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25
서머셋 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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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달은 무엇일까? 그 달의 세계를 찾아 떠날 마음이 있었던 적은? 난 6펜스의 세계에서 사느라 바빠 달을 쳐다볼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다. 강제로 이를테면 6펜스의 세계에서 타의로 쫓겨났다면? 그때는 억지로라도 나의 달을 찾아가는 길에 나섰을까?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가 여느 사람과 다른 인간이라는 인상은 조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 8, 첫 문장)'

<달과 6펜스>는 파리에서 태어난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안정된 삶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다.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예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던 스트릭랜드는 안정된 가정을 뒤로하고 파리로 향한다. 부인 에이미와 주변 사람들은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난 것으로 알지만 스트릭랜드는 단지 그림 그리기 위해서 파리에 왔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와 갖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 줄기찬 격류가 바위를 단번에 산산 조각내듯 과감한 개조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에는 광신자의 열성적인 면과 사도(使徒)의 격렬한 점을 다 가지고 있었다. (p. 83)'

가난이 파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천재성을 알아차린 스트로브의 도움으로 그림에 열중한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 병에 걸린 스트릭랜드는 스트로브와 그의 아내 블란치의 사랑과 돌봄으로 회복하지만 끝내 그들을 배신한다. 마르세유 항을 배회하며 소일거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는 자신이 동경하던 이국땅 타이티로 향한다.

어느덧 마흔일곱 살이 된 스트릭랜드는 타이티라는 대자연 속에서 만나 결혼한 아타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걸작을 완성한다. 나병에 시력마저 잃은 스트릭랜드는 온 정열을 쏟아부어 오두막 벽에 그려낸 대작을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가는 길에 세 여인을 만났다.

그의 부인 에이미는 남편의 욕망에 무관심했다. 에이미는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학계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 잦았다. 문학과 거리가 먼 남편은 그녀에게 열등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준 만큼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다.

타이티에서 만난 아타는 이전의 두 여인과 달랐다. 아타는 스트릭랜드를 사랑하는 데 온전히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그 사랑으로 스트릭랜드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예술가로서 꿈을 이루는 것만 남았다.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고향이 정해져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어쩌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해도 그들은 계속 미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난 곳에선 오히려 나그네 같은 신세로 지낼 뿐이며, (pp. 278, 279)'

스트릭랜드 이방인이나 외톨이로 지내기를 거부했다. 진정한 고향을 찾아 떠났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그는 동그란 구멍 속에 박힌 네모난 못이었다. 어떤 못이라도 구멍에 맞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 나타날 때까지 험난한 모험을 멈추지 않았다.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되는 곳을 마침내 찾았을 때 비로소 그곳에 정착했다. 사람들의 동정과 공감이 있는 곳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걸 뭣 때문에 생각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p. 228)'

사십이라는 늦은 나이일지라도 스트릭랜드가 달의 세계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는 물에 빠져 죽는다. 물속에서 빠져나와야겠기에 그림을 그렸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그만큼 스트릭랜드는 남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마스터피스가 탄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사랑도 이용하고 도움도 이용하고 규범이나 윤리 따위의 개념을 팽개친 채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모든 것을 달의 세계로 가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기심만으로는 말이다.

달의 세계의 도착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스트릭랜드, 그의 예술가로서 여정의 마침표에는 그의 재능에 더해 아타의 사랑과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유토피아, 동정과 공감이 가득한 타이티가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고갱과 스트릭랜드 사이에 차이가 있다. 고갱이 타의에 의해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면 스트릭랜드는 스스로 달의 세계로 향하는 모험을 택했다. 나는... 자의는 아니더라도 고갱처럼 타의로 떠밀려 달의 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에 섰다면? 그 길을 걸어갔을까?

아니, 난 스트릭랜드처럼 죽음과 맞바꿀 정도의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없다. 진정한 나를 찾기에는 사회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스트릭랜드 같은 인물을 만나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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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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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해 35년 남짓 머무른 후 그곳에서 퇴직해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이 됐다. 직장을 옮길 기회도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낯섦이 가져올 불편함보다 익숙함을 택했다.


에이모 토올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은 러시아 백작 로스토프가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제한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미국 작가이지만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20년대 러시아를 소설 배경으로 택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국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고, 부르주아 유한계급들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귀족 출신 로스토프 백작은 과거에 쓴 시(사실은 친구 미시카의 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혁명 이전 공로가 인정돼 총살을 면하고 메트로폴 호텔에 감금된다.

호텔 바깥으로 나가면 그때는 총살이다. 1922년 6월 21일 마지막으로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호텔에 들어간 후 30년이 넘는 세월을 백작은 그곳에 머물렀다. 거센 풍랑이 일렁이는 시대에 개인은, 백작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동안 지내던 스위트룸을 내주고 다락방으로 쫓겨난 로스토프는 좌절한 채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보야르스키 식당의 주방장 에밀, 지배인 안드레이, 수선실의 마리아 등 호텔 내 다양한 직원들과 갖게 된 인간관계는 로스토프가 귀족으로서 품위와 예절, 교양, 유머를 잃지 않고 호텔 감금 생활에 적응해 살아가게 만든다.

'"난 아저씨 콧수염이 없는 게 더 좋아요." 아이가 말했다. "콧수염이 없으니 아저씨의... 용모가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p. 76)'

어느 날 식당에서 로스토프 곁을 찾아온 어린 니나 쿨리코바는 호텔 마스터키를 들고 백작과 함께 호텔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호텔이란 제한된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세계를 넓혀갈 수 있음을 니나를 통해 로스토프는 깨닫는다. 안나 우르바노바와는 감금 상태에서도 사랑을 나누고, 친구 미시카와 우정을 끝까지 지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로스토프는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는다.

'"소피야?" 검은 머리에 상아색 피부를 가진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발이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높이에서 달랑거렸다. (...) 하지만 백작은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남편, 딸, 체포, 루뱐카, 교정 노동.... (pp. 368, 369)'

세월이 지나 니나가 데리고 니나의 딸 소피야, 그 아이를 키우며 백작은 어느새 60이 넘는 나이가 된다. 그동안 좌절했지만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잘 살았던 로스토프 백작, 소피야로 인해 호텔을 탈출할 이유를 찾는다. 마침내 소피야를 망명시킨 다음 백작은 30년 넘게 감금돼 지냈던 호텔을 빠져나간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p. 52)'

로스토프 백작은 타인에 의해 호텔에 감금됐지만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한 직장에 나를 감금했고, 그 환경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직장 생활이 내 인생을 허비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로스토프 백작의 메트로폴 호텔 감금 생활도 그의 인생을 허비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네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육이 세계적인 감각, 세계에 대한 경이감, 그리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감각을 너에게 제공할 거라는 뜻이야." (...)
"우린 지금 지평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그렇죠? 시야의 끝에 있는 지평선 말이에요. 그걸 얻기 위해선 학교에서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것보다 실제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p. 151)'

그렇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니나의 딸 소피야를 보면서 로스토프는 니나가 말한 삶의 지평을 떠올렸고 60이 넘는 나이임에도 실천에 옮겼다. 그 점이 내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직장 생활하면서 맘만 먹으면 삶의 지평을 넓힐 수 기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는데. 가족, 돈, 건강 등등 핑계 댈만한 건 모두 동원해 물리적 공간에 나를 가두는 것도 모자라 정신적인 공간에도 나를 가뒀다.

로스토프 백작은 백작과 같이 있는 게 더 좋다며 호텔을 떠나지 않으려는 소피야를 설득까지 한다.

'"소피야,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아서 두렵구나. 네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난 너를 이 건물의 사방 벽 내부로 한정된 삶으로 너를 끌어들였어. (...). 하지만 네 엄마 말이 정확하게 맞았어. 사람은 금박으로 장식된 홀에서 <셰에라자드>를 들음으로써, 혹은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는 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딤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중국 땅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나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섰던 콜럼버스처럼 말이야." (pp. 608)'

요즘 나도 나를 설득하는 중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환경을 지배하고 지평을 넓혀보지 않겠냐고. 로스토프도 60이 넘었지만 그를 둘러싼 테두리를 넘지 않았는가.

'"아빠는 러시아로 돌아온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잠시 후 소피야가 그렇게 물었다. "혁명 이후에 말이에요." (...)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pp. 656, 657)'

요즘 도움 좀 받아볼 요량으로 지난 4~5년 동안 알게 된 책 친구들을 온 오프라인에서 수시로 불러내고 있다. 나중에 나도 그들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과 같이 했던 시간만큼 내 인생에서 특별한 건 없었어.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어. 고마워~"

니나, 소피야, 안나 그리고 친구들이 로스토프의 백작에게 그랬듯이 그들이 내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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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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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해 35년 남짓 머무른 후 그곳에서 퇴직해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이 됐다. 직장을 옮길 기회도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낯섦이 가져올 불편함보다 익숙함을 택했다.


에이모 토올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은 러시아 백작 로스토프가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제한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미국 작가이지만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20년대 러시아를 소설 배경으로 택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국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고, 부르주아 유한계급들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귀족 출신 로스토프 백작은 과거에 쓴 시(사실은 친구 미시카의 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혁명 이전 공로가 인정돼 총살을 면하고 메트로폴 호텔에 감금된다.

호텔 바깥으로 나가면 그때는 총살이다. 1922년 6월 21일 마지막으로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호텔에 들어간 후 30년이 넘는 세월을 백작은 그곳에 머물렀다. 거센 풍랑이 일렁이는 시대에 개인은, 백작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동안 지내던 스위트룸을 내주고 다락방으로 쫓겨난 로스토프는 좌절한 채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보야르스키 식당의 주방장 에밀, 지배인 안드레이, 수선실의 마리아 등 호텔 내 다양한 직원들과 갖게 된 인간관계는 로스토프가 귀족으로서 품위와 예절, 교양, 유머를 잃지 않고 호텔 감금 생활에 적응해 살아가게 만든다.

'"난 아저씨 콧수염이 없는 게 더 좋아요." 아이가 말했다. "콧수염이 없으니 아저씨의... 용모가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p. 76)'

어느 날 식당에서 로스토프 곁을 찾아온 어린 니나 쿨리코바는 호텔 마스터키를 들고 백작과 함께 호텔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호텔이란 제한된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세계를 넓혀갈 수 있음을 니나를 통해 로스토프는 깨닫는다. 안나 우르바노바와는 감금 상태에서도 사랑을 나누고, 친구 미시카와 우정을 끝까지 지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로스토프는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는다.

'"소피야?" 검은 머리에 상아색 피부를 가진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발이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높이에서 달랑거렸다. (...) 하지만 백작은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남편, 딸, 체포, 루뱐카, 교정 노동.... (pp. 368, 369)'

세월이 지나 니나가 데리고 니나의 딸 소피야, 그 아이를 키우며 백작은 어느새 60이 넘는 나이가 된다. 그동안 좌절했지만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잘 살았던 로스토프 백작, 소피야로 인해 호텔을 탈출할 이유를 찾는다. 마침내 소피야를 망명시킨 다음 백작은 30년 넘게 감금돼 지냈던 호텔을 빠져나간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p. 52)'

로스토프 백작은 타인에 의해 호텔에 감금됐지만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한 직장에 나를 감금했고, 그 환경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직장 생활이 내 인생을 허비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로스토프 백작의 메트로폴 호텔 감금 생활도 그의 인생을 허비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네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육이 세계적인 감각, 세계에 대한 경이감, 그리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감각을 너에게 제공할 거라는 뜻이야." (...)
"우린 지금 지평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그렇죠? 시야의 끝에 있는 지평선 말이에요. 그걸 얻기 위해선 학교에서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것보다 실제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p. 151)'

그렇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니나의 딸 소피야를 보면서 로스토프는 니나가 말한 삶의 지평을 떠올렸고 60이 넘는 나이임에도 실천에 옮겼다. 그 점이 내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직장 생활하면서 맘만 먹으면 삶의 지평을 넓힐 수 기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는데. 가족, 돈, 건강 등등 핑계 댈만한 건 모두 동원해 물리적 공간에 나를 가두는 것도 모자라 정신적인 공간에도 나를 가뒀다.

로스토프 백작은 백작과 같이 있는 게 더 좋다며 호텔을 떠나지 않으려는 소피야를 설득까지 한다.

'"소피야,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아서 두렵구나. 네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난 너를 이 건물의 사방 벽 내부로 한정된 삶으로 너를 끌어들였어. (...). 하지만 네 엄마 말이 정확하게 맞았어. 사람은 금박으로 장식된 홀에서 <셰에라자드>를 들음으로써, 혹은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는 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딤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중국 땅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나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섰던 콜럼버스처럼 말이야." (pp. 608)'

요즘 나도 나를 설득하는 중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환경을 지배하고 지평을 넓혀보지 않겠냐고. 로스토프도 60이 넘었지만 그를 둘러싼 테두리를 넘지 않았는가.

'"아빠는 러시아로 돌아온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잠시 후 소피야가 그렇게 물었다. "혁명 이후에 말이에요." (...)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pp. 656, 657)'

요즘 도움 좀 받아볼 요량으로 지난 4~5년 동안 알게 된 책 친구들을 온 오프라인에서 수시로 불러내고 있다. 나중에 나도 그들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과 같이 했던 시간만큼 내 인생에서 특별한 건 없었어.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어. 고마워~"

니나, 소피야, 안나 그리고 친구들이 로스토프의 백작에게 그랬듯이 그들이 내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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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에 관하여 -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판사 프랭크 카프리오 이야기
프랭크 카프리오 지음, 이혜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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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2022년 42%였던 우리나라 사법부 신뢰도가 2026년 27%까지 추락했다. 재판 지연과 '불공정'한 판결이 주요 원인이다.

최근 검찰 개혁에 검찰의 수사권이 주요 이슈였다. 수사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내세우는 것 중 하나가 가해자가 저지른 모든 죄를 찾아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놓칠 경우 피해자가 억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사의 특권은 악인을 정죄하는 데 있다고 믿는 판사들에게 가장 먼저 이 책을 권한다. 판사의 특권은 믿을 수 없이 힘겨운 삶을 살아온 사람을 만나고 때로는 그들을 도울 기회가 있다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추천의 글,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박주영)'

하지만 애당초 검찰의 역할도 그렇고 사법제도에서 3심제를 두는 이유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은 사람의 기본권도 보장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릴 때 당한 기본권의 침해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내 사법적, 개인적 철학은 간단하다. 모두를 친절과 배려, 존중으로 대하는 것이다. (p. 14)'

<연민에 관하여>의 저자 프랭크 카프리오는 38년 동안 프로비던스 지방법원 판사로 일했다. 이 지방법원은 70년 전 카프리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연민과 존중으로 대했던 판사가 일했던 그 법정이다. 그 판사를 존경했다. 카프리오는 그의 법정에서 그 누구에게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애썼다. 그리고 감명받았던 70년 전의 그 판사처럼 모두를 존중했고 공감하며 연민을 느꼈다.

'연민'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고 가진 것, 받은 것, 이루어낸 것에 감사하는 데서 비롯된다. 연민은 타인에게 베푸는 선행이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그 답은 간단하다. 연민을 가지는 것이다. (p. 158)'

'존중'은 나 자신 혹은 상대방의 지위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존중은 타인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염려한다면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을 알고 있고 자신의 경험으로 그들을 다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다고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그들에 대한 존중이다. (p. 254)'

'이해'는 공감하며 듣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아는 것이다. 이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기도 하다.

'연민을 가지면 더 좋은 사람이 된다. 존중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해가 있어야 인간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을 알고 자신을 옳은 길에 머물게 해주는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다. (p. 259)'


호세 히메네스는 주차위반으로 저자의 법정에 출석했다. 범칙금을 이미 납부했고 오해가 풀려 벌금을 면제받은 다음, 호세는 머뭇거리다가 20년 전 자신이 불량소년이었음을 판사에게 털어놓았다. 프랭크 카프리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호세가 18살일 때 자신의 법정에서 그에게 건넨 조언이 생각났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죽을 수도, 감옥에 갈 수도, 중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세 가지 미래가 놓여있는데 선택은 호세의 몫이라고 말해주었다. 청년 호세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해 준 저자의 조언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호세는 말했다.

'20년 전 그날,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p. 291)'

판사가 법정에 선 피고인에게 친절과 배려,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 법이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는지를 프랭크 카프리오는 그의 책 <연민에 관하여>에서 증명해 보여준다.

악인을 정죄하는 것이 목적인 판사, 사건을 처리할 때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판사,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고 믿는 판사, 정의는 언제나 냉혹한 것이라고 여기는 판사, 이런 판사로 인해 사법부 신뢰가 추락한다. 그 역할도 같이 퇴색된다.

사법은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지 않는지 살피는 제도다. 판사가 연민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법정에 선 이들을 대할 때, 사법은 잃었던 신뢰를 다시 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법은 기회를 다시 줌으로써 사람을 구하는 역할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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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필사 - 오늘의 태도로 내일을 읽는 시간 고전필사노트 1
김동완 지음 / 양양하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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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주역 필사>의 글을 베껴 쓸 때마다 잠시 멈추고 흔들리는 나를 생각해 봤다.

나는 남의 말에 솔깃해하는 편이다.
자주 흔들린다.
그래서 내가 가려던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서곤 한다.

나는 남을 의식하는 편이다.
간혹 맘에 들지 않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그래서 불편한 하루를 보내곤 한다.

나는 남이 싫어할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다툼이 잦지 않지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끌려가는 듯해 유쾌하지 않다.

나는 내 앞에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면 당황하는 편이다.
우물쭈물한다.
그래서 계획을 시작조차 못한다.


세상은 늘 변하고 우리 마음도 그에 따라 흔들린다. 가야 할지 멈춰 서야 할지, 버티는 게 옳은지 아니면 물러서는 것이 바람직한지, 용기 내서 말해야 할지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할지...

'주역은 이러한 갈림길에서 정답을 내놓기보다 지금의 형국이 어떠한지를 보여 줍니다. 지금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지, 조급해도 괜찮은지, 한 걸음 물러서는 편이 더 단단한 선택인지. 그리고 그 선택은 늘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p. 4, 머리말)'


'둔(吨)은 이 불안정함을 두려워 말라고 한다.
흐트러짐은 시작의 일부이고,
시작은 완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형태'가 아니라
'지속하는 의지'다.
속도를 내기보다 멈춤과 움직임을 오가며
나만의 리듬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p. 22)'

엊그제 머물렀던 글이다. 나의 흔들림이 나만의 리듬을 찾는 과정 가운데 일부라며 위로해 주는 글이었다. 흔들리는 나를 바로 세워주는 문장이 이어지길... 매일 주역의 글에 머물며 내 중심을 바로잡고 하루를 시작하는 필사의 시간이 되기를...

'필사는 읽는 것과 다릅니다. 눈으로 이해하는 대신, 손으로 받아 적는 일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문장을 몸 안으로 들이는 방식입니다. 의미를 곱씹기보다 문장이 마음에 머무를 시간을 허락하는 방식입니다. (p. 5,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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