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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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래티샤 콜롱바니임미경 옮김밝은세상

[세갈래 길]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래티샤 콜롱바니의 신작 [여자들의 집]을 읽었다. 뜻모를 슬픔이 차올라서 그저 읽어내려갔다.

전국적으로 밀어닥친 끝없는 주택난의 가장 비참한 희생자들이

바로 여자들이었다.

그들이 빈곤의 제일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었다.

p.183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집을 잃은 여성들의 쉼터인 '여성 궁전' 에서 일어난 내용을 담았다. 집을 잃었다는 개념은 단순히 거주지를 잃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을 새삼 깨달으며 너무 슬픈 가운데서도 내가 이렇게 거주의 자유가 포박당하지 않은 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래티샤 콜롱바니는 프랑스에 실제로 존재하는 구호단체 '여성 궁전' 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썼고, 이야기를 전개 하기 위해서 두가지 방법을 차용했다.

하나는 변호사 출신 작가 솔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여성궁전의 설립자인 블랑슈의 이야기를 교차 편성해 두었다. 다만 솔렌은 현재를 살고, 블랑슈는 1920년대에 이미 50대를 넘겼으므로 과거의 사람이다.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작가는 여러가지 재능을 가진 자 답게 영리하게 시간을 100년의 시간 속을 사는 두 인물을 교차편성해 놓음으로 이 소설의 매력을 배가 시켰다.

내가 원하는 일, 그래, 그런 일을 해야 해.

마흔 살이나 되었지만 솔렌은

스스로를 잘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p.82

솔렌은 의뢰인의 투신자살을 목격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병세가 호전돼 퇴원했지만 변호사는 다시 되기 싫고 어릴때부터 좋아하던 글쓰는 일을 해보고 싶어한다. 그런 그에게 글쓰기 봉사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여성 빈민의 보호소인 '여성 궁전' 에서 대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솔렌은 유년시절에 부모에게 좋은 딸이 되고자 공부했을 뿐 세상에 대한 별다른 감흥 없이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차츰 변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평범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흔들리는 경험을 겪으며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그들의 빈곤이 나에게 옮아올까하여 전전긍긍하던 솔렌, 그래도 거지에게 적선은 해야 마음이 편했떤 솔렌이 이제 여성 궁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과 춤을 추고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들의 귀가 되고, 손이 되고 있었다. 궁전이외의 빈곤한 거지에게도 마음을 주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진정한 나눔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가난은 친숙한 무엇이 되어있었다. '취약성' 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빈타, 비비안, 크베타나의 모습으로 구체화 되었다.

p.261

우리는 '빈민 구호!' 라고 생각하면 무엇부터 해야할지 모른다. TV를 틀면 나오는 빈민구호 프로그램을 보면서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고, 막상 도와주려고 해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나마 기부라도 한다면 좀 더 마음이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기부도 안하면서 문제가 터지면 내가 그럴줄 알았다고 빈정거리든지, 기부한다고 다 불쌍한 사람 돕는거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일찍이 어떻게 도울지, 누구를 도울지 알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빈민 구호에 힘쓴 사람이 있다. 바로 블랑슈! 그리고 든든한 조력자 알뱅, 그녀의 남편이다.

블랑슈의 헌신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것이었다.

그 헌신에 회의나 망설임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빈곤과 고통에 맞서 수행하는 전투에서

일신의 궁핍과 주위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p.51

가톨릭이 주를 이루던 1920년대 유럽사회에서 구세군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던 여자 블랑슈는 우연히 거리의 부랑자 산모를 마주쳤다. 그녀는 아기를 낳았지만 갈 곳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아기도 마찬가지. 블랑슈는 가진 돈 모두를 털어 숙박시설을 빌려 그 여자를 쉬게 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도움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프랑스에 크지만 비어있는 주거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여준 약속의 땅 같은 건물이었다. 블랑슈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곳을 여성부랑자를 위한 공간으로 삼기로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본 기사가 있다. 제주에 사는 한 아기엄마가 낳은지 삼일 된 아기를 중고판매 어플에다가 20만원에 판다고 올린 것이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고, 엄마는 연행되었다. 손가락질하고 욕을 했지만 오죽하면 여북하랴는 말이 떠올랐다. 가난은 인간성을 아주 쉽게 증발시켜버린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마련돼야 한다. 주거가 흔들리면 삶의 모든 것이 흔들려 사회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블랑슈는 알았다. 그래서 모금을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점점 병으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 '여성 궁전' 이 바로 그 블랑슈의 헌신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블랑슈는 이제 큰 과업을 달성하고 떠났다. 그 자리에는 필요한 여성들이 둥지를 틀 수 있게 되었다. 2020년을 살면서 부랑자는 여전히 있지만 그래도 100여년전에 한 여성이 했던 헌신이 수백명의 여성들을 쉴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성 궁전에 살고 있는 여성들은 비단 가난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배우지 못해서도 오고, 남편으로부터의 학대를 피해서도 왔다. 솔렌이 가장 먼저 마음을 열게 된 빈타는 아프리카 사람으로 딸만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 아직도 자행되는 여아 할례를 딸에게 되물려줄 수 없어서였다. (리뷰를 적는데도 너무 슬퍼 눈물이 났다.) 지구상에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니. 전족도, 순장도 인권유린이라며 폐지된 문화인데 왜 아직도 이런 구습과 악습이 자행되는가. 겨우 네살짜리 어린 딸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종교이고 관습이라는 역겨운 이름으로 행해지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빈타는 도망와서 이 곳에 있지만 두고 온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던 빈타는 솔렌에게 편지를 부탁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서 최신식 노트북을 떡하니 들고 갔던 솔렌은 무너진다. 그녀는 울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솔렌의 아들에게 여덟장이라는 긴 편지를 수기로 작성해서 가지고 간다.

나는 아마 솔렌 같은 사람일 것이다. 도울줄은 안다. 어지간한 도덕심과 공명심도 있다. 하지만 헌신을 결정함에 있어 대단히 밍기적거리는 편이다. 자꾸만 합리화하고 귀찮아한다. 빈자를 볼 때 솔렌과 블랑슈가 얼마나 다른지 본문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대조의 기법이 너무 흥미로웠고, 콜롱바니가 정말 필력과 구성력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개인적으로 [세갈래길] 보다 더더 좋았다)

여러분은어떤 생각을 가지고 빈민을 대하는가.

100년전 블랑슈의 행동과 100년 후 솔렌의 생각은 별반 다르지않다. 그러나 블랑슈는 행동했고, 솔렌은 행동하지 않았다. 블랑슈는 저 말 뒤에 좌절하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그 주거단지를 발견하고 머릿속에 재빨리 여성 빈민이 살 곳을 그린다. 그리고 실천한다. 그러나 솔렌은 자기의 책임을 공동체의 책임으로 환원해버린채 등을 돌린다. 고작 몇 푼 던져 준 것은 자기의 마음이 편하길 위해서일 뿐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나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말은 아직 읽지 못한 독자를 위해서 남겨둔다.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였던 여자 블랑슈, 처음에는 미온했지만 결국 적극적으로 헌신을 가담하게 된 솔렌. 어느쪽이어도 좋으니 우리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세월을 뛰어넘는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작품, 정말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작품 [여자들의 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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