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이퍽10 ㅣ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1
빅토르 펠레빈 지음, 윤현숙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5월
평점 :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분명해졌어.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의 창조자들이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해를 끼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안다는 거야.
그들은 그냥 자기들 형상대로 그녀를 만든 거야.
p.428
세계가 열광한 러시아의 신세대 작가 빅토르 펠레빈의 SF소설 [아이퍽10]을 읽었다.
나는 원래 SF를 좋아하기 때문에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러시아 SF는 처음이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기다렸다. 그리고 받았는데 두둥-
너무 어려웠다!!!!! 히읽!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자 책을 이끌어가는 중심은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다. 그는 아쉽게도 사람이 아니다. 경찰 문학 알고리즘이다. 그는 경찰이니까 범죄를 수사하고 결과물은 소설이다. 그는 소설을 243개나 쓴 대작가이다. (알고리즘이라는 게 함정 ; )그는 돈 많은 미술평론가 마루하 초에게 고용된다. 마루하초는 고환달린 여성이다. 그는 '석고' 라는 미술 분야의 전문가다. 마루하 초는 돈이 많아서 가장 비싼 섹스 가젯인 아이퍽10을 사용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희한했던 것은 기존 내가 읽었던 SF보다 훨씬 자유의지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스스로 업데이트는 물론 미래를 설계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은 뭐 껌씹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또, 다른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그 프로그램에 스스로 삽입될 수도 있다. 너무 놀라운 혁신이 아닐까.
내가 가장 충격받은 것은 섹스봇이었다. 이제 인간 간의 성애가 위험하고 더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전염 가능성이 낮고 폭력성이 낮은 섹스봇과의 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엄마라는 존재도 별로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알고리즘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불편했지만 시류인가? 정말 미래사회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에이즈가 없어질 것이고, 낙태-라는 합리적이긴 하지만 비인간적인 행태- 가 불필요 하게 될 것이고, 강간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미 소설 속에서는 그런 사회가 도래했다) 좋은 점만 보자면 한 없이 좋은 것이 최첨단 시대지만 어딘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성애란 인간과 인간이 하는 것으로 아직도, 여전히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까지 가서 살고 싶지가 않다. 으윽.
작가 빅토르 펠레빈은 인간의 탐욕을 AI 사회에 비춰서 말하고자 했는데 그 재능이 아주 천부적이었다. 신예이면서도 대단히 은유를 즐기며, 적절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신랄한 문장들을 자주 구사할 줄 아는 작가였다. 인간 본성의 고전적 개념에 의거해 알고리즘을 만들었지만 인간도 몰랐던 인격체로 업그레이드 돼 인간을 공격하게 될 거라는 다소 허황돼 보이는 공상과학적 클리셰를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공포로 바꾸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이런 일이 실제로 도래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쇄하다' 라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될 수도 있는 세대, 모든 문장이 네트워크에 걸려있는 시대. 무서워. 개인정보따윈 없겠군)
아직 읽지 못할 독자를 위해서 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잔나라는 캐릭터가 바로 그런 캐릭터였다. 두려웠다. 알고리즘이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 다른 것으로 모습을 바꾸고 접근하는 것은 대단히 혁신적인 이야기자 두려운 스릴러였다. 결국 알고리즘이 인간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호러였다. 그렇지만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것이 소설일뿐이라고 한 번 더 포장해 두었다. 정말 영리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인공지능 시대는 벌써 왔다. 이제 그것이 실체를 띄느냐, 아직도 둥그런 스피커 속에 존재하느냐는 어찌보면 그저 시간싸움일 뿐이다. 그러나 나를 꼭 닮은 , 마치 인격체인양 보이는 로봇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드는 세상을 발전된 세상, 나아갈 미래라고 믿고 싶지가 않다. 모든 문명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데까지만 발전하는 게 제일 좋다. 선을 분명히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권 문제는 이미 대두를 넘어서 고착화되고 있다. 다행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기계의 권리 또한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상 희생되어야만 하냐는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기계의 인권까지 보호해 주어야 하나? 나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따뜻한 SF를 원한다. 나는 아직까지는 따뜻한 감성의 동양적 SF를 사랑하는가보다.
그렇지만 다가오는 현실이라면 직시해야겠지. 아무튼 어려웠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에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작품! (두 번 읽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