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집 아티스트 백희성의 환상적 생각 2
백희성 지음 / 레드우드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1. 어디서부터가 소설인가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작가를 알고 또는 알아보고 읽기도 하고 시대, 문화적 배경을 먼저 살피기도 한다. 작가의 서문이나 서평을 보고 읽으면 이해도 쉽다. 영화 예고편처럼 글에 대한 소개 글을 보기도 하고, 광고로 접하기도 한다. 이런 외부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글을 읽는다하더라도 보통 글의 종류 정도는 알고 들어가는 것이 일반이다. 허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초대된 것처럼 얼떨떨하고 어색하게 파티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글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야 이 파티의 종류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다.

“뭐야, 이거 소설이야?”

2.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나

다소 특이하게 시작된 이 소설은 뤼미에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지극히 이국적이고 낯설기만 했다. 국내 작가의 글을 읽고 있는데 소설 속엔 온통 외국문화였다. 지역적 배경이 되는 프랑스 파리의 부촌은 여행 책이라든가 문화 책에서 나오는 모습은 아니었다. 약간 지루하게 묘사되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 들이 읽을수록 그의 인생을 훔쳐보고 싶은 욕구로 폭발되었다. 서술자의 엄청난 관찰력이 마음을 흔들었다고나할까.

건축을 하려면 무엇이 먼저 필요할까? 설계도? 시공사? 아니면 재료. 뤼미에르라는 남자에게 건축의 시작은 ‘하고자하는 마음’ 이었던 것 같다. 상업적으로 돈 버는 일만 매달렸던 건축가에게 든 회의(悔意)는 ‘나를 위해 집을 짓자.’ 였다.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족을 위해서, 돈을 위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일하고 있는 우리는 ‘나’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편리’ 한 어느 날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면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자기를 위해 집을 짓고자한 뤼미에르의 결정은 매우 어렵고도 힘든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진짜 자신을 위하려면 이윤 따위는 당연히 버려야하고 경제적으로 축소하는 것 따위도 버려야한다. 오직 나를 위해 지어야하는 집이 존재할 수는 있는 걸까? 사람이 만족할만한 인생은 있는 것인가.

3. 어떻게 전개되는가

잠결에 한통의 전화를 받은 뤼미에르는 건축가로 자기를 위한 집을 찾고 있다. 가진 돈은 적지만 눈은 한 없이 높다. 평소 멋진 집을 눈여겨보던 그는 오래전에 지어진 낡은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을 알고 구매를 시도한다. 하지만 워낙 땅값과 집값이 비싼 동네라 반신반의 하던 중에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만남은 일사천리로 성사되었지만 집 주인과는 만날 수가 없었다. 집주인의 대리인은 집에 애착은 없어보였지만 충실해보였다. 그런데 집주인은 바로 판매의사를 밝힌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테스트를 한 후 집을 팔겠다고 이야기한다. 뤼미에르는 당황했지만 그 집에 너무도 끌려서 스위스에 있는 집 주인을 만나러 길을 떠난다. 예고없이 무작정 기차에 오른다.

예고없이 기차에 오르는 것은 지극히 소설적인 감성이다. 현실에서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가는 큰 낭패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그런 용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설의 인물이 무작정 모험을 즐기기를, 무모한 일들을 벌이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머무르기만 하는 내게 즐거운 간접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뤼미에르는 나대신 밤기차에 몸을 실어준다.

그가 도착한 곳은 차로 올라가기도 어려운 비탈에 위치한 요양병원이다. 그를 태워준 방쌍씨가 말한대로 호화 병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한 것은 확실하다. 독자가 가진 온갖 미적 감각과 관찰력을 동원해 뤼미에르의 서술을 머리에 그려보면 매우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병원의 입구가 그려진다. 문에게도 표정이 있다고 설명하는 그의 표현력에 감탄하면서 그가 문을 열 때 나도 그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다시 정원이 펼쳐진다고.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햇살과 땅을 뒤덮은 초록의 잔디를 상상하니 진한 풀내음이 얼른 코 끝을 스친다. 진짜 이런 집이 있나? 이거 어디까지가 허구지?

4. 무엇이 숨어있는가

작가는 이제부터 추리게임을 시작한다. 독서에 가속이 붙으니 머릿속이 빙빙 돈다. 사선으로 된 좁은 벽이며 벽에서 금방 튀어나오는 벌, 병원과 함께 더욱 신비한 병원장과 환자들. 마치 뤼미에르가 나인듯 내가 그인듯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속에 야릇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이미 100페이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린 곳은 중세의 도서관 안이었던 것 같다.

이름만 들어도 이상한 로망이 생기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중세’ 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같은 개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가장 꿈꾸기 좋은 청소년 시절에 자주 읽던 문학의 배경이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괜히 그렇다. 뤼미에르가 어렵게 문을 열고 들어간 중세의 도서관에는 애타게 회복을 기다리는 피터가 아닌, 건축주이자 위대한 설계가인 왈쳐도 아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일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전에 원장이 가지 말라고 했던 그 종탑 아래에서 그녀의 무덤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녀가 중요한 인물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그 인물을 탐색하다가 자못 실망하고 말았다. 그 쯤 돼서 그녀가 누군지 설명해주면 좋으련만 작가는 독자에게 또 추리를 하라고 다그쳤기 때문이다.

뭐 결론적으로 그녀의 이름은 아나톨 가르니아. 간단히 말해서 지금 병원에 누운 위독한 환자 피터의 양어머니이다.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남편을 의지하며 세 아이를 키우다가 화재로 가족을 잃은 그녀는 가족들이 그리워서 왈처의 집에 그러니까 자기의 옛 집에서 가정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녀는 몸이 앞으로 굽었고 굉장히 우울하다. 매일 밤 흐느끼며 가족을 그리워한다. 그런 그녀를 몰래 신경쓰던 왈처는 그녀를 위해 집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죽은 막내 아들이 죽기전에 허브냄새를 많이 풍겼다고 하여 현관을 개조해 그 향기가 나게 하는 것은 마술에 가까웠다. 딸의 방에서 나는 장미향을 만들어 내는 것과 나무 실로폰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은 거의 마법이었다. 그렇게 왈처는 가족을 만들어내고 결국 아나톨을 사랑하게 되는데 우연히 집 앞에 버려진 아기 피터를 만나게 된다. 왈처가 지고지순하게 아나톨을 사랑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된 것은 신의 선물 같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나톨은 곧 죽는다. 그리고 뜻밖에 아기엄마가 등장하면서 피터는 그 집에 남겨지고 왈처는 떠나고 만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독자는 매우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 왈처가 떠난 후 아버지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늘 불행 속에 살았던 아들 피터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만약 뤼미에르 같은 건축가가 없었더라면 아예 알아내지도 못했을 일 아닌가. 일종의 모험이었다. 자기 아버지의 비밀을 캐 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기는 한번도 알아내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피터의 생모에게도 분노했다. 버릴 때는 언제고 다시 나타나서 잘 키워진 아들과 엄청난 크기의 집까지 선물 받았으면 애가 자라는대로 ‘너희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다’ 고 말해주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피터가 알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도 안해주었다. 분노로 중얼중얼거리다 몇 번씩 책을 탁탁 치니 옆에 있는 남편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그러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래 이건 소설이지. 허구지, 이야기지. 하다가도 아 진짜라잖아. 건축가가 겪은 이야기라잖아. 아 들은 이야기라잖아. 조금만 허구라잖아. 아 몰라 몰라 계속 읽을래. 혼자 정신분열을 경험하고 있었다.

5.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소설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나게 많은 세세한 것들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일 때 가장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만나고 엿보고 엿듣는 것은 늘 재미있다. 수많은 소설가가 글을 쓰지만 재미와 감동과 기억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있다고 해도 치우친다. 이 소설이 혹 건축에만 치우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도 탄탄하고 읽는 내내 즐거웠다. 다만 한가지 못마땅한 점은 결말부분이었다.

뤼미에르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피터는 뤼미에르에게 집을 선물한다. 나는 이제 피터가 죽는 줄 알았다. 그전에도 요양병원에서 살고 있었고, 몸이 매우 아팠기 때문이다. 그것이 원장과 짜고 거짓말 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80이 넘은 할아버지(1921년생) 가 아닌가? 뤼미에르가 그 집을 싹 고쳐서 피터의 가족과 피터에게 양보하고 나서도 15년이 지나서 피터는 살아있다. 뤼미에르가 15년 후에 건축의 거장(?)이 되고나서도 인사를 하러 가는데  초고령의 노인이 다락방까지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사실은 매우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좀 별로였다.

뤼미에르가 집을 양보하고 나서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도 사실 명확하지 않다. 건축에 대한 다른 의미를 떠올리고 이전과는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도 그의 삶이 그렇게 변한 것 같지가 않다. 피터의 도움으로 엄청난 거장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위인이 되어 있든지 뭔가 변화가 일어나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그저 일상으로 돌아가 있는 모습이 못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인 내가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그 곳에 ‘나’의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오직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있을까? 오직 나를 위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있을까? 아직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짓는다. 뤼미에르가 특별한 경험을 했던 것도 그것에 대한 엄청난 부와 대가를 포기하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기를 위해서다. 결국 남이 볼 때는 그 결정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하더라도 본인이 만족하면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러기에 약삭빠르지 못한 뤼미에르씨는 ‘나’를 위한 집짓기에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니 소설도 성공이다. 장수노인의 엄청난 건강상태에 대해서도 성공이라고 생각해 놓자. 그게 나를 위한 소설이다.

6. ‘보이지 않는 집’인가

라디오에서 작가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작가는 일부러 겉표지에 제목을 넣지 않았다면서 독자가 스스로 책의 이름을 정해보라고 이야기했다.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책의 부제를 무엇이라고 정할까? 당신은 제목을 무엇이라고 정하고 싶습니까?

<여적(餘滴)>책 읽는 청주

나는 두 번째 ‘책 읽는 청주’ 선정도서를 경험하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책을 추천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서 기쁜 마음으로 읽는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책 읽는 청주’ 의 취지인데 ‘모든 시민이 한 권의 책을 같이 읽자.’ 는 것이다. 정말 모든 청주시민이 한권이라도 같은 책을 읽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실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바쁜 일과 중에 책 한권을 완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선정 도서만 정해 놓고 정책으로 반영하는 척 하면서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어제 라디오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저녁 7시 30분부터 cjb에서 ‘보이지 않는 집’을 읽어주고 있었다. 매일 읽어주는 것인지 일주일에 한두 번 읽어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정독을 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노력하는구나. 정말 취지대로 시행하고자 노력하는구나.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먼저 읽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앞으로도 책 읽는 청주 프로그램이 잘 활성화 되어서 모든 시민이 한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바쁜 사람도 힘든 사람도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 읽는 청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라디오에만 나오지 말고 TV광고에도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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