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지도책 -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케이트 크로퍼드 지음, 노승영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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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케이트 크로퍼드는  대학교수이면서 MS 수석 연구원이고, 20년간 AI 관련 일을 해왔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AI라는 이름은 기만적이라고.


그녀는 먼저 한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말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리한 한스'를 이용하여 우리가 지능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을 지적합니다. 백지 상태의 시스템에서 인간의 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환상. 지능이 사회, 문화, 역사, 정치등과 무관한 자연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라는 환상. 


이러한 환상이 마음이 컴퓨터와 같고, 컴퓨터가 마음과 같다는 잘못된 믿음을 줍니다. 또한, AI가 물질세계와의 관계가 모조리 단절된 비실체적 지능이라는 편협한 인식을 심어줍니다.


이 책은 인공지능이 '인공'적이지도 않고, '지능'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AI는 자율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대규모 데이터 집합과 방대하고 집약적인 훈련 없이는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합니다.


AI는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물류, 분류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인공지능은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AI를 대규모로 구축할 자본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이유로 AI는 궁극적으로 기득권에 유리하게 설계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권력의 등기부입니다.


저자 케이트에게 AI는 지도책입니다. 지도책은 별개의 조각들을 재편집하고 짜맞추어 세계를 다시 읽을 수 있게 해줍니다. AI에서 지형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을 추동하고 지배하는 국가와 기업, 지구에 흉터를 남기는 추출식 채굴, 데이터 대량 수집, 이를 떠받치는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노동 관행 등을 설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질문합니다. AI는 무엇인가? AI가 전파하는 정치는 어떤 형태인가? AI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AI의 피해는 누가 짊어지는가? AI의 이용은 어디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이 책은 읽기에 불편합니다. 문장은 불친절하고, 어휘는 혼란스럽습니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AI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 독자들을 위한 자세하고 친절한 맥락 설명이 부족합니다. 컴퓨터 용어와 일반 영어의 구분도 명확하지 못합니다. 번역은 그 혼란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책을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객관적이거나 통달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특정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 관점은 매우 의미있고, 설득력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들어봐야 합니다.


 2016년 이세돌과 바둑을 둔 알파고가 AI의 대유행을 불러왔다면, 2023년의 쳇 gpt는 그 유행에 불을 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AI는 잘 모르지만, 과거 컴퓨터 관련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저는 이 유행이 석연치 않고 불편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AI의 신통력을 찬양하고, AI 개벽을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AI 종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이 AI의 내부적인 동작원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I의 존재 방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그것은 마치 미신처럼 느껴집니다. AI 미신. 구글이니 MS니 하는 거대 기업들의 신전에서 제사 지내는 언론 미디어 무당들. 누군가를 흉내내어 말하고 싶어집니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인공지능이라는 유령이." 


이 책은 인공지능을 '추출 산업'으로 규정합니다. 현대 AI 시스템을 창조하려면 지구의 에너지와 광물 자원, 값싼 노동력, 대규모 데이터를 추출해야 합니다.


1장은 현대 컴퓨터에 동력을 공급하는 행위들이 어떻게 지구를 대규모로 변화시키는 지를 살펴봅니다.

2장은 인공지능이 실은 인간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장은 AI의 데이터를 이용 관행이 개인정보 유출과 감시 자본주의 외에도 윤리적, 방법론적, 인식론적 우려를 낳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4장은 AI 시스템의 분류 행위가 어떻게 위계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증폭하는지 말해 줍니다.

5장에서는 속속 도입되는 감정 탐지가 많은 과학적 논란에 휩싸여 있으며, 불완전하고 부정확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6장에서는 AI 시스템이 국가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는 방식을 살펴 봅니다.

7장에서는 인공지능이 어떻게 권력 구조의 역할을 하며 하부 구조, 자본, 노동을 결합하는지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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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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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들>

이 책은 법정 스릴러의 대가인 존 그리샴의 작품입니다. 존 그리샴은 변호사 출신의 소설가로, 1989년 타임투킬로 데뷔하여 47권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전 세계에서 3억부 이상이 팔려나간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아마도 그의 최전성기는 데뷔 직후부터 90년대 일 겁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흡입력 뛰어난 이야기와 탄탄한 짜임새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출연하여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흥미 만점의 영화로 재탄생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힙니다. 탄탄한 구성속에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미가 탁월해서 특별한 반전이나 유별난 소재 없이도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박한 행복과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왜곡되고 구겨진 정의가 제 자리를 찾아가는 희열을 느끼게 해줍니다.

존 그리샴은 제가 읽은 스릴러 작가 중에서 스티븐 킹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스토리텔러입니다. 사실 스티븐 킹에서 호러를 떼어내고, 존 그리샴에서 법정을 떼어내도, 그들은 여전히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탁월한 이야기꾼들입니다. 무협지에서 김용이 그러하듯이. ㅋ

그는 법정 스릴러 말고도 '시어도어 분 시리즈' 같은 아동용 법정 소설이나 일반 소설도 발표했지만 국내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법정 스릴러들 또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초기작들의 신선하고 탄탄한 재미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힘도 많이 딸리고, 소재도 점점 진부해지는 느낌을 주었죠.
2017년 불량 변호사 이후 국내에서 그의 소설들이 출판되지 않았는데, 작년부터 다시 그의 책이 국내 출판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의 '카미노 아일랜드'에 이어서 올해 이 책 '수호자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존 그리샴은 그의 흥미만점인 법정 스릴러 속에서 일관되게 약자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또한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형제도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보여줍니다. '가스실', '고백', '이노센트 맨'등은 사형제도를 소재로 쓴 작품들이구요.
수호자들 또한 재미있는 법정 스릴러 소설입니다. 무고한 장기수들의 결백을 증명하고 석방시키는 일을 하는 ‘수호자 재단’과, 그 재단의 핵심 인물인 성공회 신부이자 변호사인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초창기 소설들처럼 압도적인 긴박감과 쫄깃쫄깃한 스릴은 부족해도, 여전히 탄탄하고 시원시원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수호자들'에서도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 의식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탁월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것은 문제 의식을 소설의 재미 속에서 잘 녹여낸다는 것입니다. 주제에 매몰되어서 소설적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재미를 위한 소재에서 멈춥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약자에 대한 연민 속에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돈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미국 사법 시스템의 모순은 그 나라의 시민에게는 큰 문제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돈에 의해 좌우될망정 미국 사법 시스템은 규칙에 의한 시합으로 보여집니다. 메시나 호날두를 스카웃해서 우승하는 프로 축구처럼.
돈만 많으면 엄청난 물량 공세로 배심원들을 뒤흔들 수 있는 미국 사법 제도는 분명 문제가 많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으로 규칙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돈으로 규칙을 멋대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규칙 따위는 뻔뻔하게 팽개치고 판사와 검사 맘대로 법을 유린하는 우리 나라 사법 제도를 생각하면 , 그들의 사법제도가 부럽기만 합니다. 그들의 사법 제도에서는 판사와 검사도 플레이어의 하나일 뿐입니다. 재판이라는 도박장의 하우스장도, 전주도 아닙니다.
미국 사법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몇몇 구절들을 책에서 뽑아 보았습니다.

"제대로 된 재판에서는 교흔, 이른바 물린 자국과 모발 분석이 신빙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두 가지 다 뒤가 구리고 항상 변하는 지식 분야로,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 측 변호인들 사이에서 '쓰레기 과학'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자격이 없는 전문가들과 이들의 근거 없는 유책 이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21 쪽)

"백인들의 미국에서 교도소는 나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르는 곳이다. 흑인들의 미국에서 교도소는 소수 인종을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게 치우는 데 사용하는 창고 같은 곳이다."(79 쪽)

" 그 교도소 역시 주 정부가 아닌 일반 회사에서 이익 창출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그 말은 교도관들의 월급이 짜고, 교도관들의 수가 적고, 원래도 끔찍한 음식이 더 수준이 낮고, 매점에서는 땅콩버터에서 화장실 휴지까지 모든 물건을 두고 재소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의료적 보살핌이 거의 전무하다는 말이다."(86 쪽)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형사 재판에서의 전문가 증언이 급격히 증가했다. 인기 높은 텔레비전 범죄 드라마들에서는 법의학 수사관들을 오류 없는 과학에 근거해 복잡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유능하고 똑똑한 탐정처럼 묘사했다. 판사들은 과학에 압도당해 버렸고, 독학으로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거나 아예 없었다. 그들의 이력서가 두꺼워지면서 피고를 유죄로 모는 그들의 이론도 점점 더 다양해졌다."(104 쪽)

" DNA 검사는 범죄 수사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쓰레기 과학에 대해 신선하고 파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불러왔다. DNA 검사를 통해 풀려난 무고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의 경우가 검찰이 제시한 근거 없는 법의학적 추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105 쪽)

"확실한 건 교도소는 거대 고용주라는 점이다. 교도소를 유치할 수 있을 정도로 운이 좋은 지역에서는 그 어떤 사업장보다 많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미국에서는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이를 운영하려면 1백만 명의 직원과 800억 달러의 세금이 필요하다."(131 쪽)
"연방 법원이든 주 법원이든 대부분의 항소심 판사들은 일단 이런 유의 사건을 무시하고 본다. 이미 수십 년을 끌어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 피고가 유죄라는 판결을 내리면 아무리 새 증거물이 나온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는 일이 드물다."(248 쪽)

"조이 바는 강간죄로 7년째 복역 중이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피해자 역시 그와 같은 입장이다.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가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조이는 흑인이고 여자는 백인이다. "(265 쪽)

"하지만 우리는 웬만하면 교도관은 손대지 않으려고 해. 당신 말고도 많은 교도관들이 물건을 배달해 주면서 뒷돈을 챙기잖아. 교도소장은 재소자들이 약에 취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죄수들은 제대로 걷지 못해야 얌전하게 있으니까. 교도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잖아. 우린 교도소 금지 품목의 밀매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우린 훨씬 중요한 걸 쫓고 있다고."(355 쪽)

"나도 사람인지라 판사들이 경멸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사건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백인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대개 검사 신분으로 법조계에 입문했고,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 한 치의 동정심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은 기소된 사람들을 무조건 유죄 취급하며 마땅히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사법 체계는 잘 돌아가고 정의는 늘 승리한다."(362 쪽)

"무고한 사람을 다루는 재판이 시간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길게 늘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만한 판사들을 강제로 교도소에 주말 동안 가두어 둘 수 있기를 수백 번 기도했다. 사흘 밤만 그렇게 해 본다면 그들의 직업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투철해질 것이다."(511 쪽)

"밀러 씨, 당신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려서 20년 넘게 가둔 사람들은 오늘 이 법정에 없습니다. 그들이 언젠가 오심에 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저는 그들의 뒤를 추적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당신이 우리의 법률 체계에 의해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체계의 일부로서 당신에게 벌어진 일에 사과드립니다."(515 쪽)


저는 사형제를 찬성합니다. 양심수 석방과 사형제 폐지를 주활동으로 하는 국제 사면 위원회의 20년 넘은 (유령) 회원이면서도 사형제를 찬성합니다.
사형이 강력 범죄를 줄이지 못한다는 연구, 오심에 의한 억울한 사형의 엄존하는 가능성, 사형은 법이 저지르는 또 다른 살인이라는 사형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저는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형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굳이 조봉암이나 인혁당 사건이나 민족일보같은 고의적인 사법 살인이 아니더라도.

근데 그러다가도 유영철이나 조주빈같은 자를 보면 사형을 원하게 됩니다. 저는 복수도 정의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적 복수와 사적 정의까지 저는 믿습니다. 온전히 사법제도에만 기대기에는 우리의 사법제도는 너무나 부실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사법제도가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사형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가석방없는 종신형이 도입되어야 겠지요. 인권 침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요.

사형제를 찬성하면서도, 사형제 반대의 목소리에 솔깃해지는 저. 너무 귀가 얇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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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 그 많던 역사 속 여성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케르스틴 뤼커.우테 댄셸 지음, 장혜경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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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 꽤 인상적입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을 파고듭니다.


빠진 퍼즐 채우기


세계사는 '어쩌면'으로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지구의 모든 생명은 폭발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빅뱅이라는 이름의 대폭발로. 어쩌면 처음엔 모든 것이 황량했고 텅 비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작디작은 단세포들이 거대한 공룡으로 진화했다. 어디선가 원숭이가 두 발로 일어서 도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최초의 인간이 탄생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혹은 비숫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대해, 지나간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자주 '어쩌면'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대부분은, 심지어 교과서에 적힌 내용도 알고 보면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가 내린 대부분의 결론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는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어디서나 그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흐릿한 흔적도 많다.가령 모서리가 칼처럼 날카로운 돌이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돌을 저렇게 깎은 것일까? 아니면 큰 바위에서 부서져 떨어진 것일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신호들도 많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누군가가 한 해 한 해 기록한 책. 신문이나 편지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 사건의 기록에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역사에 영웅으로 남고 싶었던 누군가에게서 뇌물을 받았을까? 애당초 실제 사건을 기록할 목적이 아니라 교훈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쓴 걸까?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가를 싫어해서 그를 모함했을까? 갑자기 많은 것들이 예전처럼 명확하지가 않다.


역사가들은 많은 증거와 개별 자료들을 수집해 정성껏 조사한다. 그런 다음 결론을 내리고 이론을 정립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론은 수정을 거듭한다. 그래서 완벽한 설득력을 갖춘 듯 보이는 이론이 도로 전부 폐기되는 일도 다반사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학자들은 이런 뒤엉킨 기록의 그물망을 해쳐 진실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 어떤 증거를 신뢰할지, 어떤 증거를 신빙성 있다고 여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로부터 판단이 탄생한다. 그들의 고단한 퍼즐 작업은 '어쩌면'을 '다분히'로 만든다.


퍼즐 조각을 전부 다 손에 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사가들은 쉬지 않고 퍼즐을 맞춘다. 그러한 현실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력적이기도 하다. 과거를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조각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사의 퍼즐은 하필 여성과 관련된 조각들이 많이 빠져 달아나고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세계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특이한 일, 세상을 바꾼 사건에 집중한다. 전쟁과 건국, 새로운 종교의 탄생, 기술의 발명에 눈을 돌린다. 그런데 그런 일은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 순간 여자들은 가사와 요리와 육아에 힘을 쏟았다. 세계 어디서나 오랜 시간에 걸쳐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남자들이 유명인이 되어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온 여성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들은 나라를 다스렸고 전쟁터에 나가 싸웠으며 철학자, 작가, 작곡가, 의사가 되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능력을 입증했다. 유명한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았다. 다만 그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뿐이다. 그 이유는 여성이 비범한 일을 하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 질서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비범한 일은 남자들이 할 테니 여자는 살림이나 해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시대의 사건을 기록한 남성들이 여성의 업적을 무시해버리는 일이 자꾸만 일어났다.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은 건축물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을 도로 파내버렸다. 몽골에서도 여성의 역사가 기록된 부분을 모조리 잘라낸 13세기의 양피지가 발견되었다. 로마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로마의 역사는 1000년에 가깝지만 등장하는 여성의 숫자는 적어도 너무 적다. 훗날 여성들의 이름이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수도 있지만, 전사들의 사회였던 로마가 애당초 여성에게는 두드러진 업적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든 우리는 로마 여성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고, 어쩌다 알고 있는 것도 별로 흥미롭지 못한 내용들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여성이 용감하게 역사에 끼어들고자 했다면, 그녀는 모략을 일삼고 잔인하며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매우 나쁜 여자로 기록되었다. 전 세계의 역사가들이 비슷한 목적을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 여자가 역사에 끼어들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증하려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성에 관한 기억을 지우려 한 남성들의 전략은 잘 먹혔다. 유명한 여성 작가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들이 유명했다는 사실뿐. 정작 그들의 글은 사라지고 없다. 남성 작가들의 작품은 필사를 거치면서 고이 보관되어 전해졌다. 남성과 여성이 편지를 주고받았을 경우에도 남성이 쓴 편지들은 지금껏 남아 있지만 여성이 쓴 편지들은 고의적으로 폐기했거나 부주의로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거치는 동안 망각이 베일처럼 여성의 삶과 활동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이 아직까지 남은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50년 전이나 100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 속 여성을 가려놓은 베일이 조금씩 걷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다시금 세계사의 퍼즐을 맞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수많은 남성들을 골라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 역시 편파적인 이미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지울 수는 없다. 따라서 전혀 다른 새 퍼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퍼즐에 몇 개의 빠진 조각을 채워 넣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역경을 딛고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가 된 강인하고 총명하고 용감한 모든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없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진짜 '여성 세계사'가 탄생할 것이고, 그것 역시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다시금 특수한 부분을 다룬 분야별 역사로 그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성이 모두의 역사로 존재하는 일은 또 다시 요원해질 것이다.


제가 꽂힌 것은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이 아니라 '어쩌면' 입니다. 어쩌면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역사만이 아닐 겁니다. 많은 학문들이 학자들의 '다수결'인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대부분은, 심지어 교과서에 적힌 내용도 알고 보면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은 역사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아주 많은 것들이 그렇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서문에 꽂혀서 책을 샀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늙어가는데, 읽는 걸 미뤄 놓은 책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책 읽는 거 말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정말 재미있는 소설책과 만화책읽기도 부족한데, 자꾸 엉뚱한 빚만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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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불 속에서 피어난 라틴아메리카
존 찰스 채스틴 지음, 황보영조 외 옮김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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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저자는 존 찰스 채스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교수입니다. 책의 헌사를 보면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 보입니다.

책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방문 이후의 600년의 시간에 대해 개별 국가 단위가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른 통합적인 방식으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서술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접촉-식민지-독립-탈식민-진보-신식민주의-민족주의-혁명-반동-신자유주의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얼핏 제목은 선정적인 것 같지만 책의 내용은 차분하고 담담합니다. 객관을 지향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 같습니다.

책은 쉽고 평이한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국내 발간은 2020년인데 책의 내용을 보면 2010년 즈음에 쓰여진 책입니다. 재미있는 건 제 책은 파본입니다.

33쪽부터 48쪽 까지가 두 번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라도 이 책이 빅히트를 치길 바랍니다. 그래서 제 파본 책을 희귀본으로 비싸게 팔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희귀본 판매와 로또 1등 당첨. 저는 계란을 두 바구니에 나눠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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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 숫자의 교묘한 거짓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박지훈 옮김 / 더좋은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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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가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사흘 전, 메이저 신용평가 회사들은 리먼 브라더스의 채권에 최고 등급을 부여 했고, 파산 당일에도 투자 적격을 부여했다. 대형 보험사 AIG와 워싱턴뮤추얼은 파산 직전까지 최고 등급을 유지한 결과, 연방 정부로부터 막대한 구제 금융을 받을 수 있었다. 2011년, 2만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던 대형 에너지 기업 엔론은 파산하기 닷새전, 메이저 신용평가 회사들로부터 '투자 등급'의 평가를 받았다. 


세계 최대의 신용 평가 기관들이 발급한 모든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가 있다. "이 보고서에 포함된 정보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동 보고서에 포함된 신용평가나 기타 의견을 신뢰해 투자 의사를 결정해서는 곤란합니다."


신용등급은 전 세계의 각종 분야에 자리잡은 숫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숫자다. 신용등급은 숫자가 아닌 문자적 숫자이지만 지표나 지수와 마찬가지다.  기업, 은행, 보험사, 심지어 자치주까지 신용 등급을 받지 않으면 운영이 불가능하고 대기업이나 정부는 신용평가 기관의 승인이 없으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신용평가 기관들은 공익적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기관이라 불리지만, 사실 이들은 철저한 사기업이다.


신용평가 기관이 생겨난 것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철도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건설사들은 큰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투자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신규 투자자들은 투자 리스크를 평가할 수 있는 기관을 원하게 되었다. 이들의 필요에 맞물려 신용평가사들이 등장한다. 


이 후 몇십 년간 신용펑가는 컨설팅 업체와 다를 바 없는 민간의 평가에 불과했고,  전통적으로 투자자와 기업의 중개자의 역할은 은행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은행이 직접 금융 시장에 참여하고 중개자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평가 기관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1936년, 미국 통화감독청은 은행 보유 채권의 등급제를 도입했고, 1975년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우량자산에 관한 규제사항을 발표하면서 무디스, S&P, 피치의 빅 3를 '국가공인통계평가 기관'으로 인정한다. 그 이후로 오직 이 세 기관의 등급만이 공적 규제의 목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평가사들은 초기에는 채권 발행 기업을 평가해서 받는 평가 수수료와 투자자들에게 평가 정보를 팔고 받는 구독료로 수입을 창출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금융과 자본 시장이 글로벌화하되고 금융 상품의 평가 수요가 비약적으로 늘고, 투자자들이 평가 정보를 공유하면서 평가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구독료에서 평가료로 바뀐다.


즉, 평가를 받는 기업들이 평가사를 먹여 살리게 된다. 이후 평가사들은 고객, 즉 평가 받는 기업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과장된 평가를 하게 된다. 빅 3가 지배하는 평가 시장의 과점 구조에서, 경쟁을 통한 신뢰성 향상은 이론에 그칠 뿐이다.


증권 발행자들은 한 평가사가 좋은 등급을 부여하면 다음부터는 좋은 등급을 부여한 동일한 평가사를 찾게 된다. 보통 투자 은행들은 최고의 등급을 부여하는 평가사를 '쇼핑'해 왔다.


 2004년 다국석 식품회사 파르말랏이 파산했을 때, 회사가 평가사의 도움을 받아 회계 장부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가사를 바꾸면 당장 등급을 하향 조정하겠다고 고객을 협박한 평가사들이 기소를 당했던 사례도 있다.


금융 시장이 다각화되면서 평가사가 분석하는 금융상품의 범위는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나아가 금융시장이 통합되고 국제화되면서 미국에만 존재하던 현상이 전 세계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S&P와 무디스의 등급을 획득하는 것은 개발도상국의 채권발행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절차로 자리잡았다.국채를 발행하는 국가들이 등급을 받으려는 이유는 채권 발행이 목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해당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지표로 자리 잡게 된다.


평가사들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국가에게도 있다. 국가가 평가 등급을 금융 규제에 통합시키면서 평가사들의 지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1930년대 초, 미국연금펀드는 신용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자산만을 담을 수 있게 했고, 그 이후로 금융당국은 채권의 상환 가능성을 평가사들의 평가에 의지했다. EU 또한 1993년 자본적정성지침을 공표하면서 이러한 추세에 합류했다. 


공공 기관들이 금융 시장을 규제하는 실사 기관의 역할을 포기하고 독점 평가기관들의 판단해 의존하면서 공익 업무에 구멍이 생긴 것이고, 이러한 정책 덕분에 평가사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시장 지킴이가 되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신용평가회사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신용 평가사들은 자신들의 등급이 '의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미연방 수정헌법에 따라 평가가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등급이 의견임을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갖출 필요가 없어졌고, 민사 소송에서도 자유롭다. 규제 기준은 신용 평가에 의해 정해지는데, 신용 평가를 감독할 방안은 없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러한 관행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여전히 평가사의 독립성이 보장되며, 등급에 대한 의견을 독립적으로 발표할 수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빅3는 권력과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했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평가사들은 시장을 휘청대게 만들었고, 전 세계의 국가 재정을 뿌리째 흔들었다. 


2011년 S&P는 미국 정부의 정책 효율성을 이유로 등급을 강등시켰고, 빅3는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을 '투기 등급'으로 강등시켰고, 무디스는 이탈리아의 등급을 강등시켰다. 2012년에는 S&P가 유럽 9개국의 등급을 강등시켰고, 무디스는 독일의 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며 평가사가 잠재적인 정치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평가사들은 중립성을 갖추지도 못했고, 객관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한다. 그 대신 그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판단의 틀을 제공한다. 민간 기관인 평가사는 모든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졀정할 수 있다. 


 유엔무역개발 협의회에 따르면 신용평가는 잘 변하지 않아 시장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며, 시장은 등급이 변화할 때마다 과민반응한다. 이로써 금융 위기는 악화되며, 한 국가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옮겨가기 쉽다. 미국 상원 조사위원회는 과장된 평가 등급이 시장의 과열을 초래했고, 갑작스런 등급 강등이 금융 위기를 촉발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리스크는 계량 할 수 있으므로 측정과 통제가 가능한 위험이고, 불확실성은 주관적인 가능성에 불과하여 숫자로 계량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리스크이다. 권위를 가진 숫자 없이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불확실성과 주관성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경제학의 라이벌인 존 케인스와 시카고 학파의 프랭크 나이트는 서로 대랍하면서도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다. 불확실성은 언제나 경제 활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시장에 위험과 기회를 같이 제공하며 숫자의 권위를 제거한다. 


신용평가사들은 수상한 통계적 방법론으로 수확의 객관성에 기대어 불확실성을 리스크로 전환시키려 했다. 평가사들이 융성한 이유는 경제적, 재무적 분석을 숫자의 힘을 빌려 객관화했기 때문이다. 데이터 수집에 깃든 근본적인 모호함을 명확한 계산으로 숨긴 것이다. 


평가사들은 계산에 의지하여 정책 입안자들에게 잘못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사건은 수학적 확률을 따르지 않는다. 위기가 닥치면 리스크 관리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사회는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회귀하게 된다.


신용평가가 전성기를 맞은 시대는 고장난 국가가 자본시장에 지배당한 시대이다. 신용평가로 설계된 세상은 금융위기 속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이때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시민의 정치가 아닌 숫자의 정치였다. 


결국 평가의 권위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 거버넌스 절차가 왜곡되는 이유는 조작된 숫자와 조작된 숫자를 양산한 자들을 우리가 신뢰하기 때문이다. 평가사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숫자를 신뢰하는지, 숫자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실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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