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윤성희의 소설은 명료하고 몽환적이며 페이소스로 가득 차 있다. 명료하다는 것은 단문의 속도감 있는 문체가 그렇다는 것이고 몽환적이라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 있어서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대부분의 소설에는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연민의 페이소스로 가득하다. 윤성희의 세 번째 소설집 <감기>는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단편 11편이 실려 있다.
소설 속의 현실은 때때로 비현실의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든다. 실재하지 않는 영혼이나 꿈, 환상 같은 것들이 능청스럽게 현실에 개입한다. 현실 또한 모호하게 제시되기 십상이다. 인물들은 대개 일반적인 삶에서 비껴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름과 지명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엄마, 아빠, 아들, 첫째, 둘째 등 서로 간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단어들이 지칭어로 사용될 뿐이다. 때로는 그 관계성마저 모호해진다. 실제 혈연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부자나 자매,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친구 등 관계는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모호함과 익명성 속에서 지하철 2호선, 변산반도, 웨하스 같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어휘들이 불쑥 튀어나와 이야기를 순식간에 현실적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런데 소설 속 현실은 단조롭고 무료한 현실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은 삶의 어두운 진실이다. 윤성희의 소설들이 고단한 삶을 어루만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태도에 기인한 것이지 소설 속 세계가 인물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단함을 넘어 잔인하리만큼 비극적인 인생들로 가득차 있다. 소설 속에는 파산이나 가난, 사고나 죽음 같은 것들이 널려 있다. 삶은 허탈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매년 같은 번호로 사오던 로또 복권이 단 한번 건너 뛴 그 주에 당첨된다든가(구멍), 사고로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가 그 덕에 여유있는 삶을 꾸리게 된다든가(무릎) 하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몸으로 죽은 아들의 유골을 다른 가족과 나누어야 하는 아버지(등 뒤에), 식물인간이 된 친구의 산소호흡기를 떼려다 살인 미수죄로 체포된 남자(부분들), 시어머니의 질책이 두려워 우물에 빠진 닭을 건지려다 그 우물에 빠져 죽은 외할머니(구멍) 등 기막힌 사연들로 가득 찬 인물을 통해 세계의 가혹함을 혹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비극적 인식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시트콤 속 웃음이 빵빵 터지는 상황 속으로 서사를 이끈다. 사업 실패로 집이 넘어가는 바람에 온 가족이 가진 돈을 털어 살 방을 구해야 하는 상황. 간신히 셋방 하나 구할 수 있는 돈이 모아졌을 때, 할아버지는 불쑥 그 돈으로 재혼을 전문으로 하는 결혼정보 회사에 가입비를 내 달라고 한다. 자신이 돈 많은 할머니와 재혼하게 되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주장이다(하다 만 말).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전복된 사고 현장에서 한 여자가 머리에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를 가슴으로 감싸안는다. 생명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아이가 여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누나에요, 형이에요(이어달리기)? 소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유머는 바로 이런 식이다. 비극을 희극으로 역전시키는 의외성이 이 소설집의 일관된 특징이다. 비극적 현실을 유머로 덮어 버리는 능청스러움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비장함보다 오히려 웃음과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기막히고 황망한 사연들을 앞에 두고도 작가는 결코 호들갑 떠는 법이 없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건조한 문장으로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망할 뿐이다. 문장 속에는 이렇다할 수사도 동정적 감정 이입도 드러나지 않는다. 보여주기의 방식을 일관적으로 활용한 단문으로 숨가쁘게 이야기만 좇을 뿐이다. 오로지 상황이 만들어내는 유머와 그 안에 감추어진 비극의 역설을 통해서 감정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소설은 불명확한 현실의 경계로 인해 몽환적이지만 명료하고, 애써 감성에 호소하지 않지만 강렬한 연민과 따뜻한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