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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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p.257

현존하는 작가 중에 이 정도의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2011년에 타계한 박완서 작가는 죽지않고 살아서 그 문장이 읽는 이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추억 열차에 탑승하게 하고,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정서로 흠뻑 젖게 한다.

2000년대 박완서 작가가 본인의 산문집에 실었던 수필 660편 중 35편을 추려 책으로 엮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을 읽어보았다.

이미 노령이었던 작가가 세상을 발견한 여러가지 일화는 아직은 젊은 축에 속하는 내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몰랐던 친절을 발견하게 되는 일, 오해로 빚어진 아둔함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해 보통의 무게,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양가감정, 문학과 작가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 나와의 관계, 신과 본인과의 교통 등을 진솔한 문장으로 정직하게 빚어놓은 산문들을 한 번에 보는 일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자기의 피해사실에 목소리를 높일 때 이만하니 나는 좋다며 입을 다물 줄 아는 이에게서 배우는 삶의 철학. 그것이 비단 많이 '알아서' 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박완서의 문장은 세세히도 아름다웠고, 눈부셨다. 독자인 나는 별다른 노고를 취하지 않고도 그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손녀 딸과 함께 엎드려 동화책을 보던 해묵은 시절을 문질러 바라보고 있는 노인 작가의 따뜻한 카디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가 그의 등에 어른거리는 참척의 슬픔에 코끝이 찡했다. 작가가 말한대로 아름다운 것 뒤에는 왜이런 뜻 모를 슬픔이 비추는가.

작가가 가진 정서가 부럽다가도 자식을 잃은 슬픔이 간간이 비칠 때는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것마저 누구나 겪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닌 사람, 그전보다 시린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결코 따뜻함을 잃지 않고 숭고한 인간애를 창작할 수 있는 사람이 박완서 작가였다. 사라졌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못하겠지만 곁에 있는 것으로 이겨내었다고 말해주니 나 역시 사는동안 비견할 슬픔을 만나거든 곁에 있는 것으로 이겨내보자 다짐해 보기도 했다. 엄마 생각도 났고.

우리는 종종 곁에 있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낀다. 그럴 때 부서지고 깨지기 쉬우니 잠시 떠나있는 것도 답이다. 작가는 여행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관계를 읽었다.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을까. 잠시 모른 척 해주는 일, 친절한 친척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이 편한 것처럼.

작가는 또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우연히 잃어버린 여행가방 속 물건들을 함부로 적치한 본인에 대한 혐오가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좀 더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끔 한다. 곁에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
박완서 작가가 좋아하는 단어는 '넉넉하다' 인데 이유가 남다르니 나도 오늘부터는 '넉넉함' 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감사로 살아보겠다 다짐해봤다. 이거 무슨 신앙고백 같네! 그만큼 좋았던 수필들이 가득하다. (실제로 작가는 크리스찬이니 이점 염두하고 글을 읽으시길)
박완서 작가의 책은 다는 아니어도 많이 읽은 편에 속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였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독자 역시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작가는 성공한 거 아닌가?
마흔에 소설가가 되고서야 습작을 시작했다는 이상한(?) 이력의 소유자 박완서 작가. 지금은 물리적으로는 곁에 없지만 내 인생 전반에 있어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 여전히 남아 있는 분! (앞으로도 그럴.)
2021년이 되자마자 만나게 된 그녀의 문장들이 느낌이 좋다. 글 우물에 갇혀 남의 글만 탐독하는 나에게 색다른 자극이 되어준 책.
올해는 안 읽어본 작품과 산문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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