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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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이 책을 소개한 누군가의 '지독한 열정의 추억'이며 '절제된 사랑 이야기'라는 표현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깨달았다. 내가 읽어야 할 이야기라고. 그리고 예감했다. 나는 지독하게 느끼지 않을 거라고. 나는 공감할 거라고. 그리고 내 예감은 맞았다.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칼 같은 글쓰기로 치명적인 열정을 진단한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라는 책 소개 글과는 다르게 나에게는 하나도 치명적이지 않았고, 하나도 지독하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너무 평범하게 느껴졌다.

책은 무척 짧았다. 9쪽에서 시작해서 67쪽에서 끝났다. 책 사이즈는 140*210mm. 연극 보러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좀 읽고, 밤 사이에 계엄령이 터졌다 해제됐다 하는 소식을 들으며 피가 끓고, 다음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고, 집에 와서 마저 읽었다.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근데 집중할 거리도 없었다.

주인공은 유부남을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했던 여자다. 여자의 모든 신경은 남자로 향해있다. 남자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남자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남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느끼고, 남자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간다. 지독하게 빠져 있다. 근데 다들 비슷하지 않나? 사랑할 때에는?

나도 여자랑 비슷하다. 아니 비슷하다고 '착각'한다. 나도 사랑할 때는 그런다. 다만 책의 주인공은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내 경우는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집착일 수도 있고, 탐닉일 수도 있고, 몰입일 수도 있고, 광기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사랑일 수도 있다. 그게 뭐든지 간에 나의 세상도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다.

그녀만이 내 세상의 전부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그녀를 생각하고, 잠이 들때까지 그녀를 그리워하고, 꿈 속에서도 그녀를 찾는다. 그녀가 가까이 있으면 세상이 아름답고, 그녀가 멀어지면 세상은 암흑이 되고, 그녀가 사라지면 세상은 죽음이 된다. 나는 빛을 쫓는 나방이고, 북쪽을 향하는 나침반 바늘이고, 물을 찾는 나무 뿌리고, 적기를 추적하는 레이더다. 나의 모든 신경과 촉수는 그녀 만을 향하고 있다. 그녀가 바로 내 생명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는 착각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할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단한 껍질에 쌓여서 살아간다. 내 집착이든 열정이든 몰입이든 탐닉이든 광기든 호두 껍질 같은 단단한 껍질 안에서 요동친다. 가끔은 그 사랑이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기도 하지만, 끝내 껍질을 부수지는 못한다.

첫사랑 이후로 늘 그랬다. 사랑이 나의 전부고, 나의 삶이고, 나의 구원이지만 그건 오직 마음 뿐이었다. 나의 사랑은 껍질에 갇혀 있었다. 그 정도에 불과하다. 그 껍질이 도덕률인지 관습인지 양심인지 아니면 그냥 고집인지 뭔지 몰라도. 사랑이 전부라는 건 나의 착각이고 나의 바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의 주인공과 다르다. 그러나 주인공의 마음은 너무도 잘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광기가. 그래서 보인다. 성게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주인공의 가시들이. 한 남자를 향해 온 사방으로 뻗어있는 강박과 집착과 몰입과 탐닉의 가시들이. 그 노이로제 같은 가시들이. 내 안에도 그 가시들이 있다. 껍질에 갇혀 있을 뿐. 그래서 주인공에 비하면 내 심장은 차라리 멍게 같다. 뻗어나가지 못한 가시들.

나는 그런 광기에 빠져 있을 때도 내 자신을, 내 감정을, 내 열정을, 내 절망을 분석하려 든다. 내가 볼 때는 주인공도 그런다. '지독한 열정'과 '치명적인 열정'에 쌓여 있으면서도 분석을 한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 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17 쪽)

나는 주인공에 공감하고 주인공을 이해하고 주인공에 몰입한다. 이 책은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익숙하고, 그래서 시시하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주인공은 너무 단단하고 너무 안정적이다. 약간 특이하고, 약간 집착적이고, 약간 강박적일 뿐이다. 실제의 사랑은 훨씬 더했으리라. 실제의 사랑은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갈망하고 열망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랑이었으리라. 자신을 태우는 미친 열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책의 내용은 제목과 다를 바 없었다. '단순한 열정'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66 쪽)

그렇다. 내 사랑 이야기도 그렇다. 사랑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그렇다. 사랑은 결국 증발한다. 사랑했던 사람은 남이 된다. 사랑이 남기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다. 그것이 사랑의 흔적이다.

본문 뒤에는 20여 쪽에 이르는 '해설'이 있다. 아직 읽지 않았다. 언젠가 이 책으로 독서 토론을 하게 될 날이 있을까? 그때는 이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다. 해설도 읽겠다. 그러면 또 다른 무언가가 보일 거다. 내 성급한 리뷰는 그때야 끝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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