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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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맥과이어의 [얼어붙은 바다]를 읽었다. (열린책들)
2016년 맨부커상 후보작이다, 2018년 더블린 국제 문학상 후보작이다. 굵직한 상에 자주 노미네이트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우리에게 읽힐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를 사로잡은 것은 띠지에 있던 슬로건이었다.

읽는 순간 북극 한복판으로 내동댕이 쳐질 것이다.

진짜 그랬다. 여러번 패대기 쳐졌다. 비단 바다 한가운데만은 아니다. 허름하고 으슥한 야적장에도 금방 살인이 날 것만 같은 어두운 술집에도 어쩔 수 없이 팽개쳐지고 만다. 더럽고 추악한 곳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숨가쁘게 달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블랙홀 같은 이 책의 마력이었다.

주인공은 둘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처음에 나오는- 이름도 낯선- 그 사람(드렉스)이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여성독자에게는 신사적이지 못한 첫 소절부터 '이거 낭패구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원톱으로 하자고 한다면 주저없이 선박의가 된 섬너를 뽑겠다. 1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이 섬너의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섬너는 참전한 군의관이었지만 불명예스럽게 전역한다. 마땅히 일자리도 없고 현실도 피하고 싶었던 섬너는 포경선 볼런티어호에 탑승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살인사건을 만난다. 심부름꾼 역할로 탑승했던 어린 소년이 강간당한 후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섬너는 소년 살해범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배경이 포경선이어서 특이했다. 현대소설에서 고래잡이라니.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 유럽은 고래를 잡아 기름을 마련하였는데 그 과정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시각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더욱 잔혹하게 느껴졌다. 뿐만아니라 이 책에서는 북극곰을 잡는 장면도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독자는 보기 싫어도 그 잔인함에 한없이 노출되고야 만다.

그가 다시금 한쪽 눈을 감고 조준을 한 다음, 발포한다.
총알이 북극곰 둔부를 강타했다. 피가 뿜어져 나왔고, 포효가 대기를 갈랐다.
북극곰은 거칠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어깨뼈 사이의 융기부, 곧 기갑이 사납게 요동쳤고, 울부짖음과 함께 대기를 베어 무는 듯한 몸짓은 보이지 않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투와 같았다.
p.124


강제로 공간적배경 속으로 투입된 것뿐만아니라 1860년대로 강제 이동시킨다. 주인공 섬너가 복무했던 곳이 인도였는데 그 곳에서는 세포이항쟁이 있었다. 섬너는 군의관으로 전쟁터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된다. 작가의 뛰어난 묘사로 푹푹 찌는 무더위 속 전쟁터는 물론 죽음의 사자가 날마다 돛을 내리는 북극의 강추위에도 사정없이 던져지는 것이 독자의 운명이었다.

불꽃은 없었지만 시체들이 타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독수리 떼가 퍼덕거리면서 구슬픔 소리를 냈다.
화약과 그을려 눌러붙은 살점의 악취가 진동했다.
길은 박살 난 가구, 내장이 튀어나온 동물, 버려진 무기로 난장판이었다.
p.93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대원들이 자고 있던 바로 그 바닥
부빙이 위로 거칠게 솟았다.
텐트 기둥 하나가 넘어갔고, 철제 난로가 넘어지면서
벌건 석탄이 쏟아져 나와, 담요와 외투에 불이 붙었다.
p.256


섬너는 잔혹한 남성성(또는 남성상)에서 어느정도 배제 돼 있다. 창녀와 하룻밤을 자지도 않고 잔인한 폭력을 저지르거나 살인전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도둑질을 하거나 양심을 속이는 일도 않는다. 그리고 폭력으로 희생되는 소년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 어쩌면 섬너가 배 안에서 소년살해범을  반드시 잡으려고 했던 이유가 그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터에서 죽을 뻔 했던 섬너를 도와준 한 인도소년을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배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소년에게 이입되었고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그 소년이 죽자 두 사건이 합쳐지며 엄청난 책임감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갑자기 볼런티어호가 부서지면서 발생한다.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여러가닥 있는데 그 중 한 가닥이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섬너와 헨리드렉스가 치열하게 대립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배가 난파된다. 배 안에서는 대립의 강도가 약했기에 난파된 후에 목숨을 다투는 일이 있을거라고 예상했는데 드렉스가 섬을 탈출하면서 또 대립 구도가 약해졌다. 그러나 섬너는 나름대로 죽음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데 드렉스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시체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실로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잔혹한 살인마이자 사이코패스인 드렉스의 행방불명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가닥의 끈이 차례로 끊어지면서 선악의 구도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섬너의 개인적인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여태껏 달려오게 한 힘이 투투둑 하고 끊어졌다. 어쩌면 내가 원한 흐름이나 결말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작가가 오히려 창의적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국 결말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으므로  용두사미는 아니었나 아쉬울 뿐이다. 

허나 엄청난 속도감으로 단숨에 두꺼운 책의 중후반부까지 끌고 간다는 것, 마치 바로 앞에 그 장면이 연출되는 것처럼 미친 존재감을 나타낸다는 것은 인정 또 인정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혹한 속에서 죽어간 난파 선원이 된 것도 같고, 동굴 속에서 살기위해 사투하던 섬너의 모습을 직접 본 것만 같아서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또 부수적인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하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배가 난파되고 혼자 살아남았던 이력을 가진 선장 브라운리의 심리상태나 무능력하지만 갑작스러운 1인자의 갈팡질팡을 잘 다룬 케번디시 등을 집중하면서 읽는다면 재미는 배가 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해 책을 펼쳐 든다면 나와 같은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누군가의 서평보다는 개인의 느낌이 중요한 책이다. 시대적 배경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나는 절대 포경선을 타고 망망대해 한 가운데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와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이 숨막히게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매우 리얼하게 그려진 수준 높은 작품이다. 다만 개인의 정서상 잦은 욕설과 무제한적인 폭력과 광기들을 허용함에 있어 상당히 수고가 많았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극한의 환경에서 인간에게 교양을 기대할 수는 없다. 형용한다는 것조차 외람된 일이다.
아무튼 고맙다. 북극이든 전쟁터든 뱃전이든 사정없이 내동댕이 쳐 주어서 고마웠고, 믿고 보는 열린책들의 번역능력이지만 이번에도 뼛속 깊이 체험하고 엄지척을 내민다. 

정말로 중요한 질문들에는 말로 답할 수 없어요.
말은 장난감 같은 겁니다.
재미있고, 얼마간은 우리를 교양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됨의 문제를 드잡이 한다고 해봐요.
말을 포기해야 합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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