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바싹 긴장해서 읽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살을 베이는 듯한 아픔이 너무 선명하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영혜'의 나레이션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또 시작이구나'


그러나 그런 공포와 불편함은 잠시 잠깐, 곧 편해졌다. 어차피 내가 한강 작가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은유나 상징에 상관없이 글자 그대로 책을 읽어갔다. 그러자 금방 편해졌다. 무심하게 사건의 전개에 집중했고, 그러자 금방 재밌어졌다.

모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영혜가 꿈을 꾸면서 고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내의 광기보다 자신의 일상을 걱정하는 남편도, 딸의 입을 강제로 벌려 고기를 쑤셔 넣는 아버지도, 손목을 긋는 영혜도. 그 예민하고, 위태롭고, 파렴치하고, 폭력적이고, 광적인 삶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 이후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제의 질병을 이용해서 성을 갈취한 파렴치한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언니도, 이유도 없고 논리도 없는 집착과 갈망으로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린 형부도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저마다의 선택, 아니면 저마다의 운명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냥 다채로운 저마다의 삶이었다.

자신의 바램과 욕망과 열정을 묻어두고 살아간 언니의 삶도, 죽어가는 동생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언니의 고통도, 심지어 인간을 탈피하고 죽음을 찾아가는 동생의 광기도 다 자연스러운 각자의 삶으로 느껴졌다. 모든 상황과 모든 선택이 자연스러웠다. 죽음에의 갈망조차 자연스러웠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런 삶이 거기 있었다. 나는 구경꾼이었고, 그 구경은 재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고 힘들다는 소설이 왜 나는 재미있는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그 정도의 일탈은 이미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하고, 위태롭고, 병적이고, 광적이고, 불안하고, 모순적이고, 기만적이고, 어긋난 삶이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한국 소설들에서, 그리고 또 다른 소설들에서 충분히 접했던 흔들리고 무너지는 삶의 모습들이었다.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익숙하고 반가웠다.

그러다가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언제부터 내가 남들 취향과 나를 비교해가며 고민했지? 그러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남들의 취향이 문제가 아니라 한강이라는 작가가 나에게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내가 당황했던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과 '채식주의자'의 한강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예민하고 섬세한 것은 비슷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달랐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왜 그리 나를 힘들게 했을까?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아픈 역사성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일까? '집단 학살'이라는 역사성의 강박에 짓눌러진 강요된 아픔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역사 의식이 그리 강한 사람도 아니고, 도덕적 공감대가 그리 넓은 사람도 아니다. 한강 자체가 달랐다.

가끔 소설을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나도 모르게 의문을 품는다. ' 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뭐지? 이 작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런 내가 '작가의 의도'를 탐색하려는 시도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과 '작가의 의도', 비슷하게 보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작가가 하려는 말은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나에게 전달하는 말이다. 이야기를 읽고서 내가 받는 느낌, 내가 받는 직관을 말하는 거다. 반면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를 분석하고, 추론을 하는 것이다. 실제 의미가 어떻든 간에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을 궁금해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따지는 것에는 거부감이 든다.

나에게 소설은 논리나 추론이나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느낌과 직관과 감성의 영역이다. 즉자적인 느낌. 그래서 내가 소설을 나누는 첫 번째 기준도 재미있다/재미없다 이다. 이렇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소설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때로는 작가조차도 무시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는 자신의 집필 의도 보다, 작가의 소설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게 나의 뇌피셜이든, 나의 착각이든, 나의 망상이든, 나의 억지든 나는 소설을 그렇게 읽는다. 소설을 통해서 들리는 말이 나에게는 작가의 말이고, 나는 그렇게 소설을 좋아한다.

나는 한강이 '채식주의자'를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 모른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얼마나 힘들게 썼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 소설들이 나에게 전해준 느낌이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이 나는 너무 아팠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의 한강은 아프지 않았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광기와 무너지는 삶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강은 차분했다. 나에게는 그랬다.

어쩌면 이 병적이고 광적이고 뒤틀린 삶을 이렇게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것은 한강의 능력일 거다. 이 어긋난 인간들의 무너진 삶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난해한 설명을 덧붙이거나, 과중한 목소리로 무게를 잡았다면 나는 아마 많은 거부감을 느꼈을 거다.

그러나 한강은 이 이야기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담담하게 한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이 삶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고통도, 광기도, 몰락도, 파멸도 삶이라는 것을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가가 나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내가 들을 수 있던 것은 거기까지였다.

'채식주의자'는 나에게 '무난하게 재밌는 소설'이었다. 그 말은 맨부커상의 심사위원들이 이 소설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무엇'을 나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안타까워라.

그러나 뭐 어떠랴?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어지럽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리면 졸린 사람이다. 문학인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