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연구 - 비밀에 부쳐진 말들, 삭제된 존재의 배회, 트라우마의 체현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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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우리의 DNA 안에 부호화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12쪽)


'양공주'는 미국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한국 여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양공주, 양키 갈보, 미군 색시, 양갈보, 양색시, UN 숙녀, 위안부, 기지촌 매춘부, 군인 신부. 미군 기지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는 이 서구화된 여성은 공식적으로는 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에게 멸시 당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미군에게 휴식과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한국 경제에는 달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격려받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묶어둠으로써 자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반미 정치의 화염에 기름을 끼얹는 미 제국주의의 비극적인 피해자다. 이들의 노동은 국가의 외화 소득을 늘려주었지만 막상 이 여성노동자들 스스로는 빛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가혹한 환경 아래의 성노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 여성들은 한국의 예속 상태에 공모한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증오를 자아내는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다는 이유로 동포들의 질투를 유발한다. 한반도의 한국인들에게 혐오와 욕망을 자아내는 과잉 가시적인 대상인 동시에 한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정서 안에 감춰진 그늘진 인물이다.

전쟁은 미군과 한인 여성이 빈번하게 성적 만남을 가질 조건을 낳았고, 이 가운데 일부는 1945년의 전쟁신부법에 힘입어 결혼과 미국 이민으로 귀결되었다. 이 만남 속에는 미군 지배, 전쟁의 폭력, 자애로운 미국이라는 폭력의 미화가 얽혀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국가적인 담론 속에 편입된 전쟁신부는 한국전쟁과 한미 관계의 트라우마에 관한,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관한 비밀을 묻어두어야 한다.

그들은 미군을 상대로 매춘 일을 했던 100만여 한인 여성의, 그리고 미군과 결혼한 10만여 한인 여성의 상징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집단 트라우마와 판타지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모든 것이 삭제된 유령 같은 인물이다. 그들에게는 뒤에 남겨진 모든 양공주들과 죽음을 통해 기지촌을 탈출한 이들 뿐만 아니라, 감춰진 그 자신의 과거가 유령처럼 들러붙는다.

미국 신부로서 양공주가 자기 몸 안에 있는 양갈보로서의 양공주를 억압할 때, 그는 자기 과거의 유령에 의해 배회당하고, 이 유령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대물림되어 가족사에 관한 앎의 틈새라는 형태로 자녀들을 배회한다. 그들이 그 자신에 관해, 그리고 자신이 상징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디아스포라 전체에 무의식적으로 전파된다.

이 책 '유령 연구'는 '양공주라는 상실과 창조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어떻게 트라우마의 효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레이스 M. 조. 저자 자신이 미군 상선의 선원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양공주의 딸이다. 절은 시절 이 사실을 알게된 저자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저자는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런 경험은 저자를 정신적, 지적으로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이후로 저자의 목표는 '가족에 관한,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나라와 나를 받아준 나라, 그리고 나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대학원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양공주 이야기의 진입점을 3곳으로 본다. 미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인 1945년, 끝나지 않았으나 잊혀진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년,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 일본군 위안부 징발과 함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들 진입점 자체가 양공주라는 영적 힘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트라우마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그 자신의 삭제를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의 무의식에 어떻게 침투하게 되었는지, 개인적 트라우마가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한 역사적, 공동체적 트라우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암시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트라우마의 해체와 극복을 위한 노력이다.

저자는 이 책을 꽤 고통스럽게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한국 내 미군 점령지에 물리적으로 가까이 가는 게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뒤에 나는 고통과 친구가 되었고 이후 작업을 하는 동안 그 고통을 길잡이 삼아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서 내 정신과 DNA 속에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책은 오래 전에 지어진 책이다.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후 15년이 지나서 2025년 말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 의하면 2022년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포주 역할을 하며 '치료 시설'에서 여성들을 가두고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주장한 전직 기지촌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2024년 여름, 활동가들은 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몽키 하우스(치료를 받은 여성들이 원숭이처럼 늘어졌기 때문에 붙은 별명)를 한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학대 당한 여성들을 기리는 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해 동두천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저자가 서문을 쓰는 시점까지 343일째 최전선에서 몸을 던지고 있다. 기억은 잊혀졌지만 삭제당하지 않는다. 유령은 대한민국에서도 배회하고 있다.

저자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 책을 제법 힘들게 읽었다. 내용의 역사성이 나를 아프게 만들기도 했지만, 저자의 글쓰기 방식도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책의 말미에 달린 해제는 '책을 구성하는 다섯 장은 일관되지 않은 서술에 따라 각기 다른 목소리와 서사들이 겹치고 서로 다른 장르적 형식이 뒤섞이면서 다층적이며 다중적인 글들의 겹을 만들어낸다.'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심층적이고 다층적이고 예리하고 역사적이고 해체적인 이야기가, 어휘는 학문적이고, 문장은 현학적이고, 서술은 연극적이고, 인용은 넘쳐나고, 동어는 반복되고, 은유는 과하고, 수사는 장황하다. 무식한 나에게는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다층적이면서 상충되는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파편과 반복으로 엮어내는 실험적 글쓰기 방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의 고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매 문장마다, 매 단락마다, 매 챕터마다 달라지는 파편 같은 생각을.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미진하게 느껴진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많은 것들을 알아듣지 못한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비껴가고 넘어갔다. 대신에 저자가 말하는 것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직관적으로 느꼈다.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봤자 여전히 힘들고 애매할 거라는 것을 안다.

이 책을 다시 읽는 건, 내가 더 유식해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언제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대로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이 파편적이고 반복적인 이야기는 무지한, 아니면 무관심한 나를 자꾸만 밀어붙인다. 생각하라고.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가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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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아주 짧은 역사 - 충돌하는 역사 속 진실을 찾아서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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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급습한다. 이스라엘인 약 1천 2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2백 40명이 인질로 잡혔다. 이스라엘은 그 보복으로 4만 6천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고, 그 중 4분의 1이 어린아이들이다. 이스라엘의 폭력으로 가자 지구 주택의 90퍼센트가 파괴되었고, 주민 2백 30만 명 중 90퍼센트가 난민으로 전락했다.

식민주의자들은 토착 주민들을 '야만인'이나 '원시인'으로 묘사하면서 비인간화한다. 고전적 식민주의는 자신이 야만인들에게 근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반면, 정착민 식민주의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땅을 근대화한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다. 필연적으로 토착민들에 대한 축출과 학살이 따른다.

19세기 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약 50만 명이 살았고, 그 중 70퍼센트 정도가 무슬림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온주의는 16세기 유럽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출발하였다. 시온주의는 정착민 식민주의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종말을 앞당기는 성경의 실현이라 믿었고, 한편으로는 유대인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일어나면서 유대 시온주의가 생겨났고, 영국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기 위해 시온주의를 지원한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자 시온주의는 유대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1926년 무렵, 시온주의자들은 토지 소유의 관습을 뒤엎으며 팔레스타인 농민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학살하며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를 시작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저항했고, 영국은 잔인하게 진압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자 시온주의자들은 급진화한다. 1942년, 뉴욕에서 시온주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포했고, 시온주의의 중심은 영국에서 신생 강국 미국으로 옮겨진다. 유럽 열강은 홀로코스트의 양심을 깨끗하게 세탁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외면한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던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창설된 지 2년도 되지 않은 유엔에 회부한다.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선언하고, 시온주의 세력은 대대적인 종족 청소를 시작한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나크바(재앙)가 시작된다. 1948년 말에 이르면, 최대 1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난다. 나크바는 현재 진행형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종족 청소하기 위해,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2퍼센트에 불과한 가자 지구를 일종의 구금 우리로 만들었다. 1967년에는 6일 전쟁을 일으켜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인 30만 명을 추방한다.

1967년 이래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 주민들은 점령된 상태다. 재판 없는 구금, 통행금지, 추방, 살해, 가옥 파괴, 토지 수용, 군대의 권한 남용. 두 지상 최대의 감옥은 2026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박해는 1987년과 2000년, 1차와 2차의 인티파다(봉기)를 불러온다. 두 차례 봉기의 실패는 세속적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실패로 이어진다. 이제 팔레스타인 해방의 희망은 하마스나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로 옮겨간다.

21세기가 되어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서방 세계가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강요하는 평화 교섭을 시도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은 더욱 더 잔인해지고 강고해진다. 이스라엘은 점점 더 인종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유대교 신정 국가를 향해가고, 이제 이스라엘에 진정한 평화 진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자 지구는 최근 17년 동안 힘겨운 포위에 시달렸다. 이스라엘군은 가자를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네 차례 직접 공격했다. 가자 주민 절반이 21세 이하이기 때문에, 이런 포위과 폭격의 현실이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다.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급습한 하마스 투사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이 떨어뜨린 폭탄을 통해 폭력의 언어를 배운 젊은이들이다.

시온주의는 정착민 식민주의고,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반식민주의 운동이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반식민주의 투쟁은 타당한 이유가 없는 난폭한 테러 행위로 묘사되어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해방 투쟁을 벌일 권리를 전 세계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태생부터 피를 뒤집어 쓰고 태어난 나라가 두 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북아메리카 선주민의 피를 뒤집어 쓰고 태어난 미국,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 토착민의 피를 뒤집어 쓰고 태어난 이스라엘.

인류 역사의 수 많은 잔혹 범죄가 그러하듯이, 이 두 나라의 반 인륜 범죄 또한 종교의 강력한 지원 아래 저질러진다. 이 때 종교는 강력한 프로파간다가 되어, 진실을 왜곡하고 범죄를 미화한다. 뉴스와 역사는 범죄자의 눈으로 쓰여진다. 종교는 그렇게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또 다른 목소리는 존재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 출신의 학자 일란 파페가 지은 책이다. 한없이 길고, 한없이 무거운 '인종청소'의 이야기를, 130*200mm의 작은 규격과 본문 195쪽의 얇은 책에 담았다. 마치 그의 또 다른 저서 '이스라엘에 관한 열 가지 신화'나 팔레스타인 역사 학자 라시드 할리디의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의 축약본을 읽는 듯 하다.

뼈대 위주의 핵심적이고 축약적인 서술 덕분에, 고통스러운 감정 이입을 최대한 피한 채로, 팔레스타인 100년 수난사의 골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사연 많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의 본질은 인종 청소에 대항하는 반식민주의 투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정 이입은 피할 수 있어도, 위태로운 양심마저 외면하기는 어렵다. 저자 일란 파페는 말한다. '한 세기 넘도록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불의를 보면서, 여러분이 그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어디에 있든 억압에 당당히 맞설 영감을 얻기를 기대한다' 나도 그 여러분 중의 한 명이고 싶다.


'강에서 바다까지' 평화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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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는 왜 아프리카에 갔을까 - 거짓 관용의 기술
리오넬 아스트뤽 지음, 배영란 옮김 / 소소의책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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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신대륙에 당도한 유럽인들은 자연과 공존하던 선주민들을 학살하고, 선주민들이 공유하던 자원과 자연을 사유화했다. 그리고 그 자연을 팔아 부와 절대 권력을 차지한다.

식물의 '종자'는 수천 년간 인류가 함께 일구고 가꿔온 작업의 결실이다. 어느날 갑자기 몬산토라는 화학기업이 등장해 종자에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는 구실로 종자에 대한 모든 독점적 권리를 가로챈다.

컴퓨터 산업의 태동기, 거의 모든 것이 오픈 소스 체제였던 시절, 빌 게이츠는 모두가 공유하던 컴퓨터 기술에 자신의 기술을 가미하여 특허를 출원했고, 공공재처럼 사용되던 초기 컴퓨터 기술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사유화한다.

2000년, 성공과 부의 상징이 된 빌 게이츠는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고 돌연 자선사업가로 변신한다. 이제 빌 게이츠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게이츠 재단에서 후원하는 많은 사업은 중요하고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유용한 공익 사업이 숲을 가리는 나무들이라는 점이다. 초특급 거대 부호들이 관용의 탈을 쓴 자선사업을 통해 보건, 환경 등의 분야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편승한 신자유주의 체체를 강화하고, 불투명한 자금 구조를 통해 더욱 배를 불리는 '자선 자본주의'의 민낯을 가리는.

'자선 자본주의'라는 신조어는 빌 게이츠에 의해 생겨났다. 이는 억만장자들이 자신의 성공 수완을 기부 활동에 접목시켜, 빈곤 구제에 시장 원리를 도입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 자선 자본주의는 호화로운 빌라나 전용기처럼 '슈퍼리치 클럽'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상징이다. 세계화된 경제에서 가장 번창하는 사업인 기부 사업은 교육 정책, 세계 농업, 보건 분야에서 억만장자들이 전대미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컴퓨터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독점으로 막대한 부를 구축한 빌 게이츠의 사업 방식은 그의 재단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빌 게이츠는 생물 자원을 이용하여 다국적기업이 특허를 출원하는 '생물 해적 행위'를 옹호함으로써 빈곤국에 대한 의료 혜택 접근을 제한했고, 재단은 인권과 노동권을 유린하고 환경을 훼손하며 조세 회피 정책으로 극심한 비판을 받는 많은 기업들에 투자한다. 재단은 자신들이 투자한 이들 업체들의 사업에 재단 기부금을 제공하여, 기부하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회수한다.

빌 게이츠는 녹색 혁명을 주장하며, 자유로운 종자의 사용을 불법화하고 그 씨를 말리기 위해 활동한다. 특허받은 종자를 사용하도록 NGO와 자선 기관에 권고하고, 각국 정부가 지적 소유권을 제정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러나 녹색혁명의 폐단은 인도의 사례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토양이 메마르고, 생물다양성이 빈약해지고, 기후 온난화가 초래되고, 농민은 빈곤해진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씨앗을 버리고 기업이 판매하는 씨앗과 화학비료까지 구매해야 한다. 몬산토는 수많은 농민들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보건 분야는 게이츠 재단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다. 빌 게이츠는 백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게이츠 재단은 효과적인 예비책 정도만 있으면 개선될 수 있는 만성질환과 아동 사망 관련 연구 지원은 등한시하면서, 에이즈와 소아마비 연구에만 우선권을 부여했다. 게이츠 재단의 막대한 보조금은 보건의료 체계를 왜곡시키고 있고, 빌 게이츠가 세계 보건 시장을 장악하게 만들어준다.

자선 자본주의 사업가에게 돈을 버는 것과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다. 재단과 기업이 서로 뒤섞여 투자에 기부의 옷을 입힘으로써 생기는 이득이 무엇이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빌 게이츠는 기부를 시작한 뒤 이전보다 더 부유해졌다는 점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빌 게이츠의 개인 자산은 2011년 560억 달러에서 2015년 789억 달러로 증가했다.

초국적인 권력을 가진 게이츠 재단의 활동은 그 어떤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는다. 빌 게이츠와 그 아내 멀린다 게이츠, 그리고 워런 버핏 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이츠 재단은 그 막대한 자금력으로 학자들과 NGO와 언론의 입을 막고 있고, 전 세계 보건 사업과 여러 나라의 정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외부 감시도 받지 않는다.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쥔 게이츠 재단은 반드시 독립된 기관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민간 재단 같은 자선 단체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현재 상황에서 이 같은 주의와 경계는 더욱 필요하다. 수익에 집착하는 거대 기업이 정말로 빈곤과 불평등을 물리치고 사회 경제 정의를 추구하는지 예의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빌 게이츠라는 인물 한 사람을 넘어서서 소수의 대부호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선 자본주의' 관행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거의 온화한 얼굴 뒤에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환경을 유린하여 축적한 부가 숨어 있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돈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빈곤을 없애기 위한 실절적인 대책은 부자 한 사람의 자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2,30년 전,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에게 빌 게이츠는 '선한 사람의 대명사'는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개발자들에게 그는 탁월한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약삭빠르고 뻔뻔한 장사꾼으로 인식되었다. 돈을 주고 사들인 Dos 프로그램으로 IBM을 이용해 개인용 PC 시장을 장악한 후, 애플의 '매킨토시'를 본따 'Windows' OS를 만들어 PC 시장을 독점한 영악한 사업가.

독점한 Windows OS에 끼워넣기를 통하여, 인터넷 시대를 선도한 넷스케이프를 몰아내고,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그래픽 브라우저 시장의 새로운 지배자로 만든 반칙 기업가. 불법 독점으로 기업 강제 분할의 위기에 몰려있던 탐욕스러운 부자.

빌 게이츠의 대척점에서 'GNU 선언문'을 발표하고 '자유소프트웨어재단(FSF)'을 설립해 '카피레프트' 운동을 주도하여 마구잡이 지적 재산권에 저항했던 리차드 스톨만을 모든 개발자가 선호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이디어 도용과 지적 재산권에 대한 탐닉과 철옹성의 독점으로 부의 제국을 설립한 빌 게이츠를 경시하는 개발자들이 아주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다. '최후의 해커'라 불리던 탁월한 프로그래머 리차드 스톨만은 '소아성애' 관련 발언으로 배척받는 등 입지가 좁아졌고, 기업 강제 분할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제국의 황제' 빌 게이츠는 '당대 최고의 기부천사'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인식의 근저에는 지적 재산권에 대한 대중의 많은 인식 변화가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오래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에 제한을 둠으로써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는 프로그램이 사용되는 범위와 방식을 제한하기 때문에 유해한 것이다. 이는 인간들이 프로그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전체적인 풍요로움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선언하며 나를 감동시켰던 GNU의 정신은 지금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흘러간 옛 노래로 들릴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모든 지적 소유권은, 그것들이 어떻든지 그를 허용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고 여겨져서, 사회가 허용할 때만 정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적 재산권을 창작자의 천부적인 권리라고 인식하고 지지한다. 사용자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변화된 세상에서 특허와 지적 재산권을 희롱하며 자신만의 부유한 성을 쌓은 빌 게이츠는 풍요로운 부자 기업가로 존경을 받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철학을 고수한 리차드 스톨만은 현실 모르는 기인으로 경시되는 것 같다. 이제 세상은 포식자만을 존경하고 추앙한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었고, 나는 바뀐 세상이 서글프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변하였어도 변할 수 없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게이츠가 후원하는 교육과정을 밟은 기자가, 게이츠의 보조금을 받는 학자들이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게이츠가 돈을 대는 신문에, 게이츠가 지원하는 보건 관련 프로젝트에 관해 쓴 기사를 읽는' 세상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실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는 내 눈으로, 내 판단으로, 내 원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어쩌면 그것은 이 난폭한 세상에 한없이 무기력하게 남아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작은 위로일 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몬산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이제 나는 '몬산토 -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과 '에코사이드 - 글리포세이트에 맞선 세계 시민 투쟁기'를 보관함에 집어 넣는다. 그렇게 시선을 넓혀간다. 내 눈으로 보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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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먹는 존재들 - 온몸으로 경험하고 세상에 파고드는 식물지능의 경이로운 세계
조이 슐랭거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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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생명이나 죽음, 지능, 의식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어들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의 정의는 확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아주 넓게 열려 있다. 지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곧장 인간의 지능으로 도약해 버린다. 식물의 지능은 어떨까? 우리의 지능과 상당히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식물에게는 지능이 전혀 없는 것일까? 인간의 인지에 빗대어 식물을 평가하는 건 그저 식물을 모자란 사람, 덜 떨어진 동물로 만들 뿐이다. 이것이 의인화의 위험성이다.

식물학에서는 중요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과학은 어쩌면 되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낭떠러지로 다가가고 있다. 식물은 말이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는 우리의 믿음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결코 매끈한 평면이 아니며, 언제나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주름과 표면을 품고 있다. 세상은 창이 아니라 프리즘이다. 어디를 보든 우리는 새로운 굴절을 발견한다.

식물은 들을 수 있다. 식물의 환경에서는 어디든 소리로 가득하고, 식물은 자기 몸을 주파수와 진동의 세계에 알맞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현재 '식물음향학'이라는 분야가 태동하고 있다.

식물은 볼 수 있다. 2016년 남세균에서 카메라와 유사한 눈 구조물이 발견됐다. 남세균에게 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남세균으로부터 진화한 식물계도 사실은 그 능력을 전혀 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가능성이 열린다.

식물은 기억할 수 있다. 철새들이 매년 똑같은 도래지로 돌아오는 것 같은 유전적인 종류의 기억 말고, 개별 개체의 기억, 탄력적인 기억. 환경이 바뀌면 따라 바뀌는 기억. 식물은 어디에 기억을 저장할까? 그건 아직도 수수께끼의 영역에 있다.어쩌면 유기체 전체가 뇌일 수도 있다.

식물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종들 사이의 대화는 항상 일어나고 있다. 단지 인간의 지각에는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바이오커뮤니케이션'은 식물이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심지어 동물들과 맺는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아름다움은 일종의 의사소통이다. 꽃 자체가 동물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식물은 의태할 수 있다. 보킬라 트리폴리올라타라는 덩굴식물은 자기 옆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식물의 형태로 변신할 수 있다. 호밀과 귀리는 원래 잡초였지만, 농부들에게 뽑히지 않기 위해 밀을 모방하였다. 흉내를 가장 잘 낸 놈들이 살아남았고, 끝내는 작물이 되었다.

식물은 화학자다. 식물은 다른 식물과 동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대단히 복잡한 화학물질을 제 몸에서 합성해 내는 천재적 능력이 있다. 우리가 식물을 먹는 생물로 존재하면서 식물에서 매일 들이마시거나 섭취하는 수천 가지 화합물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식물은 가족을 알아본다. 남남 사이인 식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뿌리를 왕성하게 내리고 공격적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가족 옆에서 자랄 때는 예의 바르게 뿌리 성장을 제한하여 형제자매가 자기 곁에서 살아갈 공간을 남겨둔다. 식물 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한다.

식물이 인격체라는 개념 자체는 인류 문화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지구 방방곡곡 토착민들의 철학에서는 흔히 식물을 친척이나 조상으로,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자체의 권리를 지닌 인격체로서 이해한다. 식물이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도 인격체의 한 부류일 뿐이며, 동물들 역시 그 한 부류라는 것이다. 인격체란 그에게 주도성과 의욕, 그리고 자신을 위해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빛을 먹는 존재들'은 식물의 지능을 다룬 책이다. 책 표지에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세상에 파고드는 식물지능의 경이로운 세계'라는 홍보문구가 박혀있다. 그렇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놀라게 된다. 경이로운 식물의 세계에. 더 나아가 생물 자체에 대한 기존의 생각마저 흔들린다. 우리는 너무 좁고 오만한 시야로 세상과 자연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다 보면 수많은 식물들의 다채롭고 다양한 생존 방법 앞에서 식물지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학은 보수적이고 엄정하다. 속속 밝혀지는 경이로운 식물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식물의 지능은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식물의 뇌는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식물은 그 몸 전체를 뇌로 사용하는 유기체인지도 모른다. 마치 다리에 뇌가 분포된 문어처럼. 그러나 그 가정은 '어쩌면'이다. 밝혀진 것은 아직 없다.


식물은 어떻게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하는 것일까? 뇌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자극에 대한 반응을 조합해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 모든 정보를 해석할 뇌가 없는데, 어떻게 자극을 인지하고, 자극을 구분하고, 자신을 위한 행동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식물 지능에 대한 질문의 본질이다. 


저자는 인간이 지능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속성으로 '오염'시켜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지능이라고 하면 학문적인 지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생물의 지능은 학문적 지능이 아니라 생물학적 지능이다. 모든 유기체는 지능적으로 행동한다.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지능이다. 인간의 지능을 식물지능의 척도로 삼는 것은 지나친 의인화이고, 결국 상상력의 실패다. 과학은 끝내 식물에 지능이 있다는 결론에는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식물은 지능이 있을까 없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일까?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학문은 학자들의 다수결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우리가 알고 믿던 진리가 하루 아침에 뒤집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직접 확인한 적도 없이 그저 남이 하는 얘기만 듣고서.

헌법재판소의 내란수괴 윤석열 탄핵 판결날 나는 윤석열의 사저 앞으로 가기 위해 한남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수많은 태극기 부대의 행렬에 파묻히고 말았다. 탄핵 인용 선언이 나오는 순간 수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욕설을 퍼뜨렸다. 수 만 명의 사람중에 윤석열이 반란수괴이고 탄핵되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은 어쩌면 나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틀린 것일까? 혼자서 옆의 수만 명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내가 틀린 것일까?

얼마 전 독서 모임을 같이했던 지인에게서 '꼰대'라는 소리를 들었다.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생각을 강요한다는 지적이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난 내 의견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다. 그 사람은 나를 꼰대로 여겼지만, 나는 그 사람의 태도가 닫혀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인식에 갇혀 있다고 느꼈다.

며칠 계속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남들에게 압박감을 주는 듯한 내 말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과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남을 바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만이다. 나는 내 지식과 내 믿음에 대해서 나를 믿을 뿐이다. 물론 나는 틀릴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은 티끌에 불과하고, 그것 또한 거의 대부분 남의 말을 주워들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실을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인간은 모두 주관적이다. 저마다 자신 만의 진실과 진리를 갖고 있다. 신이 판단할 수 있을까? 설사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뜻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진짜 신의 말이라고 누가 증명할 것인가? 신이 직접 나타난다고 한들 그 신을 누가 인증할 것인가? 모든 존재는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믿음을 믿는다.

결국 최종적인 판단은 나 자신이 할 수 밖에 없다.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대신 내가 무지함을, 내가 어리석음을,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 나 자신을 늘 비판하고 의심하고 검증해야 한다. 모를 때는 배우고, 틀렸을 때는 고쳐야 한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그 믿음이 맹목이 되고, 맹신이 되어 버리면 어떡할 것인가? ?

사실 정답은 없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뿐이다. 계속해서 배우고 공부하고 귀 기울이고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나의 이성(理性)이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인간과 생명과 자연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기반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그 이성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 나는 계속 나의 세계를 확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내 지식과 믿음이 망상과 맹목일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열려 있음이 오류와 거짓과 왜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고, 늘 회의하고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불안속에서도 최종적으로는 나를 믿고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내 삶 자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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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머신 - 바다는 어떻게 세계를 만들고 생명과 에너지를 지배하는가
헬렌 체르스키 저자, 김주희 역자, 남성현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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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하나로 향한다. 인류의 미래.

물질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의 귀결은 결국 하나다. 인류의 미래.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의 여섯 가지 물질에 대한 이야기도, 바다에 대한 이야기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그만큼 우리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겠지.

우리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몰라서 그런 거다. 우리가 무지해서 그런 거다. 우리가 추상과 관념과 사변의 하늘을 노닐고 있을 때, 우리 발밑의 지구는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오직 아는 사람들만 모색하고 있다. 인류와 지구가 살아남을 방법을.

'블루 머신'은 해양과학자이며, BBC 다큐멘타리 진행자인 '헬렌 체르스키'가 지은 책이다. 태양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원료로 지구를 순환하며 조절하는, 바다라는 지구의 엔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다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바다가 지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인간과 바다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알려주고 있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전혀 모르던 바다의 생리에 대해서 듣게 되니 재미있다. 게다가 그냥 바다 이야기도 아니다. 바다가 어떻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발목을 잡았는지, 스코틀랜드의 청어 소녀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파도를 어떻게 피해갔는지 등 인간의 삶과 연관해서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근데 마냥 재밌기만 한 건 아니다. 문과 남자인 나로서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나오는 화학과 물리와 지구 과학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설명들이 버겁다. 학생 때도 들어보지 않은 자연과 물질의 원리를 늙어가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는 BBC 다큐멘터리 진행자답게 쉬운 언어로 쉽게 설명하지만, 그래도 기계치이자 과학맹인 나에게는 버겁다. 다행인 건 교과서의 별나라 이야기처럼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붙들고 버티면 얼추 짐작하며 넘어갈 수 있다.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사실 기억나는 건 없다. 초반에는 정리하며 읽으려고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일단 지나가고, 기회가 생기면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그때는 내 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리가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바다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전망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인류의 미래로 귀결된다.


우리는 인간이 호기심을 품고 거친 해수면을 바라보는 독립적인 관찰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거대하고 푸른 액체형 메커니즘의 기슭에 서식하는 작디 작은 개미에 불과하며, 이 메커니즘이 도출하는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바다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지구의 거주민이 된다는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 고찰하는 것이다. 먼 우주의 관점에서 인류의 이야기는 햇빛이 지구에 도착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빛이 되어 우주로 떠나면서 끝이 난다. 우리는 바다다.

인류는 유한한 행성에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생존하게 하는 지구의 생명유지시스템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성장과 소비에 기반한 문화를 구축했다.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면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구성 요소가 되는 기쁨과 경이로움을 잃었다.


지식과 이해는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공한다. 인류가 바다에 초래한 문제(따라서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에 초래한 문제)를 떠올리면 우울감을 느끼기 무척 쉽지만 이런 감정이 무관심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동해야 하고, 행동에는 열정과 에너지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이를 실현하는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면 지난 5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떠올려보자.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바다가 변함없이 지구의 생명유지시스템에서 건강한 심장 역할을 하는 미래를 원한다. 그러한 미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지구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나은 시스템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화석연료 중독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과제는 바다가 있는 지구의 거주민으로서 인간이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배우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행동에 나서야 한다. 바다가 직면하는 문제는 개인의 잘못된 행위가 아닌 인간 사회 시스템에서 유래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고려해야만 인류 문명은 문제를 바로잡고 거대한 지구의 생명유지시스템과 공존할 수 있다. 인류는 지구에 탑승한 승무원이기에 모두 실천할 수 있다.

실천은 정치인에게 편지를 쓰거나,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면서 우선시하는 가치를 분명히 표현하거나, 작은 지역적 결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는지 확인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참여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어떤 사람이 되기로 하는가? 지구의 특징을 자기 삶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며 푸른 행성의 거주민이 되기로 선택하는가? 아니면 외면하는 쪽을 택하는가? 우리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지구의 거주민이다. 인류는 푸른 기계와 어떻게, 얼마나 강하게 관계를 맺을지 선택해야 한다. 바다를 무시하는 쪽은 택할 수 없다. 바다는 인간을 포용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인간은 바다와 함께 일할 수도, 바다에 맞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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