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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 - 상처받기 쉬운 당신을 위한, 정여울의 마음 상담소
정여울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자기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요즘 우후죽순 출간되는 에세이들을 접하면서 자기의 내면 이야기라기보단 지식 자랑이나 아리송한 감성 보여주기 식일 때가 많아 실망이 잦았다. 심리학 책도 마찬가지. 융이나 아들러를 직접 다룬 내용이거나 내담자의 상황을 알려주며 이론을 정립하는 의사 에세이도 많이 보았고, 보다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것도 읽어보았다. 물론 좋은 책도 많았다. 하지만 작가 개인의 삶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녹아있었는지 묻는다면 대체로 부정적이다.
정여울의 신간 에세이 [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 가 은행나무에서 출간됐다. 얼마 전에 [헤세]를 읽었고, 오래전에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읽어봤던 터라 익숙하긴 했지만 심리 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읽기 전엔 걱정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래도 담담한 문체, 작가의 깔끔한 필력 등을 믿었기에 주저 없이 도전했다. 그런데 웬일이야! 예쁜 수첩이 따라왔네^^ (굿즈에 쉽게 빠지는 스타일)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있는 그녀가 어릴 때 감정적 학대를 견디며 살아왔다는 것은 팬인 나에게 약간의 충격이었다. 똑똑한 사람도 불행할 수 있다는 , 아니 어쩌면 더 불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한 때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은 차지한다고 부지간에 (그렇지만 상시로)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사랑받고자 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행복하지 않았지만 자기를 증명할 길이 그것 뿐이었다고. 사춘기 접어 들기 전 가장 예민할지도 몰랐던 그 소녀 시절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모멸은 아이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아우울증을 알았던 그녀가 11세에 극단적인 생각을 했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물아홉살이 돼서야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고, 내재된 트라우마와 발현된 스트레스, 가슴 속에 들어찬 울분 등을 마주하게 됐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아는 두가지로 나뉜다. 밖으로 드러나는 자아와 내면의 자아. 밖으로 드러나는 자아는 보통 에고라고 부르는데 정여울 작가는 그 반대 개념을 셀프라고 말한다. 에고는 본래의 자기이자 의식적인 자기다. 사회적이고 계산적이며 비교를 즐긴다. 그러나 셀프는 문명화된 자기로 내면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셀프가 성숙해야 상처가 적다. 셀프는 충족되지 않았는데 에고만 가득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고, 페르소나가 연기만 하면서 살아야 한다.
정여울 작가는 성장이라는 개념은 지양하고 내면화라고 부르길 원한다. 성장은 도태를 수반하지만 개성화는 보다 나은 개념이라는 것. '나'를 찾는 노력은 현대인이 늘상 하는 것 중에 하나아닌가.
이 책이 좋은 것은 챕터마다 설명이 쉽고, 사회적 이슈와 더불어 작가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도 담백하게 즐길 수 있는데다가 독자도 책에 참여시킨다는 점이다. 독자에게 공간을 마련해주고 '이제 너의 이야기를 써봐.' 라고 말한다.
꼼꼼하고 세밀하게 위로한다.
정여울은 작가답게 언어로 비교하고,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거론하는 모든 작품들이 흥미롭고 적절했다. 읽어본 작품들은 더 와닿았고, 읽지 못한 작품들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인물에 대한 탐구를 참 많이 했구나 싶었고, 작품 속 캐릭터를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이기려면 내적자원을 가져야 한다. 그래도 한때 행복했던 기억들은 나를 죽지않고 여기까지 나오게 해줬다. 그러니 내면아이를 만날 때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없다면 새로이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정여울 작가는 그 내적자원이 책이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무엇일까? 지나온 날은 후회되기 마련이다. 그 때 좀 잘할 걸, 그 때 이렇게 했어야 해. (그 때 땅을 샀어야지!ㅎㅎ)
하지만 지나온 모든 날들을 견뎌낸 자는 어려운 상징계에 들어와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다. 때론 어른도 상처받는다. 아무렇지 않게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가슴 속 어딘가에 깊이 상처받은 채 외면된 내면 아이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마침내 괜찮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에세이를 반드시 읽어보길 추천한다. 내면아이를 성인자아가 입양하지 못하면, 성인이 계속 상상계에만 빠져있다면 온갖 중독과 공포를 경험하면서 당당하게 외출하기가 어려워진다. 사회로의 진출이 막힌다.
나는 이 책이 굉장히 책임감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읽고,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는 값진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좋았다.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