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웅의 AI 강의 2025 - 인공지능의 출현부터 일상으로의 침투까지 우리와 미래를 함께할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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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쓰여진 이 책은 2023년 발행된 '박태웅의 AI 강의'의 개정증보판이다. 저자가 개정증보판을 1년 만에 내게 된 이유는 'AI 분야는 한 달에 몇 년 치 시간이 흐르는 느낌'때문이다.

한 달이 몇 년 치라는 저자의 말이 나는 크게 와 닿는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바둑 경기에 승리하면서 전 세계가 AI에 열광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열광에 대해 '비판적인' 걱정과 관심을 가지고 인공지능에 대해 알아보았다. 여러 AI 관련 책을 읽었고, 밴드에 그 리뷰도 많이 올렸다. 물론, 그래봤자 일반인 상식 수준의 AI 이해도였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버겁다. 내 동체 시력으로는 AI의 변화와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제는 그만 AI를 쫓던 눈을 내리 깔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심지어 AI 강의인 이 책도 그 빠른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책의 작가 서문은 2024년 9월에 쓰였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 전에 쓰여졌다는 얘기일텐데, 중국의 DeepSeek-V3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건 2024년 12월이다. 당연히 딥시크가 불러온 충격과 변화는 담겨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대에 뒤쳐진 책일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AI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장점은 다양성과 포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인간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과 고민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고 균형잡힌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AI의 원칙을 쫓고 있다.

알파고의 출현 이래 AI에 대한 열광이 나는 늘 불편했다. 수 많은 AI 전문가들이 AI의 기술과 능력과 효용과 미래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인간 삶과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민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 많은 인문학자들의 AI가 불러올 인간과 미래의 변화에 대한 전망은 AI 기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환상으로 보였다. 빅테크 기업들의 과다한 선전과 선동이 휩쓸고 있었다.

이른바 'AI 판사'. 사법 개혁에 대해서도, AI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답답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에 대한 염원은 나도 똑같이 갖고 있지만, 최소한 현재의 AI는 그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현대 AI의 원리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다면 내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공 지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AI는 인간이 만든 문물을 학습한 후, 인간의 피드백으로 조정되고 강화된 지능이다. 그래서 AI는 인간의 논리와 지혜 뿐만 아니라 편견과 혐오와 망상까지 가지게 된다. 인공지능은 누가 어떻게 훈련 시키느냐에 따라 히틀러가 될 수도 있고, 스탈린이 될 수도 있고, 간디가 될 수도 있고, 세종대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겠지만.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말은 큰 울림을 갖는다. '우리는 지금 아마도 산업혁명 이래 가장 큰 인류적 사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AI 리터러시가 아주 긴요합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대응책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AI의 기술적 원리와 AI의 효능 뿐만 아니라 그 위험과 그에 대한 규제와 대책까지 다루고 있다.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크로퍼드'의 'AI 지도책'이 AI의 본질에 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고 있는, AI에 관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책은 내용이 어렵거나 원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데 반해, 박태웅의 책은 좀 더 쉽고 현실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AI에 관한 기술적인 원리도 쉽게 다루고 있다.


박태웅의 책 2023년 판은 '알라딘'에서 2024년 인공지능 분야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2025 개정증보판은 2023년 판에 비해 두 배로 두꺼워졌다. '지금 AI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어떤 흐름들이 있는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현한 규제, 위험에 대한 대처, 입법 노력들'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다.

책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히 소개하겠다.

1강.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물결
AI는 다음과 같이 진화하고 있다.
1. 운영 체제로서의 인공 지능 : 모든 소프트웨어가 AI와 연동하게 된다.
2. 맥락 인터페이스 : 정확한 키워드를 입력하지 않아도 인공지능은 맥락을 이해하여 답을 준다.
3. 파트너로서의 인공 지능 :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 일상적인 파트너로서의 기능을 한다.
4. 멀티 모달 : 텍스트 뿐만 아니라 이미지, 음성, 동영상 등 여러 방식의 정보를 처리한다.
5. AI 에이전트 :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도) 한 대의 PC나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는 AI.
6. 인간형 로봇 : 인공 지능이 '몸'을 가짐으로써 텍스트에 제한되지 않는 물리적 세계 모델을 갖게 된다.

2.강. 모두를 놀라게 만든 거대언어모델, LLM의 등장
챗 GPT는 3천 억 개의 토큰과 5조 개의 문서를 학습했다. 이런 인공 지능을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라고 부른다. 챗 GPT는 이런 방대한 데이터로 학습한 후 인간의 피드백을 통한 강화학습을 한다(RLHF).

이는 챗 GPT가 개발, 법률, 언론, 주식 등 잠재된 패턴이 있는 분야에서 위력적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챗 GPT는 예측 모델을 사용하기 때문에 '할루시네이션', 즉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는 챗 GPT의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다. 또한 챗 GPT는 교묘한 요구를 입력하는 프롬프트 인젝션 공격에 취약하다.

3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 질 수 있을까?
고품질의 학습 데이터 사용과 양자화와 지식 증류를 통한 인공 지능 소형화의 흐름이 거세다. PC나 스마트폰 같은 개인용 기기에 탑재되면서 에이전트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4강. 열려버린 파도라의 상자
AI 기술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혜택과 함께 기존 불평등의 심화, 조작 및 허위 정보 유보, 통제력 상실로 인한 인류 멸종 가능성 등 심각한 위험도 가져다 주고 있다.

인간은 AI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 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기술에 대한 감독은 거의 전무하다.

5강.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어떻게 구축할까?
인공지능의 윤리와 관련한 핵심 원칙은 프라이버시, 책임성, 안전과 보안,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공정성과 차별 금지, 인간의 기술 통제, 직업적 책임, 인간 가치 증진이라는 8가지 주제가 꼽힌다.

2020년 로마 교황청은 인공 지능 윤리를 요청하는 성명을 내 놓는다. 유럽연합은 '5년 간의 토론' 끝에 2024년 인공지능법을 발효시킨다. 미국은 2022년 '알고리즘 책무법안'을 발의한다. (이 리뷰를 쓰면서 검색을 해봤는데, 2025년 5월 29일 현재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202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최첨단 인공지능 모델의 안전과 보안에 대한 법안인 SB 1047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다.(검색해보니 이 법안은 주의회를 통과했지만,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선출되지 않은 슈퍼 엘리트들이 거대 인공 지능을 독점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데이터로, 어떻게 학습을 시키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인공 지능의 개발 뿐만 아니라 그 사상까지 독점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국가적 규제와 규범의 확립이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이유다.

6강.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2023년 인공지능 법안을 발의했다. (검색해보니 2024년 12월 국회를 통과했고, 2026년 1월 22일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25쪽에 불과한 법안의 태반은 인공지능 개발 지원에 할당되어 있고 인공 지능의 위험에 대해 다루는 건 적다.

한국 정부의 인공 지능 법안은 '공론화'의 과정이 빠져 있다. 이는 과거 '공인 인증서'처럼 보안을 강화한다면서 보안을 해치는 정책을 떠오르게 한다. 인공 지능 같이 중요한 일을 한 줌도 안되는 IT 분야 슈퍼 엘리트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다. 다양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시민 사회와 이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처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 자료들은 아직도 hwp 아니면 pdf 포맷이다. 이는 표준 포맷이 아니어서 컴퓨터가 처리하지 못한다. 컴퓨터에게는 없는 데이터나 마찬가지다. 또한 정부와 사법부의 데이터 공개는 매우 미흡하다. 한국에서 범용 AI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다.

세계 최고의 후발 추격국이었던 대한민국은 미친 듯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 잡고 엄청난 속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빠뜨리고 건너뛴 것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원천 기술'과 '기초 과학'이다. 원천 기술은 탄탄한 기초 과학에서 나오고, 기초 과학은 아주 긴 호흡으로만 자라난다.

정부의 지원은 유행처럼 주제를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자를 육성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무원들은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법, 전문가들과 함께 집단 지성을 일궈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부가 과학 기술 정책의 호흡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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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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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온 유럽인들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축출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으로 불리는 정착 식민주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은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종결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만 천만 명이 넘었었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침략 전쟁이 끝난 후 겨우 수십 만 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진출하여,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아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을 정착 식민주의라고 부른다. 정착 식민지는 필연적으로 원주민들에 대한 축출과 학살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북아메리카에서 보여진 정착 식민주의는 19세기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알제리 등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20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에 의한 정착 식민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미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신대륙'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시온주의 식민주의자들은 토착민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주인없는 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침략 전쟁은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과 같은 모습으로, 즉 축출과 학살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침략 전쟁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은 팔레스타인 사람 '라시드 할리디'가 지은 책이다. 나는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전부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는 얘기만 들어왔다.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시오니즘은 식민주의고, 시오니스트는 식민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나라는 축출과 학살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있다. 그들의 풍요로운 부와 다채로운 문화는 제 3세계 민중들의 피와 절규를 기반으로 이룬 것들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의 자유롭고 관용적인 민주주의는 그들의 피보다는 우리들, 제 3세계 민중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강에서 바다까지(From the River to the Sea)', 팔레스타인의 본래 영토인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기원하는 이들의 구호라고 한다. 강에서 바다까지 평화와 정의가 복원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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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옮김, 김선형 / 코너스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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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때 데미안을 읽고 이번에, 수 십년 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매우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데미안을 읽은 것은 국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이야기꾼이었던 것 같다. 가끔 소설책 내용을 이야기로 풀어줬는데, 선생님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데미안도 그랬다. 너무 재미있어서 집에 있던 세계 문학 전집에서데미안을 찾아 읽었다. 직접 읽은 데미안은 너무 재미없었다. 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건 카인의 표식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아프락사스'가 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인의 표식도 잊어버렸다. 아프락사스 단어만 머리 속에 남았다.

이번에 읽은 데미안은 달랐다. 재미있었다. 소설의 중반 이후에는 다시 이해하기 어려워졌지만 중반까지는 재미있었다. 내 얘기 같았다. 중학교때라도 이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청춘의 방황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일까?

이번에 읽으면서 나를 가장 사로잡은 부분은 방황하는 싱클레어였다. 밝고 허락된 세계의 평온과 축복에 안주하지 못하고, 어둡고 불온한 세계의 원초적 충동과 갈망을 추구하는 삶. 겉으로는 타락한 삶을 유쾌하고 행복하게 실컷 만끽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속으로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그랬다. 내 20대, 30대가 그랬다. 방탕하고 흐트러지고 파괴적인 삶을 살았다. 순간 순간의 말초적인 즐거움은 누렸어도, 속으로는 늘 외롭고 갈증났고 괴로웠다. 싱클레어처럼 "사랑에 대한 타오르는 열망과 이룰 수 없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보다 더 상처받기 쉽고 수줍음 많은 사람은 없었다." 어쪄면 40대, 50대에도 계속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싱클레어의 방황하고 자학하는 심정은 바로 내 얘기였다.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나는 술집에 앉아 큰소리치며 별나고 짖궂은 방식으로 세상과 싸웠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내 나름의 저항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망가져갔다. 만일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 없다면,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더 좋은 자리, 더 나은 일도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거라곤 망가지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한 손해는 세상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방황과 갈등을 끝내듯이, 나도 매번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방황과 갈등을 끝냈다. 싱클레어처럼 나에게도 소명은 "자신을 찾아가는 일 하나뿐이었다." 나 또한 "경계선이 아니라 그저 다른 종류의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싱클레어와 내가 다른 것은 그 이후다. 싱클레어는 그 이후 에바 부인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데미안을 보고, 에바 부인을 본다. 그리고 그 합일을 통해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제자리였다. 베아트리체를 놓치면 나는 다시 원래의 허무와 혼란과 갈망의 세계로 돌아갔다. 다시 베아트리체를 만날때까지. 에바 부인을 보면 그 문턱에서 나는 주저 앉고 괴로워하다가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싱클레어는 새로운 신을 찾고, 굳건한 신념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나에게 새로운 신은 필요 없다. 신은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존재이다. 싱클레어의 신념은 나에게는 맹목으로 보이고, 싱클레어가 추구하는 초월적인 존재에서 나는 독재자를 느낀다.

왜 이렇게 달라질까? 그건 아마도 내가 표식이 없기 때문일 거다. 나는 카인의 표식을 지닌 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카인의 표식을 지닌 싱클레어와 같은 시선과 같은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불온하고 위험한 느낌을 받았다. 후반부의 싱클레어에게서 절대주의와 파시즘의 맹아(萌芽)를 느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헤르만 헤세를 검색해 보았다. 그는 나치와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였던 모양이다. 내가 책에서 느낀 불안과는 다르게.

책을 한 번 더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냥 관두기로 마음 먹었다. 언제가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내 생각을 갖고 내 삶을 살면 되지, 굳이 헤르만 헤세의 생각과 삶을 쫓을 필요는 없으니까.

최근 '채식주의자', '단순한 열정' 그리고 '데미안'까지 이른바 '순문학' 소설을 연이어서 읽었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 소설들.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문학을 싫어했는지, 그리고 다시 문학에 재미를 느끼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재미를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이 책들에서 내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단면들 또는 내 모습의 일부들. 자신을 찾아가는 일'은 여전히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의 나는 문학이 싫었을 거다. 힘들고 어렵게 간신히 읽은 책에서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럽고, 유치하고, 탐욕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어찌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을까? 부끄럽고 고통스러웠겠지. 당연히 문학을 외면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나는 다르다. 찌질하고 추한 나 자신의 단면을 보거나 일부를 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버틸 수 있는 맷집이 생겼다. 비겁하고 비루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체념을 가질 만큼 오래 살아왔다.

게다가 문학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은 깨진 거울이나 굴절된 조각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과 비슷하다. 파편화된 조각의 내 모습이나 굴절된 조각의 내 모습은 나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쪼개지고 굴절된 내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약간의 어긋남은 나를 몽환적으로 꾸며준다.

그래서 문학은 멋진 신세계다.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머리를 박으면 만나게 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알몸의 나 대신, 문학이라는 패션으로 치장한 자신을 보여 주니까. 문학은 추함을 예술로 포장해주니까. 이렇게 나이 먹어서 나는 이제 문학이라는 패션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좀 더 즐기고 싶다.

자, 이제 '데미안'을 읽은 나의 소회는 일단 여기에서 끝내겠다. 헤르만 헤세는 나의 알을 깨지 못했고, 나는 아프락사스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에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있다. 비록 퇴색되고 금이 갔을 망정.

그러나 괜찮다. 산다는 것은 퇴색되고 금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언제든 '재생'의 가능성이 있다. 재생이 없다 한들 그건 그거대로 괜찮다. 그게 삶이니까. 초월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의 의지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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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2025-11-08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라는 자아의 패션, 멋진 통찰이네요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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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이 책을 소개한 누군가의 '지독한 열정의 추억'이며 '절제된 사랑 이야기'라는 표현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깨달았다. 내가 읽어야 할 이야기라고. 그리고 예감했다. 나는 지독하게 느끼지 않을 거라고. 나는 공감할 거라고. 그리고 내 예감은 맞았다.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칼 같은 글쓰기로 치명적인 열정을 진단한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라는 책 소개 글과는 다르게 나에게는 하나도 치명적이지 않았고, 하나도 지독하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너무 평범하게 느껴졌다.

책은 무척 짧았다. 9쪽에서 시작해서 67쪽에서 끝났다. 책 사이즈는 140*210mm. 연극 보러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좀 읽고, 밤 사이에 계엄령이 터졌다 해제됐다 하는 소식을 들으며 피가 끓고, 다음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고, 집에 와서 마저 읽었다.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근데 집중할 거리도 없었다.

주인공은 유부남을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했던 여자다. 여자의 모든 신경은 남자로 향해있다. 남자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남자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남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느끼고, 남자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간다. 지독하게 빠져 있다. 근데 다들 비슷하지 않나? 사랑할 때에는?

나도 여자랑 비슷하다. 아니 비슷하다고 '착각'한다. 나도 사랑할 때는 그런다. 다만 책의 주인공은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내 경우는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집착일 수도 있고, 탐닉일 수도 있고, 몰입일 수도 있고, 광기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사랑일 수도 있다. 그게 뭐든지 간에 나의 세상도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다.

그녀만이 내 세상의 전부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그녀를 생각하고, 잠이 들때까지 그녀를 그리워하고, 꿈 속에서도 그녀를 찾는다. 그녀가 가까이 있으면 세상이 아름답고, 그녀가 멀어지면 세상은 암흑이 되고, 그녀가 사라지면 세상은 죽음이 된다. 나는 빛을 쫓는 나방이고, 북쪽을 향하는 나침반 바늘이고, 물을 찾는 나무 뿌리고, 적기를 추적하는 레이더다. 나의 모든 신경과 촉수는 그녀 만을 향하고 있다. 그녀가 바로 내 생명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는 착각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할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단한 껍질에 쌓여서 살아간다. 내 집착이든 열정이든 몰입이든 탐닉이든 광기든 호두 껍질 같은 단단한 껍질 안에서 요동친다. 가끔은 그 사랑이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기도 하지만, 끝내 껍질을 부수지는 못한다.

첫사랑 이후로 늘 그랬다. 사랑이 나의 전부고, 나의 삶이고, 나의 구원이지만 그건 오직 마음 뿐이었다. 나의 사랑은 껍질에 갇혀 있었다. 그 정도에 불과하다. 그 껍질이 도덕률인지 관습인지 양심인지 아니면 그냥 고집인지 뭔지 몰라도. 사랑이 전부라는 건 나의 착각이고 나의 바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의 주인공과 다르다. 그러나 주인공의 마음은 너무도 잘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광기가. 그래서 보인다. 성게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주인공의 가시들이. 한 남자를 향해 온 사방으로 뻗어있는 강박과 집착과 몰입과 탐닉의 가시들이. 그 노이로제 같은 가시들이. 내 안에도 그 가시들이 있다. 껍질에 갇혀 있을 뿐. 그래서 주인공에 비하면 내 심장은 차라리 멍게 같다. 뻗어나가지 못한 가시들.

나는 그런 광기에 빠져 있을 때도 내 자신을, 내 감정을, 내 열정을, 내 절망을 분석하려 든다. 내가 볼 때는 주인공도 그런다. '지독한 열정'과 '치명적인 열정'에 쌓여 있으면서도 분석을 한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 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17 쪽)

나는 주인공에 공감하고 주인공을 이해하고 주인공에 몰입한다. 이 책은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익숙하고, 그래서 시시하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주인공은 너무 단단하고 너무 안정적이다. 약간 특이하고, 약간 집착적이고, 약간 강박적일 뿐이다. 실제의 사랑은 훨씬 더했으리라. 실제의 사랑은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갈망하고 열망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랑이었으리라. 자신을 태우는 미친 열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책의 내용은 제목과 다를 바 없었다. '단순한 열정'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66 쪽)

그렇다. 내 사랑 이야기도 그렇다. 사랑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그렇다. 사랑은 결국 증발한다. 사랑했던 사람은 남이 된다. 사랑이 남기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다. 그것이 사랑의 흔적이다.

본문 뒤에는 20여 쪽에 이르는 '해설'이 있다. 아직 읽지 않았다. 언젠가 이 책으로 독서 토론을 하게 될 날이 있을까? 그때는 이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다. 해설도 읽겠다. 그러면 또 다른 무언가가 보일 거다. 내 성급한 리뷰는 그때야 끝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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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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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바싹 긴장해서 읽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살을 베이는 듯한 아픔이 너무 선명하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영혜'의 나레이션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또 시작이구나'


그러나 그런 공포와 불편함은 잠시 잠깐, 곧 편해졌다. 어차피 내가 한강 작가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은유나 상징에 상관없이 글자 그대로 책을 읽어갔다. 그러자 금방 편해졌다. 무심하게 사건의 전개에 집중했고, 그러자 금방 재밌어졌다.

모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영혜가 꿈을 꾸면서 고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내의 광기보다 자신의 일상을 걱정하는 남편도, 딸의 입을 강제로 벌려 고기를 쑤셔 넣는 아버지도, 손목을 긋는 영혜도. 그 예민하고, 위태롭고, 파렴치하고, 폭력적이고, 광적인 삶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 이후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제의 질병을 이용해서 성을 갈취한 파렴치한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언니도, 이유도 없고 논리도 없는 집착과 갈망으로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린 형부도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저마다의 선택, 아니면 저마다의 운명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냥 다채로운 저마다의 삶이었다.

자신의 바램과 욕망과 열정을 묻어두고 살아간 언니의 삶도, 죽어가는 동생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언니의 고통도, 심지어 인간을 탈피하고 죽음을 찾아가는 동생의 광기도 다 자연스러운 각자의 삶으로 느껴졌다. 모든 상황과 모든 선택이 자연스러웠다. 죽음에의 갈망조차 자연스러웠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런 삶이 거기 있었다. 나는 구경꾼이었고, 그 구경은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고 힘들다는 소설이 왜 나는 재미있는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그 정도의 일탈은 이미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하고, 위태롭고, 병적이고, 광적이고, 불안하고, 모순적이고, 기만적이고, 어긋난 삶이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한국 소설들에서, 그리고 또 다른 소설들에서 충분히 접했던 흔들리고 무너지는 삶의 모습들이었다.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익숙하고 반가웠다.

그러다가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언제부터 내가 남들 취향과 나를 비교해가며 고민했지? 그러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남들의 취향이 문제가 아니라 한강이라는 작가가 나에게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내가 당황했던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과 '채식주의자'의 한강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예민하고 섬세한 것은 비슷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달랐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왜 그리 나를 힘들게 했을까?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아픈 역사성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일까? '집단 학살'이라는 역사성의 강박에 짓눌러진 강요된 아픔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역사 의식이 그리 강한 사람도 아니고, 도덕적 공감대가 그리 넓은 사람도 아니다. 한강 자체가 달랐다.

가끔 소설을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나도 모르게 의문을 품는다. ' 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뭐지? 이 작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런 내가 '작가의 의도'를 탐색하려는 시도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과 '작가의 의도', 비슷하게 보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작가가 하려는 말은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나에게 전달하는 말이다. 이야기를 읽고서 내가 받는 느낌, 내가 받는 직관을 말하는 거다. 반면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를 분석하고, 추론을 하는 것이다. 실제 의미가 어떻든 간에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을 궁금해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따지는 것에는 거부감이 든다.

나에게 소설은 논리나 추론이나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느낌과 직관과 감성의 영역이다. 즉자적인 느낌. 그래서 내가 소설을 나누는 첫 번째 기준도 재미있다/재미없다 이다. 이렇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소설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때로는 작가조차도 무시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는 자신의 집필 의도 보다, 작가의 소설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게 나의 뇌피셜이든, 나의 착각이든, 나의 망상이든, 나의 억지든 나는 소설을 그렇게 읽는다. 소설을 통해서 들리는 말이 나에게는 작가의 말이고, 나는 그렇게 소설을 좋아한다.

나는 한강이 '채식주의자'를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 모른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 소설들이 나에게 전해준 느낌이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이 나는 너무 아팠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의 한강은 아프지 않았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광기와 무너지는 삶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강은 차분했다. 나에게는 그랬다.

어쩌면 이 병적이고 광적이고 뒤틀린 삶을 이렇게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것은 한강의 능력일 거다. 이 어긋난 인간들의 무너진 삶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난해한 설명을 덧붙이거나, 과중한 목소리로 무게를 잡았다면 나는 아마 많은 거부감을 느꼈을 거다.

그러나 한강은 이 이야기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담담하게 한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이 삶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고통도, 광기도, 몰락도, 파멸도 삶이라는 것을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가가 나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내가 들을 수 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내 얘기를 듣고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채식주의자가 뭐가 재미있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재밌다. 그래서 추측해 보았다. 채식주의자에서 보이는 내 자신의 모습 때문일 것 같다. 내 전부는 아니지만, 채식주의자의 뒤틀리고 광적인 사람들에게서 내 모습의 한 단면을, 또는 나의 일부를 본다. 그게 왜 재미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교감하고 소통하는 재미일까? 그 극단의 인물들과의 약간의 교감과 소통과 감정이입, 그걸 그냥 재미라고 하자.

'채식주의자'는 나에게 '무난하게 재밌는 소설'이었다. 그 말은 맨부커상의 심사위원들이 이 소설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무엇'을 나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안타까워라.

그러나 뭐 어떠랴?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어지럽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리면 졸린 사람이다. 문학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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