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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생애 ㅣ 소설Q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평점 :
특별나게 내 탓도 아닌데 마치 내 탓인 것 같아서 온 생애 전체를 잠식하는 어떤 사건이 있다. 소설에서 곧잘 선보이는 문제적 개인과 더 문제적인 사회의 모습은 멀고도 가까워서 아무리 픽션이라도 안심하긴 어렵다. 언제 어느 때 내게 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대비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련이다. 그래도 소설가가 창조한 세계에 흠뻑 빠져 ‘만일 나라면‘ 은 고민해 볼 수 있잖아. 그러면서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해서 좀 더 나가는 거지. 인식하는 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동안 또 한 권의 사랑스러운 소설 [완벽한 생애]를 만났다.
쇼스타코비치는 체호프를 게걸스럽게 읽었다는데 요즘 나도 한국 소설을 포악하리만큼 열심히 읽는 중이다. (그러면서 내내 나는 절대 소설가는 되기 힘들겠구나 좌절한다. 좌절이라면서 왜 행복한지는 모른 채!)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단연 돋보이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 군(群)에 조해진 작가가 합류하게 된 것은 [환한 숨]이라는 단편집을 읽고나서부터다. 그 전에는 조해진 작가를 잘 몰랐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을 읽었는데도 그랬다;;;) [환한 숨]에 완전히 사로잡혔으면서도 그 무렵 추천받은 [단순한 진심]을 위시에 올려놓고도 다른 책에 빠져 등한시 했다.
그러다가 신작이 나왔고,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초대손님으로 온 조해진 작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이 책을 먼저 읽고 싶다 생각했다. 단숨에 읽었고, 읽고 나서 여운이 남았고, 읽는 내내 너무 좋았다. 읽길 잘했다.
이별이라는 것은 생의 한 부분을 찢어내는 일이다. 어떤 이별은 다른 것으로 찢어진 부분이 꿰매지는 반면, 어떤 것은 계속 덧나고 곪는다. 불현듯 마주치는 슬픔의 감각 앞에서 인간은 저도 모르게 자기 탓을 하며 비관한다. 남 탓보다야 겸손해 보이지만 결코 미덕이 아니다. 왜 혼자만 아파야 해, 왜!!
짜내고 약을 바르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이 지독한 환부로 신음하는 세 사람이 있다. 주인공은 셋이지만 나는 다섯을 보았다. 누가봐도 주인공인 윤주, 미정, 시징과 함께 주변인물인 보경언니와 선우도 완벽한 이별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조해진 소설의 등장인물은 죄다 너무 안타깝다. 경중과 상관 없이 모두가 안쓰럽다.
단 한번의 모의재판으로 법조인의 길을 포기해 버린 미정은 단지 법에 대항하여 무력했기 때문에 그 길을 놓아버린 것이 아니다. 사유하지 않은 죄에 대해 변호하기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가 걸림돌. 혹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비약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가슴 아프게 이해가 됐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는 거다.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신념 없는 활동가로 사는 게 나쁜 거냐‘ 는 물음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신념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고 없으면 인간 말종 취급을 한다. 외려 잘못된 신념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근본적으로 악한 일임을 겪었으면서. 신념이 없어도 함께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박수칠 일 아닌가?
아무튼 난 미정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 결국엔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끝내 사랑으로 이루어진 거라 너무 좋았다. 보경언니를 힘들어 하는 그 마음까지도 정말 이해가 됐다.
미정이 좋았지만 감정 이입은 오롯이 윤주에게였다. 이유는 끝내 놓아버리지 못한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 윤주의 모습에서 왠지 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피디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되지 못했고, 차선으로 선택한 것은 비난을 샀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놀림받았을 때 과감히 버리고 떠나버린 그 용기도 멋졌다. 그리고 6년만에 완전한 이별을 경험하는 과정도 좋았다. 역시 가장 강력한 이별은 강제로 포기하게 되는 어떤 순간의 목격이다. 자꾸만 끈이 풀리는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 하는 것을 함께 경험한 선우가 혼자 슬리퍼로 갈아신고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본 윤주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놓아준다. 근사했다.
시징은 3개월의 뜨거운 사랑만 남기고 떠나버린 은철을 찾아 서울 영등포로 온다. 윤주가 제주도로 떠나면서 한달가량 방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윤주의 방에 머물면서 홀로 지독한 이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생명이 다해버린 사랑에 대한 애도는 끝까지 공허해 보는 것이 아닐까. 은철에 대한 시징의 사랑이 세 가지의 은유로 빚어지는 것에서 아름다운 미술품을 보았을 때의 환희같은 걸 느꼈다. 소설가는 마법같이 빛나는 회화 한 점을 내게 선물했다. 근사하게 맞아 떨어지는 퍼즐 같기도 했다. 이 소설이 그다지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절절하게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나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은 진정 필력인가!! 무지 놀랐다. 멋지다. (이거 말고 쓸 단어가 없어서 섭섭하다 ㅠ)
그리고 끝내 내게 울음을 터트리게 한 것은 보경언니다. 아, 작가님 진짜 나쁘다 ㅠㅠ결국 울렸어~~
주변인물인 보경언니, 선우, 그리고 미정의 아버지까지도 슬프고 슬픈 인물이다. 그러나 끝내 살아내는 그 인생들이 결국 완벽한 생애가 아닌가 싶다.
배경으로 작동하는 역사적 사실들도 궁금하게 했다. 홍콩의 이야기, 우리나라 민주화 이야기,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여러가지 사건들,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부당함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여운이 길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