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 최신 언어로 읽기 쉽게 번역한 뉴에디트 완역판, 책 읽어드립니다
혜경궁 홍씨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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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살 어린나이에 세자빈이 되어 세월의 모진풍파 이기고 글로써 300년을 넘게 살고 계시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읽게 되었다. 많은 역사적 사료가 있지만 어쩌면 개인적이지만 일기 중 가장 가슴을 저며서 쓴 슬픈 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의 기억은 때론 왜곡될 수도 있어서 모두 사실일까 싶지만 이런 참담한 일들은 쉬이 잊혀지는 법이 아니어서 그녀의 글이 놀랍고 가슴아프고 고맙기도 하고 그랬다.

 

혜경궁 홍씨의 집은 판정승 집안도 아니었고, 아버지는 심지어 딸이 궁으로 시집을 가고 나서야 과거에 합격한다. 그러나 자식사랑이 남다르고 검소하며 예의법도가 올바른 집안이서 그 아버지가 영조를 도와 나랏일을 돌본 것은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었을 것 같다. 필자가 쓴 바에 의하면 그러하다. 본인의 아버지여서 좋은 말만 하였을까 하지만 그간의 행동함이나 말함에 있어서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혜경궁이 10살에 세자빈이 되어 관찰한 바는 이러하다. 시아버지 영조는 며느리인 혜경궁을 몹시 아꼈다. 혜경궁의 오빠나 누이들에게도 관심을 써주었고, 그 아버지는 관직에 오래두었다. (줬다가 뺐었다가 많이 했는데 아마 정치적으로 필요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아들 며느리가 아기를 낳는데 시아버지도 계속해서 애를 낳았다. 손자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쳤던 것 같고 유독 아들보다는 딸에게 사랑이 지극했다는 게 좀 신기하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워했는데 한마디로 자기 마음에 안들어서 미웠던 것이다. 일단 경모궁 (사도세자)은 대답이 빠릿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서슬 아래서 말도 더듬었다. 그러니 성질머리도 불같고 급한 영조에게는 못마땅한 장남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딸을 싸고 돌았는데 딸이라고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어서 또 신기했다. 그냥 기준도 없고 자기 맘대로야!

그리고 진짜 충격이었던 것은 밖에서 나쁜 일을 옷에 묻히고 와서 자기 아들을 굳이 불러내서 그 화를 양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딸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이다. 무슨 소린고 하니 미신적인건데 그 때 영조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한 방에 같이 두지도 않았고, 죄인을 심문하거나 좀 안 좋은 바깥일을 보고 들어올때는 밖에서 겉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는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액운은 밖에 털어버리는 자기만의 의식을 한건데, 경모궁이 미워서 일부러 불러내서 "밥은 먹었느냐?" 물어보고는 그 액운을 거기에 털고 자기가 사랑하는 딸을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세자가 옷을 못 입는 병에 걸리는데 한가지 옷을 입으려면 같은 옷 수십가지를 태우고 죽는다. 아마 자기 옷에 아버지가 버린 귀신이 붙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비정한 행동이 아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이 사실을 경모궁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마는 아버지에대한 지극한 효심때문에 부르면 부르는대로 나갔다는 말이 너무 비통했다. 지금으로따지면 아동 학대다. 와 , 정서적으로 저렇게 학대를 하고는 대신들 앞에서 망신주기, 모함하기 등 정말 남의 자식한테도 안할 법한 온갖 악독한 일을 모두 경모궁에게 자행했다. 지르지도 않은 불을 질렀다고 하고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다하고. 그런데도 한 번 "아부지 저 안그랬거든요?" 하지 않고 묵묵히 엎드려 있었다. 그건 효도가 아닌것이여 ㅠㅠ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면 리뷰가 끝나질 않는다.

진짜 아버지가 자식을 조금만 예뻐해줬더라면 그래서 사도세자가 무슨 '조' 가 되셔서 치세토록 성군이 되셨으면 그리고 정조가 이어받아 순조도 힘있는 왕이 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아. 정말 너무 속상하네 진짜.
신하들과의 관계도 문제가 되었다. 영조는 아들 허물만 들추지 말고 자기도 잘하지 , 어린 후궁을 두어 또 자식을 낳고 그 오라비를 높은 자리에 앉히니 위세가 하늘을 찔러 세자를 더 욕되게 했다. 그래서 세자는 포악해지고 급기야 궁인들을 죽여서 화를 풀었다. 윽 너무 무서웠다. 멀쩡한 남자가 광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세자가 아니라면 그냥 고등학생 정도의 청소년 아닌가.

하지만 비운하면 또 혜경궁이다. 시집한 번 잘 못와서 마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윗전 눈치보랴 남편은 바둑판을 던져 눈알이 뽑히기 직전까지 만들질 않나. 나중에는 친정집이 모두 역적으로 몰리고 동생도 처형당하고 ㅠㅠ 너무너무 서러운 삶이다. 나는 이렇게 못 살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뒤주에 갇혀 사도세자가 죽었다. 의외로 그 부분은 아주 상세히 전달이 안되고 있는데 영조가 아들을 죽일 심산으로 며느리와 세손(정조)을 사가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종 직전에는 돌아왔던 것 같다. 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을 임오화변이라고 말하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묘사된 대로라면 더 빨리 처형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궁인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후궁이기는 하지만 자기 아이를 낳은 아내까지 죽였으니 말이다. 약을 먹이든지 감옥에 가두던지 했어야 더 많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로 인해 미치기는 했지만서도 왕자라는 이유로 그렇게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처벌 받지 않았던 것은 절대왕정의 심각한 문제이다.

혜경궁홍씨는 남편을 그렇게 잃고 자식이 왕이 되고 또 죽고 손자가 왕이 되었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사촌의 강권으로 이 일을 적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쪽에는 순조에게 역적으로 몰린 친정집의 구명을 위해서 글을 적은 것이라고 하여 조금 더 사사로운 감정이 섞였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이기는 하나 완전히 믿기는 어렵다는 말이 맨 뒤 해설에 적혀있다. 어쨌거나 궁중의 비화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인 것 같고 후대 사람으로서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돼서 기쁘다.

후회되는 모든 일엔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 가정된다. 그러나 돌이키지 못해 역사가 존재한다. 이런 역사를 읽고나서는 반드시 내 삶에 적용해 돌이켜보고 동일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게 나의 취지다. 자식이랑 소통하면서 잘 지내야겠다.

혜경궁 홍씨는 아들이 왕이요, 손자도 왕이었는데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해 '궁'이라는 시호에 머물렀다. 그러나 고종 때 현경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오래 살아서 이렇게 좋은 문헌을 남겨주니 고맙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있었을텐데.. 뭐였을까 너무 궁금하다.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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