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너는 잔혹한 남성성(또는 남성상)에서 어느정도 배제 돼 있다. 창녀와 하룻밤을 자지도 않고 잔인한 폭력을 저지르거나 살인전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도둑질을 하거나 양심을 속이는 일도 않는다. 그리고 폭력으로 희생되는 소년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 어쩌면 섬너가 배 안에서 소년살해범을 반드시 잡으려고 했던 이유가 그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터에서 죽을 뻔 했던 섬너를 도와준 한 인도소년을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배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소년에게 이입되었고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그 소년이 죽자 두 사건이 합쳐지며 엄청난 책임감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갑자기 볼런티어호가 부서지면서 발생한다.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여러가닥 있는데 그 중 한 가닥이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섬너와 헨리드렉스가 치열하게 대립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배가 난파된다. 배 안에서는 대립의 강도가 약했기에 난파된 후에 목숨을 다투는 일이 있을거라고 예상했는데 드렉스가 섬을 탈출하면서 또 대립 구도가 약해졌다. 그러나 섬너는 나름대로 죽음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데 드렉스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시체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실로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잔혹한 살인마이자 사이코패스인 드렉스의 행방불명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가닥의 끈이 차례로 끊어지면서 선악의 구도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섬너의 개인적인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여태껏 달려오게 한 힘이 투투둑 하고 끊어졌다. 어쩌면 내가 원한 흐름이나 결말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작가가 오히려 창의적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국 결말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으므로 용두사미는 아니었나 아쉬울 뿐이다.
허나 엄청난 속도감으로 단숨에 두꺼운 책의 중후반부까지 끌고 간다는 것, 마치 바로 앞에 그 장면이 연출되는 것처럼 미친 존재감을 나타낸다는 것은 인정 또 인정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혹한 속에서 죽어간 난파 선원이 된 것도 같고, 동굴 속에서 살기위해 사투하던 섬너의 모습을 직접 본 것만 같아서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또 부수적인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하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배가 난파되고 혼자 살아남았던 이력을 가진 선장 브라운리의 심리상태나 무능력하지만 갑작스러운 1인자의 갈팡질팡을 잘 다룬 케번디시 등을 집중하면서 읽는다면 재미는 배가 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해 책을 펼쳐 든다면 나와 같은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