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사느라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말은 비단 윤옥을 괴롭히는 빌런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착한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부지불식간에 부끄러움의 복판으로 내동댕이처진다. 사느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여기, 정윤옥보다 더 큰 죄책감으로 또 다른 삶을 짊어진 윤옥의 엄마가 있다. 나는 정윤옥에게도 그랬지만 그 엄마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없다지만 누가 그 엄마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남편은 가산을 탕진한 채 죽었고, 혼자 기대 앉지도 못하는 뇌병변 아이를 포함해 자식 둘을 건사해야하는 여성가장이 윤옥의 엄마였다. 한 집안의 재난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사회가 모른 체한 양육과 교육의 문제는 형벌에 가깝다. 하지만 그 엄마는 아이를 찾아냈고 더 큰 참변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바쳤다. 가슴이 아팠다.
소설은 육십이 된 정윤옥이 차가운 도로에서 오래 방치 돼 1년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다가 세상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왜 정윤옥의 죽음까지 다루었을까? 무사히 퇴직하고, 상현과 나이들고, 새로운 가족을 안아보도록 그리지 않았을까?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독자에게 이미 그녀의 부고를 알리고 거꾸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생각도 났는데 구조는 비슷하지만 이 책은 영 웃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아마도 그것이 현실과 비슷해서일 것이다. 더 나아지는 쪽으로 가길 원하지만 그새 어긋나버리고 마는 인생과 비슷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을 보았다. 기어이 승리하고야 마는 정의를 꿈꾸었다. 정윤옥은 홀로 싸우다가 갔지만 따뜻했던 마음이 오래도록 도시 이곳저곳에 머물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들 사이에서는 차갑고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학생 곁에 책상을 두고 오래도록 머물렀던 눈길이 아이들에게는 평생 따뜻함으로 남을 거라고 믿었다. 처음 마음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본 적도 없는 정윤옥에 대한 그리움이 내내 남았다.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세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사람을 살리는 세상이어야 한다. 시절에 따라서, '여의'에 따라서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세계, 개인의 영달을 위해 타인을 죽도록 모른 척하는 세계여서는 안된다. 정훈의 세상은 무너지고 윤옥의 세계가 도래하길. 수연처럼 포기하지 않길, 지호도 숨 쉬는 세상이 오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