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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삼대에 걸쳐 파헤쳤던 사건, 그리고 진실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는 일대 안조 세이지, 이대 안조 다미야 그리고 삼대 안조 가즈야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경관의 길을 걸으면서 접해야 했던 숱한 사건들과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소설에는 종전 후 거의 한 세기에 달하는 장대한 세월 속에서 정치, 역사적으로 변모하는 일본의 모습과 그 변화의 중심에서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 힘쓰는 경관들의 고된 삶이 잘 녹아있다.
일거리를 찾다가 우연히 경관의 길에 접어든 안조 세이지는 무던하고 평범한 남자였다. 경관은 고정적인 수입과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는 경관으로서의 의무와 소임을 다하면서 명예와 실적을 쌓아갔고,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주재소 경관이 되었다. 민원업무가 핵심이던 주재소자리였지만 그는 한 살인사건에 관심을 보이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 안조 다미야. 그는 우수한 재원이었고 그래서 능력을 인정받아 특수임무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고된 임무의 끝에 그는 극히 불온한 정신 상태를 보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미야는 자신을 추슬러 모범적인 경관의 모습을 갖추어나간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와 같은 주재소 자리에 이르고, 그 역시 아버지가 엮인 그 사건을 파헤치다 다소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변을 당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 가즈야는 아버지인 다미야와 비슷하게 특수임무를 부여받으며 경관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역시 특수한 일은 특수한 고통을 안겨줄 뿐이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경관직을 수행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가즈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근무한 지역에서 근무하게 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풀지 못한 그 사건에 대해서도 듣게 된다. 과연 가즈야는 사건의 진실을 밝혀 두 분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
<경관의 피>는 상당히 긴 호흡으로 경관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삼대에 걸쳐 그려진 경관의 모습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전후 치안문제가 극심했던 시기에 경관이 된 안조 세이지에겐 질서와 치안유지가 주된 임무였고, 다미야의 경우는 좌익세력에 대한 감시와 보고가 핵심이었다. 그리고 가즈야의 경우는 다양한 범죄조직의 소탕과 비리에 연루된 경찰들의 적발이 그것이었다. 이렇게 시대와 함께 달라지는 경관의 임무는 소설에 무게 있는 현실성을 부여하고 극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의 핵심적인 내용이자 삼대에 걸쳐 매달려야 했던 그 사건의 전모는 마침내 가즈야 대에서 베일을 벗게 된다. 전혀 극적이지 않고 차분하게 밝혀지는 그 이야기에서 결국 흉포한 범죄행위는 상실된 인간성, 으스러진 자아로 인해 생겨나며 이는 사람이 전혀 이성적일 수없는 그 모든 환경에서 발생가능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삼대에 걸쳐 추적한 사건, 그것은 범인의 단죄여부나 선대에 대한 명예회복과는 별도로 피폐한 영혼으로 범행을 일삼았던 부적격한 한 인간에 대한 고발이자 그러한 인간을 나은 사회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