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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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고해서 구간이 되기 전에 읽어보기로 했다. [친밀한 이방인]때도 그랬지만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여자로서의 삶을 생각해보게 됐다. 하지만 전작보다 훨씬 생각이 많아졌다. 늙음이라는 것, 기억을 잃거나 분해되는 과정, 수분이 빠져나가고 주름과 거뭇함으로 새겨지는 세월을 인정하는 일...
이마치가 더듬어 오르내리는 수많은 계단을 통해 ‘내려놓음’에 대해 생각했다. 책을 덮는 동안에도 울고 있었던 것은 마주보고 싶은 내 인생의 어떤 층수가 있는 걸까, 잃어버린 무엇이 나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서였나.

주인공 이마치는 은퇴한 배우로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 VR치료를 받고 있다. 현실에서는 완치가 불가하지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가상현실을 경험하면서 부서진 기억의 조각을 맞춰간다는 치료 방식. 눈 앞에서 구슬 흔들며 빠져드는 최면 치료에 VR 방탈출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까. 한장 한장 흥미롭다.

60층 아파트에 사는 이마치는 엘베가 고장나서 걸어올라가기 시작한다. 고령의 나이로 올라가기 너무 힘들었지만 한칸한칸 걸어올라갔다. 옥상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따라 한칸 더 올라갔다가 43세의 자기 자신과 마주치게 됐다. 이마치는 그것이 자기인 줄 알고 깜짝 놀라고 이 아파트의 비밀을 알게 된다. 47 층에는 47 살의 이마치가, 15 층에는 15 세의 이마치가 살고 있다는 걸. 그러면서 이마치는 천천히 잃어버린 자기와 조우하게 된다. 꽤 많이 지워진 기억도.

"당신이 원한다고 언제까지나 이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요. 생명의 다음엔 끝이죠.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에요. 알츠하이머는 그 전에 당신을 놓아주라는 신호예요. 그냥 놔 버려요. 당신이 가진 모든 기억 당신의 인생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 별 대단치 않은 실패들, 성공들, 전부 다요." p.228

늙어도 기억을 절대로 잃고 싶지 않다, 끝까지 나로 살고 싶다, 잊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더라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고통스러운 과거, 너무도 젊었던 세상. 잊을 건 잊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남은 지금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허겁지겁 밀어닥치는 과거의 기억을 꼭 모두 알아야만 하는건가?

[3월의 마치]는 한사람의 일대기를 말하지만 그 계단 어딘가에 내가 서 있었기에 특별히 공감이 갔다. 이마치처럼 오래 산 것도, 그정도로 극단의 불우와 부유를 경험한 것도 아니었지만 순간 순간 밀어닥친 감정의 고파들이 자주 와닿았다.

인생의 굴곡진 터널에서 눈물나게 힘들 때면 어디부터 잘못인가 생각한다. 아 그때로 가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도는 수없이 되뇌이고 실제로 그 시절이 그리워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그래서 내가 어느날, 생애 어떤 기억을 되짚고 싶어서 VR체험을 할 수 있을까? 진실은 비싸고 마주친들 그때의 나를 구원하지 못할텐데.
그때의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나뿐이다. 그 시절을 기억못해 진실을 묻은 채 살고 있다해도 지금의 나를 구원하는 마음으로 잊을 건 잊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면 어떨까?

알츠하이머는 비극이다. 기억만 잃는 게 아니라 홀로 할 수 있도록 학습된 모든 것까지 잃고 가족들에게 짐이 될수 있으니까. 그래서 죽는 날까지 알츠하이머를 앓고 싶지 않다. 앓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다만 바라는 것은 늙음과 죽음 앞에서 너무 이전의 것을 붙잡느라 나의 구원을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지 말기를. 과거의 영화 혹은 고난때문에 현재의 나를 멸시하거나 도래할 미래를 불안해 하며 괜한 우울에 머물지 않기를. 생의 끝까지 사랑하며 살길. 그게 나든, 남이든 간에. 독서는 간혹 기도가 된다.

소설이 가보지 못한 세계를 추체험하게 만드는 가성비 좋은 시스템이라면 이번 소설도 성공이다. 그리하여 나의 삼월에, 또다시 찾아온 봄에 더 이상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행복 하기로 한다. 지나간 후회는 기꺼이 망각의 숲에 던져버리고 지금의 나를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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