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서 책을 서너권 샀다. 단골서점에 미리 주문해 둔 책이다. 오늘 한권은 읽으리라 다짐하며 들고 돌아왔다. 비좁은 책장에 이리저리 꽂아보려고 둘러보는데 문득 낯익은 책 한권이 누운채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섰다. 그렇다. 오늘 사온 책 중 한 권이 새 책의 늠름을 잊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아, 이미 갖고 있었구나.무엇을 위하여 사서 모으는지 모른 채 책을 살 때가 있다. 물론 취미이자 특기이지 직업적 도구가 독서인지라 대체로 읽었지만 배송비 때문에, 언젠가 읽을까봐, 누가 추천했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아직 안 읽고 사둔 책이 너무나 많다. 애서를 자처하면서도 나는 아득한 무능과 허영에 발목 잡혀 있다. 가진 책도 다 알지 못하면서. 스즈키의 장인 도이치도 그랬을런지 몰라. 다 안다는 교만. 그랬을 거란 확신. 어디서 봤다는 자만. 그러면서도 솟아나는 의심.주변에서 많이 언급하기에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중반부까지 대체 이 소설이 어디가 좋다는 거냐 싶었다. 특유의 유머도 있고 갑자기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건도 있고 하여 조금씩 정을 주면서 읽었는데 뒤로 가니 점점 매력이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명문장. 괴테라고 써있긴 하지만 석연치 않았던 괴테 전문가 도이치는 이 문장의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 괴테의 모든 책을 곱씹고 뒤적이지만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한다. 딸과는 서먹하고 동료는 근거 조작 사건에 휘말리는 등 여러 일을 겪으면서도 “Love does not confuse everithing, but mixes." 의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마침내 어떤 깨달음에 맞딱뜨리는 내용이다. 도이치는 티백에 적혀있던 그 말이 <서동시집>에 있을 거라 확언했고 오래 전 독일 유학 시절을 떠올린다. 친구 요한이 했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가 떠오르기도 했고. 괴테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독일 사람들이라 정말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믿는 걸까, 아님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처럼 쓰인 걸까? 아니면 예수님 가라사대처럼 진실로 괴테발 아포리즘이 넘쳐서 그런 건가?예전에 내가 한 말을 누군가 자기가 한 말처럼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콕 찝어 그거 내가 한 말이잖아, 했다. 그는 멋쩍어하며 그런가?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거 되게 쪼잔한 발언이다. 쉬이 휘발되는 말인데 저작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의 말에 섞어 비슷하게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면 역사 시대 이후 누군가 명언을 말했다하더라도 그것이 바닥부터 홀로 생각해 낸 말일리 없다. 그러니 출처를 꼭 알 필요도, 굳이 궁금해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명명’하고 자주 옭아맨다. 과연 해 아래 새 것이라는 게 있을까?소설은 근원 찾기에 몰두하는 것이 그다지 불필요한데도 그것에 꽂히면 탐구라는 이름하에 자기를 볶는 저명한 학자를 보여준다. 온전한 출처를 찾느라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수행 못하는 도이치의 모습에서 나 역시 그런 밤이 있었음을 떠올린다.이 소설은 작가 스즈키 유이의 실제 장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대서 더 흥미로웠다. 나는 저 사실을 책의 말미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딸이 남친을 데려왔는데 그게 스즈키였다고 말하는 순간, 가만 있어봐 작가 이름이 스즈키잖아 했다 ㅎㅎ 순식간에 재미가 배가 되었다.아포리즘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았던 부분은 잼과 샐러드의 비유다. 잼과 샐러드 모두 섞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잼은 본래의 형태를 잃고 스프처럼 변해버리지만 샐러드는 본연의 것을 유지하며 섞여서 조화를 이룬다. 지식도 사랑도 그래야하는 게 아닐까? 본래의 형태를 인정하며 함께할 때 영양가 있는 섭식이 가능할테니까. 그땐 누가 말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삶을 운용하는 재료가 되면 그것으로 가치 있는 거니까.그래서인지 다소 허무한 결말도 나는 좋았다. 출처 미상의 말이 돌고 돌아 누군가가 나름의 해석을 보태 세상으로 흘러나와 기록된 어떤 말이 또 한 명의 사람에게 추억으로 말할 만한 어떤 시간의 주름이 됐다면 그것으로 족한 게 아닌가 했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런 정언이 될 것 같다. 소문대로 좋았다. 이달 말에 있을 독서모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