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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쇼콜라 쇼에 파리를 담다
한정선 지음 / 우듬지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떠올릴 추억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거니까 괜찮아.
가슴 아린 추억도, 돌이키면 다시 화가 나는 추억도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추억도 모두 소중하지.
난 떠오르는 게 없는데, 넌 참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네.
넌 행복한 사람이네." <p.271>

35세, 세 번째 파리, 50일 동안의 이야기.
무언가를 내려놓고, 무언가를 찾아내고, 무언가를 배우고, 무언가를 채우자는 거창한 마음 없이 단지 '호기심'에 시작한 여행.
여기가 아닌 어떤 곳에 대한 기대감, 달콤한 맛에 대한 열망, 비슷비슷한 하루에서 벗어나고픈 일탈 심리, 태어난 지 35년 만에 혼자 살아 본다는 것에 대한 묘한 설렘, 공항이라는 장소가 지닌 설명할 수 없는 애잔함, 어딘가를 떠날 때 느끼는 기분 좋은 슬픔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었다는 그녀는 파리의 낭만을 달콤 쌉싸래하면서도 진한 '쇼콜라 쇼' 한잔과 함께 이야기한다.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쇼콜라 쇼' 찬미에 이것을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구나 싶었는데 이 여행이 어느정도는 책을 발간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정된(?)여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감동이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50여일의 시간을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낼 정도의 능력자(?)라고 생각하고 인정하니 책이 훨씬 재밌게 느껴지더라.
이사를 두 번 하고, 사람들 때문에 화병을 앓고, 가슴에 생채기가 나서 일에 대한 의욕마저 잃었을 때 선택한 '파리'란 곳.
힘든 하루하루에 안녕을 고하고 외로움을 핑계 삼아 쉬어 갈 수 있는 파리는, 내게 영원한 꿈의 도시이자 일탈의 도시라 말하는 그녀.
파리, 이 도시엔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는 그녀가 마냥 부럽기만 하다.

북쪽으로 창문이 하나 나 있고 작은 붙박이장이 있으며 낮은 매트리스를 깔아 놓은 침대, 고흐의 방에 있던 것과 비슷한 라탄 의자가 놓여있는 작음방 4½층 럭키 하우스에 터를 잡고 홀로 지내면서 파리 곳곳에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참 맛깔스럽다. 베르메르의 '레이스 뜨는 여인'을 보러 루브르를 방문했지만 해외 전시중으로 감상할 수 없다는 메모만 발견한 일이나 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다녀온 일. 방문때마다 휴관일인 '퐁피두 센터', 만 레이(MAN RAY)를 만나러 몽마르트 묘지를 찾은 일, 물갈이를 하느라 고생스러웠던 어느날 샤워젤을 크림으로 알고 얼굴에 펴바르고 다닌일 하며 클리니 박물관엔 무료 관람일이 있고, 로마 사람들은 증기 목욕으로 다이어트를 했다는 소소한 정보까지 ~
한국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오면서 알 수 없는 불암감으로 우울증에 걸린 어느날 럭키에게서 파리 우울증에 걸렸냐면서 그것을 르 카파 (Le Cafard)라고 하는데 원래 낱말 뜻은 바퀴벌레로 이 바퀴벌레를 뜻하는 낱말에는 멜랑꼴리, 우울감 등등의 뜻도 있다며 비 많이 오고 해도 잘 안나는 파리의 겨울을 날 때 '파리의 바퀴벌레'에 물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길 들려주는데 '파리'와 '바퀴벌레'의 조합이라니 ㅋ 생각만해도 넘 재밌다.

자신의 일상을 조곤조곤 펼쳐놓는 글도 편지글, 대화글등을 통해 너무나 재미나게 풀어놓는데 체류증 때문에 일년에 딱 하루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하루에 딱 한번 밤 열시에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 돈 아껴보려고 어른표가 아닌 어린이 표를 끊었다 낭패를 봤을뻔 했던 사람, 선물용으로 구입한 작은 차통이 공항 금지 품목에 걸려 낭패를 볼 뻔 했는데 세관원의 재치있는 행동으로 돌려받은 '프랑스식 조크'에 관한긴 이야기, 영화 필름을 수입하거나 수출하는 일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매해 부산을 찾고 홍상수 감독의 나쁜남자를 좋아한다는 이반과의 만남 등등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도 너무 좋았던 것 같다.
해뜨기전 빵집에 가서 갓 나온 바게트를 사와 막 끓인 커피와 먹는 호사스러움을 이야기 하다가도 화장실 때문에 제일 불편했다며 이런저런 화장실에 관련된 에피소드며 사진은 웃음을 짓게 하기도 ~
누군가 설익은 20대보다, 30대의 시간이 더 근사하다고 말했다.
30대가 되니 무엇이 좋고 싫은지 더욱 확실해졌고, 조금 더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다.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두루 거쳤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더욱 잘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위험한 건 더욱 조심해서 피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는 것을 20대에 일았더라면 조금은 덜 상처받고 조금은 덜 상처 주고 살았을텐데.' 라는 후회도 때때로 밀려온다.
나이가 들어도 내가 원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나이가 더해지는만큼 현명하고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한다면,
먼 훗날 나는 꽤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p.151>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자 낯선 곳에 던져지니 기본적인 일들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녀.
서울에서는 쉽게 무시하고 지냈던 '일상의 기본'. 이런 일들을 중심으로 내 자리를 지키며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그녀의 글을 통해 나 또한 이 자리에서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자 다짐해본다.
모든 것엔 정답이 없다. 여행도 깨달음도 마찬가지겠지. 그녀의 50일 여행에 투자된 돈과 시간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 없는 13,500원으로 그녀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다니고 그녀의 생각을 읽으며 고개 끄덕일 수 있었던 이 시간이 참으로 감사하게 다가온다.
달콤해서 깨기 싫었던 꿈같은 시간.
왜 하필 파리고, 왜 하필 쇼콜라 쇼인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집어들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