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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가스라이팅:
영화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로,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그의 정신을 황폐화하는 일종의 학대행위.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831/pimg_7540751262656371.jpg)
사막의 숨막히는 열기와 닮은 소설 [탄제린]을 읽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특이하다. 주인공은 영국인인데 배경은 모로코의 사막 도시 탕헤르고, 심지어 1956년이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은 유럽사람이어도 단정해 보이지 않은 그런 시대말이다. 배경이 탕헤르기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그 강렬한 햇살과 건조한 공기 아래 패대기 쳐질 수밖에 없는데, 더욱 숨이 막히는 것은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이 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턱끝까지 엄습해온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숨막힘이다. 묘한 긴장이 나를 감싸며 대체 누가 거짓을 말하는거야, 누가 강박을 앓는거야, 누굴 믿어야 하는거야 여기저기 의심을 하다가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달았다. 아, 이거 가스라이팅 소설이네!!
가스라이팅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단어가 있는지 조차 무지했지만 경험 한적 있는 터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완벽하게 이해가 됐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 앨리스의 정신세계가 왜 피폐해 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너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은 앨리스와 루시. 루시는 탕헤르에 도착해 앨리스를 찾아간다. 앨리스는 대학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자 남편을 따라 모로코의 도시 탕헤르로 이주해 와 살고 있다. 앨리스는 좀 내성적인데 남편도 다정하지 않아서 탕헤르에서는 밖에 잘 나가지 않고 산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학 동창 루시가 찾아온다. 오래 전에 헤어진 동창이 이역만리까지 찾아왔는데 반기기는커녕 어딘가 불편하다. 앨리스의 남편이라는 존은 더 가관이다. 뭔가 무례하고, 앨리스를 한심해하며, 친구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상당히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존과 루시가 행여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을까 우려한 것과는 달리 너무 적대시해서 긴장되기도 했다. 다소 연약하고 작은 체구의 앨리스가 그야말로 센캐들 사이에서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에는 두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정신병자로 몰리거나 살인자로 몰리는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서 다 말해줄 수 없으니 아쉽다. 다만 작가가 상당히 젊은데도 배경이 200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였다는 것과 시대적 배경이 모로코 내부의 분쟁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좁게는 루시와 앨리스의 이야기가 넓게는 도시 내부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상충이 되면서 상당히 긴장감있게 전개되는 것이 너무 짜임새 있게 다가왔다. 작가 크리스틴 맹건이 고딕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이스캐럴 오츠라는 작가가 히치콕의 작품을 떠올렸는데 상당부분 동의한다. 문장력도 좋은 것 같았다. 등장인물이 맞닥뜨린 공포가 글로 독자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이다. 번역가의 능력일지도 몰랐다. 암튼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아프리카 북부의 어느 도시 탕헤르의 골목에서 내가 헤메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나도 앨리스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껴안고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더이상 올라오지 못하는 구렁으로 밀어 넣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앨리스가 부모의 죽음과 남자친구 폴의 죽음을 겪고 얻은 공포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벗어날 수 있었다면 루시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읽었던 희대의 악녀들 가운데 루시를 하나 더 포함하기로 했다. 손가락 안에 꼽힌다. 특별히 얼마 전에 읽었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둑신부] 속 지니아가 떠올랐는데, 지니아는 남자들을 꾀여내서 증오하는 여자의 삶을 파괴했다면 [탄제린] 속 루시는 남자를 죽여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집착한다는 것이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교묘하게 심리를 파고들어 당사자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것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결말은 내가 예측한 것이 아니었다. 추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낭자한 피와 상식과 다르게 뒤틀리는 관절 등의 괴기함은 없지만 자꾸만 소슬거리고 돋아나는 긴장과 공포를 맛보고 싶은 분이라면 선택하셔도 좋겠다. 끝여름의 무더위에서 오싹한 사막의 해질녘을 만날 수 있을테니.
조지클루니가 제작하고 스칼릿 조한슨이 주연해 영화화 된다고 하니 기대된다. 영화가 나오면 꼭 봐야겠다!! 다음 작품도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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