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전장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만약에 나는

커다란 구둣발이 개미를 누른다면 그 개미는 새끼 개미들을 부둥켜안고 개미굴로 들어갈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까. 그도 아니면 구둣발바닥 미끄럼방지에 숨어 살기를 기다릴까.

2. 내가 만난 사람

인물은 둘 뿐이다. 죽어도 관계없다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자 하기훈. 죽어도 살아야겠다며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자 남지영.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다르게 비슷한 그 둘이다. 둘은 기석이라는 남자를 사이에 둔 가족이다. 기훈은 기석의 형이고 지영은 기석의 아내인데 둘은 모두 기석을 지키지 못한다.

지영은 기석과의 결혼생활이 시원치 않았다. 지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기결혼이었고 위선이었고 기회포착이었을뿐 남편에 대한 애정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지영은 남들에게 연애박사라는 말이 듣기 싫어 기석을 이용한 것뿐 오히려 그것이 죄책감이 되어 기석을 멀리해 먼 지방으로 자진해서 떠나는 악처이다.

기훈은 컴니스트를 자처하는 백수에 불과하다. 사회운동을 하는 건지 제 멋에 빠져 으스대며 다니기만 하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끝까지 멋진 척만 하는 것 같다. 딱 내 스타일이 아니다. 기훈은 바람둥이이고 자기가 사랑에 빠진 것을 부정하는 비겁한 남자다. 단 한번 비겁하지 않은 적이 있는데 솔직한 자기 모습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그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만다. 나는 이사람이야말로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한다.

3. 글과 나 그리고 전쟁

지영은 38접경지대까지 자원해 여학교에 취직을 한다. 연고도 없고 사명감도 없다. 가족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도 없고 다만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편지 한 통 없이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는 지영을 남편 기석이 찾아오지만 매몰차게 돌려보내고 지영은 왜 남편이 그토록 싫었는지 장문의 글을 쓴다. 하지만 그 편지를 부치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진다.

지영이 남편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 연민에서 기인한 것이다. 결혼을 떠밀리듯이 했지만 그 남자에게 정을 주기는 싫었던 나르시즘 때문에 되려 남편을 미워한다. 그리고 핑계대기를 남편이 남의 밭에서 감자를 캐오는 부정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싫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의 빈자리를 잘 메워주는 친정 엄마에게도 불만이란다. 친정 엄마가 없었더라면 그래서 자기의 빈자리를 기석과 가족이 실감했더라면 자기는 가정에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편지를 적은 다음날 아침 전쟁이 터지고 지영은 우여곡절 끝에 집에 당도한다. 지영이 애초에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더 쉽게 단결했을 가족이지만 그래도 지영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집을 나가서 가족의 얼굴 따위는 떠올리지도 않았고, 전쟁이 터져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둥 이북으로 잡혀가면 더 아름답겠다는 둥 시덥잖은 말들로 독자를 기만하던 지영에게 인간미는 전혀 없었다. 찬바람만 쌩쌩이다. 그러나 간신히 살아났을 때 가족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는 장면에서 어느새 지영을 향한 동정을 마구 던지고 있었다.

기훈은 컴니스트로 뚱뚱한 변절자를 처단하기위해 애를 쓴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화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이상한 사랑이긴 하다.) 그리고 그 변절자를 처리하고자 총구를 빼들기도전에 그가 계단에서 굴러 스스로 죽어버린다. 이에 허무한 마음을 느낀 기훈은 자기와 동고동락했던 석산선생을 죽이고 공산당의 거물이 되어있었다.

(사실 이야기 전개가 굉장히 갑작스럽다. 빠른 전개가 좋기는 하지만 얼마나 지난 것인지 이해가 안될 때도 많았다.) 자기 일이 바쁘면 여자를 잊고, 자기가 울적하면 여자를 찾고는 우는 여자를 더 몰아붙이는 냉혈한이다. 그러나 어린 애들을 소중히 여기고 조카를 예뻐해서 수시로 드나든다. 그러나 기훈의 존재는 어린 조카들의 아비를 빼앗는 냉혹한 삼촌일 뿐이었다.

서울은 순식간에 인공치하가 된다. 그리고 인민군을 환영한 어느 사람들은 소련치하 친일파를 척결하듯 부자들을 약탈한다. 빨치산을 모집해 인민군을 돕도록 한다. 지영은 인민군을 도울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지만 눈치가 보여 부역을 나간다. 강을 메우는 일을 하며 피로에 지쳐 잠이 들기 때문에 아이들과 노모는 잘 돌보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 기석은 친구의 권유로 공산입당원서를 쓰고 만다.

서울은 수복되었다. 인천에 연합군이 들어왔고, 국군과 유엔군이 주둔 하던 어느 날 군중들은 다시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서울은 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기석은 빨갱이가 되어 끌려간다. 남편을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던 지영은 남편을 구호하기위해 별짓을 다하는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의 간절함이 무감한 독자의 가슴을 울리고 기석이 제발 살아 있기를 바랐다. 멀쩡하던 도시가 날아가듯 기대는 날아가고 지영은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래도 지영은 빨갱이 누명에서 벗어났다. 씩씩한 여자였다. 어떻게서든 집으로 돌아왔다. 여리디 여린 여학교 교사가 장을 부수어 리어카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생각해보았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두려워서 나 혼자 도망하지는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 리어카에 들어갈 바람이 없어 피란길은 좌절되고 만다. 전쟁 속에 무수히 피고 지었을 좌절들이 눈앞에 어리는 것 같아 몇 번씩 한숨을 쉬었다.

전쟁을 맞이한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조차 어설펐다고 한다. 그렇다. 그 누가 죽음에 익숙하겠는가. 그것이 자기의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가 능수능란하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꼬박 3년을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내 새끼들은 어쩔까. 죽어가는 서방을 찾으러 나가면서 늙은 어미의 손에 천에 둘둘 말은 가락지 몇 개를 넘겨주고 가는 지영의 뒷모습에서 연약한 여자의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곧 지영은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지영의 엄마 윤씨가 죽을 때 왜이리 슬펐는지 모르겠다. 어버이 날이어서 그런건지 홀로 있는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 그런건지. 내 생각에 윤씨도 이제야 자식을 진짜 사랑하는 어미가 된 것 같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배급인 줄 알고 좋아서 따라나간 그 곳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가 안고 있던 것은 피로 물든 쌀 주머니였다. 그에 그렇게도 슬퍼 눈물이 났다. 평생 애증하였던 어미. 시집 갈 때도, 가서도, 살면서도, 전쟁 중에도 답답했던 엄마. 그렇지만 엄마의 죽음이 지영에게는 남편을 잃을 때보다 더 아픈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없이 급박하게 도망쳐야했을 파리한 목숨줄 지영 그리고 분신같은 아이들. 그들 모습이 아파서 여러번 푹푹 한숨을 쉬면서도 책장은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쉴새없이 지영에게 남은 희와 광만은 죽지 않기를 정말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결론은 이것이다. 지영은 끝까지 서울을 지키려고 했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집이 공습으로 무너지자 이웃집으로 옮긴다. 장터에서 남은 옷을 팔아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아서 실망하던 차에 친척이 찾아온다. 이모부는 허세가 대단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것 같다. 끝까지 피란길을 책임져준다. 지영에게도 이제 살길이 열렸다.

기훈은 지리산 속에 숨어 살면서 오랫동안 목숨을 유지한다. 하지만 컴니스트가 되어 찾아온 가화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변절자가 되어서 슬쩍 살아갈 수 없는 기훈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지만 가화의 죽음은 원치 않는다. 그에 독자는 이제야 로맨티스트가 된 기훈에게 인간의 냄새를 좀 맡아보려는 찰나 가화가 그의 발 앞에 죽고 만다. 그리고 역시 허무하게 기훈은 오리가 되어 물로 떠나는 책임감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든다. 지영이 살았기 때문이다. 지영은 이제 억세게 살아갈 것이다. 전장에서 살아남았으니 시장에서 더 잘 살아남겠지. 광을 검사로 키워내고 희를 의사로 키워낼 것이다. 미제 그릇세트를 만지작거리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상처를 껴안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밤마다 울지도 모른다. 하늘을 보며 남편에게 편지를 보낼지도 모른다.

4. 시장과 전장

전장과 시장이 서로 등을 맞대고 그 사이를 사람들은 움직이고 흘러간다. 사람도 상품도 소모의 한길을 내달리며, 그리고 마음들은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폭격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장터가 선다. 남편을 잃은 아낙들은 시집올 때 가지고 왔을 법한 외국산 식기들을 내다판다. 부인네들은 가지고 있던 양장을 팔아 떼거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부리나케 돌아가 이른 저녁 밥을 해 먹고 밤이 오기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밤만은 무사하길 기도한다. 땅을 흔들고 하늘을 부수고 비행기가 지나가도 용케 살아나면 또 남은 것들을 팔기위해 장터로 나가는 그 모습이 서글펐다. 그리고 그 곳에 돈을 버는 이가 있고 주머니에 구겨 넣을 지폐가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전장에 사람이 죽고 그와 맞닿은 시장에서 사람이 살아난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살이 살을 무니 뭣이 될 거여. 우리 농사꾼이 밥을 달라했나 옷 달라 했나. 땅 파먹고 죄 안 짓고 선영 모시고 자식 기르며 살아왔는데 대국 놈들이나 쳐들어왔다면 몰라도 이 좋은 땅에 한 물줄기를 타고 태어난 우리 백성들이 서로 잡아죽이고 뜯어죽여야 쓰겠소?

일본 놈들이 쳐들어왔을 때는 그래 미워할 사람이라도 있었지. 조선땅 팔아먹은 매국노 잡아 죽일 때는 그래 명분이라도 있었다. 학살로 노랭이로 빨갱이로 이유도 없이 사그라진 520만 목숨이 무색하게 여전히 갈라선 채로 뚱보의 기분에 맞추어 눈만 흘긴 채 평생을 사팔뜨기로 살아야만 하니 얼마나 애통한가.

누우렇게 익은 보리밭도 있고 아직 파릇한 보리밭도 있다. 그저께 밤에 내린 비로 논에는 물이 넘실거리고 더운 유월바람에 물결이 인다. 꺼멓게 잘 썩은 채마밭에는 둥글배추, 짙푸른 부추, 양파, 유월 뜨거운 햇볕 아래 풍성하기만 하고. 그 풍성한 땅을 두고 짐을 짊어진 농부들은 피란민과 합류하여 목적도 없는 길을 떠난다.

다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목적도 없는 길을 떠날 수도 없을 것 같다. 뚱보가 가진 큰 공 하나 쏘아올리면 우린 모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 땐 지영처럼 주변에 있는 것의 평화를 일일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을 것이다. 어? 전쟁이 일어났네? 하기도 전에 죽어버릴테니까. 그래도 겨를이 있다면 이렇게 적어볼 것이다.

오랫동안 호흡하면서 함께 걷던 나무들이 그대로이다. 하천에 벌거벗은 바위들도 역시 있다. 아스팔트의 더운 열기도 혀를 쑤욱 빼고 흐물흐물 걷는 무거운 가방의 초등학생들도 여전하다. 초저녁이면 가득차던 우리동네 주차장도, 내 아이들이 걷고 뛰던 학교 운동장도 그대로이다. 우리 가게로 오라 손 흔들며 춤추던 현수막들도 켜진 이래 단 한번도 꺼지지 않은 신호등들도 그대로 일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 곳에 우리들만이 없다.

5. 붓 끝에 남은 먹물

이 소설이 우리나라 전쟁의 모습을 가장 잘 그린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사실적인 이념적 표현과 불사의 존재가 된 듯한 홍길동 하기훈, 금방 푹푹 쓰러지던 가화가 컴니스트가 되어 지리산 산골까지 흘러 온 설정들이 지나치다고 평가된다고도 한다. 그리고 전쟁을 마치 투영해보듯 쓴 표현도 혹평 중 하나이다. 문학적 잣대가 그렇다면 감각적 잣대는 어떻게 대면 좋을까. 한편의 긴 전쟁 느와르를 끝내고 이렇게 추욱 슬픔에 젖어있는 이 대단한 작품을 놓고 나도 작가처럼 엉엉 울어버렸으면 좋겠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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