가 연이어 발견된다. 대다수 경찰들은 무법자 천지가 돼버린 뉴욕에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라 여기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는 수 없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다른 이들이 나서게 된다. 현직 정신과의사와 기자, 신참 형사들로 구성된 우리의 '수사팀'은 경찰을 대신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잔인하고 몰상식한 사건인 만큼 정신과의사인 크라이즐러의 뜻에 따라 범인의 심리를 분석하기 위해 과거행적을 캐내기로 하고 숱한 저항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범인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간다. 하지만 범인의 실체와 살해동기를 알아내는 일에 다가갈수록 모종의 위협은 점점 커져가고 결국 수사팀을 돕던 이들의 희생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한다. 진실을 향한 그들의 모험을 방해하는 이들은 누구며 과연 수사팀은 범인의 살해동기를 알아낼 수 있을까?

소설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골몰하고 단서를 모으는 수사팀의 행적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살해된 아이들의 모습에서 살해현장에 남은 작은 흔적에 이르기까지 수사팀은 얻은 정보를 샅샅이 분석한 뒤 범인의 정신상태와 살해동기에 관해 추리해본다. 하지만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건 크라이즐러가 가지고 있던 굳건한 편견을 깨면서부터다. 여경 새러의 줄기찬 외침과 반발에 크라이즐러가 뜻을 굽히고 다른 멤버들이 동조하는 가운데 사건을 급속도로 해결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한 인간의 행동이 빚어낸 결과에 대해서 그 이유가 어린 시절의 경험에 있다는 사실을 주시한 채 범인을 '역추적'했던 그들의 노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긋나게 채워진 단추는 어긋난 그 시점부터 바로잡아야 하듯이 범인의 과거를 알고자 했던 그들의 생각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한 인간의 고통스런 과거로의 여행은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갖은 구박과 박해로 점철되는 그의 어린 시절은 헤치고 벗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였다. 그는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폭력의 싹을 잘라내지 못한 채로 성장해 모방범의 전례를 따르게 된다. 하지만 끔찍한 살인마임에도 다소나마 동정심이 생기는 건 그의 불온한 가정환경 때문일 것이다. 가정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집단이지만 성원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앞서 나는 이 소설이 19세기 뉴욕 모습의 극과 극을 그리고 있다고 했고, 한 예로 부를 얻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모습을 비교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예가 추가된다면 경찰청장 시어도어의 가정과 어린 시절 '그'의 가정을 들 수 있겠다. 그와는 달리 시어도어의 아이들이 더 행복하고 그들의 미래도 한결 밝다는 것은 가족이 주는 긍정적인 형태의 커다란 힘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 결핍된 가정에서 태어나 일그러진 인생을 살았던 그를 보면서 나는 새삼 가족의 중요성을 생각함과 동시에 조카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가족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 것, 게다가 그 대상이 어린 아이라면 애정을 듬뿍 담아서! 이 짧은 생각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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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벤치에 앉아 인생을 생각하다
잔 카제즈 지음, 박노출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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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삶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한층 더 깊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없다. <철학의 벤치에 앉아 인생을 생각하다>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월마트의 한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과거 속 인물들과 현대에 사는 사람들 사이를 넘나들며 철학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쏟아 놓는다. 그들의 인생관, 삶의 궤적, 추구하는 가치 등을 따져보며 진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추출해서 나열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따로 떼어내어 그것들이 갖는 진정한 가치, 의미 하는 바 등을 재서술하며 또 한 번 사람들의 인생을 샘플로 활용해 다시금 인생에 관해 생각할 시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러한 요소들은 개인에 따라서 편차가 심하다. <철학의 벤치에 앉아 인생을 생각하다>에서는 특정 가치에 전심전력하거나 현 상태에서의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가치에 관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길 몇 개의 내용으로 추려보면 누군가는 중년 이후의 톨스토이처럼 ’초월성’에 목을 맬 수도 있고, 촌각을 다투는 죽음의 현장에서 잠시 쉬는 것조차 쉬이 허락할 수 없는 파머처럼 ’도덕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고단하고 기계적인 삶을 사는 노동자들처럼 단지 좀 더 편안하고 유연한 삶을 살게 만드는 ’자율성’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은 그렇게 모두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이 모습 속에 행복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에겐 적어도 ’행복의 추구’라는 공통점은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들과 같지는 않다. 소소한 욕망의 충족 속에 달콤한 행복의 열매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욕망충족 이론을 예로 든 부분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의 맹점을 아프게 꼬집는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가치와 선택의 주체가 되는 것은 이상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가진 욕망들의 상당수는 조작, 허위정보, 혹은 노골적인 속임수의 결과다. ...... 우리가 이 물건 하나 장만하고 나면 당신 인생이 나아질 거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당신 인생을 욕망의 주체로서 존중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뉴욕 메디슨 가 어디에 있는 광고회사를 칭찬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의 욕망을 충복하는 게 행복의 전부라 믿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더욱 분명해 지는 사실이 하나 생겼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도덕성과 자율성 그리고 초월성 등은 주체적인 것이면서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책에서는 이보다도 더 복잡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행복을 향한 그런 ’필수적인 가치’들을 조명하고, 분석하고, 서로 비교해 보기도 한다. 쉽사리 이해되는 과정이 아니라 따라가기가 좀 벅찼지만 말이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벤치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정리한다. "충만한 삶이라는 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이라면 1급 목록에 등재된 모든 덕목들을 부여받고, 2급 목록에 포함된 덕목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취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곧 절대적인 기준으로 완벽한 삶을 산 누군가가 사람만이 정상의 문턱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의 정상에 이르기 위해 내게 남?어도 나는 이 책과의 만남을 통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의 이정표 정도는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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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바라타 1 - 주사위가 던져지다
크리슈나 다르마 지음, 박종인 옮김 / 나들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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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담긴 인도의 서사문학 속으로

 생각해보건대 방송을 통해 인도의 신화에 관한 내용을 접할 기회가 비교적 많았었던 것 같다. 인도의 축제를 다룬 다큐에서부터 인도의 젖줄 갠지스 강에 관한 프로그램까지 그 방송내용에는 하나같이 인도의 힌두신화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화의 발단이나 근본, 형성과정 등은 알 수 없었다. 내가 본 방송에서는 인도의 신화가 하나의 보조재로 사용되었기에 주요 신들의 이름이나 특징 정도를 언급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의 단군신화나 서구의 그리스 로마신화에 비춰 아주 미미한 지식만 가지고 있던 인도의 신화, 과연 그들의 신화는 어떤 것일까?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신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자 인도의 철학과 종교가 결합된 최고의 경전이다. 만약 서양의 탈무드와 성경이 한 권의 책으로 되어있다면 아마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인도사람들은 흔히 <마하바라타>를 가리켜 "세상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으니, 세상에 있는 것은 마하바라타에 다 있고,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세상에도 없다"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마하바라타>는 방대한 저작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이 기록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순한 기록과 종교적 색채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유가 더해져 읽는 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그럼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 아름다운 유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마하바라타>의 내용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바라타족에 속하는 쿠루족과 쿠루족에서 파생했다고 할 수 있는 판두족 두 사촌지간이 융합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전쟁이야기다. 능력에 대한 시기와 왕국에 대한 야욕이 촉발한 이 사태는 모략과 배반이 난무하는 가운데 처절한 싸움으로 치닫는다. <마하바라타>의 큰 줄기가 이 두 사촌간의 불화와 반목에 관한 내용이라면 작은 줄기는 두 사촌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고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으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 가운데 결혼이나 신과의 영합을 행하기도 하면서 누군가와 손잡거나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를 굴복시키며 세를 확장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의 <마하바라타>지만 읽기가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낯선 지명과 외우기 힘든 인명에서부터 다시금 앞장을 떠들러봐야 하는 인물들의 관계까지 정말 고행 같은 책읽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들이 펼치는 그 웅장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찬란한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특히 비마나 아르주나 같은 능력이 출중한 영웅들이 전장을 누비며 적들을 굴복시키는 장면은 큰 쾌감을 준다. 인간과 신이 한데 어우러져 펼치는 웅장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삶의 지혜와 미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마하바라타>, 책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모습과 지혜의 경구나 내 몸 깊숙이 자리 잡아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주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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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조곡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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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을 넘나드는 망상에 관한 이야기 

 

온다 리쿠의 신작 <목요조곡>은 총망 받던 여류작가 도키코의 죽음 이후 4년이 흘러 그녀와 교류하던 다섯 여성이 함께하는 사흘간의 연회를 그린 소설이다. 그녀들의 이번 만남은 '도키코에 관한 글을 짓자'라는 다분한 의도가 섞인 모임이었고, 그래서 도키코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대화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섯 명 각자의 회고 속에 도키코가 숨을 거두었던 그날의 풍경이 놀라움이나 탄식과 함께 희미하게 그려지고 4년이나 묵은 진실 혹은 망상이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부유한다. 4년 전 느닷없이 찾아온 도키코의 죽음은 과연 그녀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구이스 저택이란 좁은 공간에서 저마다의 기억에 의지하며 다시금 도키코의 죽음에 관한 사건을 반추하는 장면은 온다 리쿠의 전작 <네버랜드>와 많이 닮아있다. 기숙사라는 닫힌 공간 안에서 자기가 가진 비밀을 이야기하는 소년들처럼 그녀들 역시 자기만 알고 있는 그날의 기억을 꾸역꾸역 토해낸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목요조곡>은 <네버랜드>보다 진일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네버랜드>에서의 화두는 '비밀'이었고 저자는 어느 순간 그 비밀의 모습을 내보인다. 하지만 <목요조목>에서의 화두는 '망상'이다. 저자는 사건의 완벽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에리코가 중간에 탐정을 자처하며 사건을 재구성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얻어낸 결론이 완벽한 정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저자는 독자들 개개인이 저마다의 도화지 위에 그날의 사건을 그려보길 원하는 것이 아닐까?

 

소설에는 망상이란 단어가 참 자주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 모두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망상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들의 하소연은 글 쓰는 이들의 고뇌와 고충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사건을 관찰하고 재구성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음을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 이는 그녀들이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식탁 위의 수다'가 단순히 이야깃거리를 늘어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건의 전모를 추적하는 살벌한 진실게임이 되도록 한다. 마치 라쇼몽의 세 남자들처럼 그녀들이 회고하는 그 이야기들은 한없이 주관적지만 그녀들의 생각이 진실이고 사실인 양 믿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들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 역시 독자들을 더 깊은 망상의 늪으로 빠지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그녀들의 망상이나 소견을 배제한 채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처럼 모두가 공범이라고 믿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한 사람의 부실한 알리바이(물론 소설에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를 근거로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소설의 흐름과 결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이 독자들의 망상을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에리코가 가장 진실에 가깝게 퍼즐을 맞추고 있지만 분명 어딘가 왜곡되거나 빠진 부분이 존재한다. 그 부분을 채워야할 의무가 바로 독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좀 더 의심의 눈초리를 견지한 채 그녀들의 이상행동이나 이해관계를 따져가며 망상을 해보면 재미를 뛰어넘는 야릇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범인은 꼭 현장에 나타난다.'라는 해묵은 교훈을 생각해서라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결코 망상을 멈춰서는 안 된다. 4년 전 사건의 전모는 오로지 독자들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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