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함의 경계는 어디일까? 움베르트 에코는 [추의 역사]에서 ‘대상을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적인 시선’이라고 썼다.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주관적인 평가가 미추의 기준이 된다‘고 썼다. 이 책은 ’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모두가 못생겼다고 말하는 엄마가 40년 만에 백골 사체가 되어서 돌아왔다. 주인공은 엄마의 정체와 죽음을 파헤치며 경악에 가까울 진실을 마주한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진짜 ‘추‘인지 알 수 없다. 어디부터 추한 것인지 길을 잃었다.추함은 실재하는 게 아니라 출발하는 것이다. 추함은 물리적인 게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다. 추함은 가시적인게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다. 추함은 아는 게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다. 추함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함부로 매기는 평가이다.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아서, 자식 주제에 아버지의 치부를 보고 말아서,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해버려서, 그래서 사람을 불편하게 해서, 시다 주제에 뭘 도와주려고 해서 추해진 것이다. 그래서 죽여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얼굴이 추한가?추가 악이라면 이런 건 어떨까?인생에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 보려하지 않고 언짢아 버리게 하는 것, 아무도 보지못할 거라며 죽여서 내던져버리는 것. 날 위한 일인 줄 알면서 창피해서 눈감아 버리는 것, 진실을 알면서 돈 앞에서는 뭐든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추함의 끝판왕이다. 두렵게 읽었다. 눈 감은 채 봐 버렸던 멸시와 강력한 모멸감에게 평생을 사로잡힌 추악함이, 그것을 마주하는 자의 장탄식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고야만 얼굴에서 나는 적어도 미추의 경계로는 아무런 것도 찾지 못했다. 그 허망함이, 그 평범이, 고개를 갸웃거릴만큼의 그 얼굴이 몹시도 참담할만치 아무렇지 않아서 내내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