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지의 기둥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중세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장편소설 <대지의 기둥>은 장르 소설로 잘 알려진 한 작가의 호기심으로부터 탄생한다. 소설의 작가 켄 폴릿은 유럽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웅장한 성당들을 건축한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오랜 탐색을 시도하지만 끝내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자 소설을 쓰기에 이르렀다고 책의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는 성당 건축에 대한 자신의 모든 건축 지식을 동원해 이를 둘러싼 중세의 다양한 계층 사람들 간의 갈등을 가능할 법하게 그려냄으로써 중세사회를 완벽하게 복원해낸다.
암흑의 시대로도 일컬어지는 중세 유럽사회의 모든 존재 이유와 행위 가치는 신의 영광으로 귀결된다. 인성은 억압되고 예술은 쇠퇴한다. 성직자는 물론이고 영주에서 일개 하찮은 무두장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생활과 관계된 모든 것의 중심에는 신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대성당의 건축은 신에게 가까이 닿기 위한 신앙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켄 폴릿이 원하던 해답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무한한 인내와 탁월한 기술, 지독한 끈기가 필요했을 그 작업이 이루어진 상황을 순전히 종교적 신념으로만 돌리기에 중세 유럽사회의 모습은 그리 협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대지의 기둥>은 '하나님의 사람' 뿐 아니라 속세의 숱한 사람들이 대성당 건축이 이루어지는 지난한 세월을 통해 겪는 사건들을 통해 중세 유럽 사회의 총체를 그려내고 있다.
킹스브리지라는 가상의 중세 마을에 최초로 대성당이 세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각기 다른 사람의 다른 입장과 목적에 의해서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한 성직자와 자신의 건축혼을 불태우고자 하는 한 건축 장인의 뜻이 시기 적절하게 맞물리며 작고 조용했던 마을은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한다. 성직자는 필립이고 건축 장인은 톰이다. 소설은 서두에서 일거리를 찾기 위한 건축가 톰 일가의 여정과 킹스브리지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스스로 수도원장이 되는 필립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이권다툼과 이로 인한 사랑의 상실과 잇따르는 복수심 등 다양한 갈등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숲에서 살아가는 야성적인 여인 엘렌과 그의 아들 잭, 반역에 가담하였던 아버지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백작의 딸 엘리에너와 아들 리처드, 그런 그들을 핍박하는 윌리엄 햄리 일가 등 초반부터 서사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진행된다. 그러나 이 모든 갈등들은 결국 킹스브리지 대성당 건축의 성패를 놓고 크게 양분되기에 이른다.
킹스브리지 대성당 건축은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에 의해 몇 차례 좌절된다. 지위와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내세워 손잡은 윌리엄 햄리와 웨일런 주교가 그들이다. 이들에게 대성당 건축은 신의 영광이나 예술혼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이권에 걸림돌이 되는 위험한 작업일 뿐이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야비한 짓을 저지른다. 이들처럼 킹스브리지 대성당 건축을 방해하는 인물은 소설 속에서 지독한 악한으로 그려진다. 반면 대성당 건축을 위해 혼신을 다해 투신하는 필립, 톰, 조너선, 잭, 엘리에너 등의 인물은 선의 축에 서서 악인들과 대립한다. 이처럼 선악의 뚜렷한 구별로 인해 대성당 건축을 둘러싼 중세사회의 고결한 정신적 가치는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작가는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방대한 서사를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엘렌, 알프레드, 리처드 등 많은 인물들은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위해 선과 악을 초월한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준다. 심지어 필립, 잭, 엘리에너와 같은 선역을 맡은 인물들조차 때로는 세속적이거나 독선적인 행동을 통해 타인을 괴로움에 빠뜨리기도 한다.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한 선악구조를 답습하면서도 인물의 복합성을 간과하지 않는 작가의 디테일은 소설을 한층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다.
대성당 건축을 둘러싼 중세인들의 정신의 기저에는 신의 존재가 언제나 자리잡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보다 톰에서 잭으로 이어지는 건축가의 장인정신 구현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암흑의 시대에 보여주는 인간의 예술 정신은 한층 드높고 치열하게 묘사된다. 톰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쌓아 올린 성당은 신념 없는 건축장이 알프레드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화전을 일구듯 이전의 오류들을 씻어버리고 용서와 이해를 바탕으로 새 기단을 쌓아 올리는 잭과 신뢰로 그를 지지해 주는 필립에 의해 다시 한번 킹스브리지에 영광이 찾아온다. 석공의 순결한 장인 정신과 수도자의 그치지 않는 신념은 마침내 대성당의 완공을 이루어 낸다.
잭이 완공한 고딕 양식의 거대한 중세의 대성당은 솔즈베리 대성당을 실재 모델로 삼고 있다. 존 컨스터블의 그림의 솔즈베리 대성당의 모습은 켄 폴릿이 그려낸 <대지의 기둥> 속 킹스브리지 대성당의 영상을 시각적으로 실현해준다. 소설에서 묘사된 성당의 구조와 건축 기술 등에 있어 사실감이 느껴지는 것은 실존하는 건축물의 영향임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쳐도, 소설 속에 묘사된 중세 유럽 사회의 모습은 언어로 그려낸 완벽한 풍속화이다. 교수형의 집행을 보기 위해 교수대로 몰려 드는 아이들과 시정잡배들에 대한 묘사에서부터 봉건사회의 계층제도, 중세 상업의 구조적 측면까지 세밀하게 서술하며 중세 유럽 사회의 여러 측면을 다각적으로 비춘다. 중세 유럽의 풍물의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서사는 페이지터너로서 책의 진가를 확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