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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외치다
류은숙 지음 / 푸른숲 / 2009년 8월
평점 :
인권의 역사, 인간다운 삶을 위한 열망의 외침 속으로
‘인간의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 명제가 지구 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말이 되기까지 인권이 걸어온 역사는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전제왕권시절 인권은 전제 인구의 5% 정도 되는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왕족들만 누릴 수 있는 ‘한정된 권리’였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저 고역과 납세의 대상자에 불과했고 따라서 그들은 삶은 힘에 부칠 만큼 고되고 단조롭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소수 특권층의 욕심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복종의 삶에 익숙하던 민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요하기 시작한다.
가진 자들을 향한 민중의 격렬한 투쟁은 구체제를 전복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더 이상 피폐해질 수없는, 다수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보여준 힘은 그들도 놀랄 만큼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를 운영할 역량이 부족했다. 농투성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단상 위의 선동가 말에 따라 혹은 옆 사람을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이 틈을 부르주아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들 역시도 구체제 속에서는 하수인에 불과했지만 시대가 바뀌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해 귀족과 왕족의 자릴 차지한다.
불같이 일어난 혁명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얻은 게 없었다. 민중 세력을 배제한 채 왕과 귀족의 자릴 부르주아지들이 대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또 한 번의 투쟁이 불가피하게 발생했고, 이를 통해서야 민중의 이름으로 인권이 바로 서게 된다. 바를레의 <엄숙선언>은 민중들의 입장에서 본 인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었다. 약자를 보호하고, 참정권을 보장하는 등 민중의 인권을 위한 여러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같은 선언이 구체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민중의 인권을 향한 투쟁 못지않게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찾기 위한 노력도 숱한 저항과 어려움에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흑인과 여성의 권리 투쟁이다. 노예로 부리며 가축과 동급으로 여겼던 흑인들이 백인과 동일한 권리를 얻기까지는 뿌리 깊은 편견과 싸워야 하는 고된 과정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사회의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받기까지도 사회 차별적인 인습을 혁파하고 보수적인 남성들의 강압을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흑인과 여성의 인권은 그들을 멸시했던 사회를 전복해서 얻어낸 승리의 권리가 아니라 기존사회의 개혁적인 남성들로부터 수여된 권리였다. 게다가 미국의 노예 해방을 통한 흑인들의 인권 회복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된 ’진정성이 의심되는’ 조치였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을 토대로 유추해 보건대 흑인들의 이 갑작스런 노예 해방은 도덕적인 가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서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언문에는 노예 해방의 당위성보다 필요성이 더 구체적으로 진술돼 있다.
권한 있는 인사들에게의 요구로 얻어낸 권리지만 그들이 쟁취한 인권은 다른 소수자들에게도 희망의 근거가 된다. 성적 소수자나 소수 부족 등 다수의 세력에게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됐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여준 인권 쟁취의 역사는 그 어떤 무기도 대신할 수 없는 큰 힘이었다. 인간의 권리가 무시되고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참고 견디기보다 대범하게 행동하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관철해야 만이 비로소 ’수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증명했던 것이다. 결국 인권은 수그러들지 않는 외침 속에서만 꽃 필 수 있다는 진리를 새겼다.
<인권을 외치다>는 세계사의 한 귀퉁이에 작게 다뤄진 인권 쟁취의 현장을 전면에 내세워 한없이 낮아 그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는 사람들의 작은 열망의 기록들을 꺼내 보인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본질적인 권리인 인권을 손에 쥐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 있었다. 안타까운 건 현대에도 인권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물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수가 늘어가는 절대빈곤층과 일을 해도 빚을 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다. 돈이 없이 위협받는 인권의 현실, 이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역시 누군가의 외침과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