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의 진화 - 진화가 알려 주는 암 극복의 새로운 아이디어
아테나 액티피스 지음, 김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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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일흔 살을 앞두고 형님은 사십 대 중반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분 다 살아야 할 삶이 남았는데, 그 끝까지 가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이유로 아내는 나도 간암으로 고생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다.

'우리는 암으로 죽지 않더라도, 암과 함께 죽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p. 134)'


암에 이르는 모든 체계의 협력을 연구하는 암 생물학자, 아테나 액티피스의 <암세포의 진화>는 암에 관한 책이다. '암이 어디에서 왔고 왜 존재하며 왜 그토록 완치가 어려운지에 관한 책이다. (p. 7. 머리말>'

이 책의 특징이라면 진화를 바탕으로 자연 선택에 초점을 맞춰 암을 살펴본다는 점이다. 그래야 암의 복잡한 특성, 특히 진화는 암을 억제하는 몸을 좋아하는 반면 증식이 빠르고 물질대사가 왕성한 암세포의 특징을 선호하는 진화적 역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암은 우리의 일부다.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는 순간부터 암은 존재했다. 다세포 유기체로서 첫걸음을 뗄 때부터 암은 있어 왔다. '우리는 암과 함께 태어나서 암과 함께 죽는다. 그리고 암과 함께 살아간다. 암은 자궁에서 무덤까지 우리 삶의 일부다. (p. 87)'

우리 몸은 30개 조에 달하는 세포로 이루어졌다. 세포들은 서로 협력하고, 진화하고, 에너지를 소비하고, 계산하고, 유전자를 드러내고, 단백질을 생산한다. 이러한 세포의 유기적 행동은 거의 10억 년에 걸친 다세포체의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진화가 협력하는 세포 사회를 만든 셈이다.

그러나 세포 간의 협력이 깨질 때가 있다. 통제에서 벗어나 얌체 행동 cheating을 하는 세포가 있는데 바로 암이다. 암은 자원을 남용하는 등 우리 신체의 환경을 망가뜨리면서 무절제한 복제를 한다. 이런 행동은 정상적인 세포보다 진화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몸의 건강과 생존 가능성을 손상시켜버린다.

진화로 암 억제 시스템도 갖추었다. 이제까지 생명체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유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100퍼센트 통제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암을 완전히 억제하면 할수록 번식력이 낮아진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끼리 전투를 벌이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암을 통제하고 치료해야 할까. 암과 전쟁이라도 벌이듯 완전히 암을 제거할 때까지 싸워야 할까? 불행하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암은 우리가 동원하는 모든 치료법에 반응하며 진화하는 다양한 세포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암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다. 암과 싸우는 것은 진화라는 필연적 과정과 싸우는 걸 의미한다. 진화 과정을 상대로 절대 이길 수 없다. 암의 진화도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태적 변화 과정이고 앞서 말했듯이 다세포 협력에 암체 짓 하며 무임승차하려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암의 진화를 멈출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을 늦추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암이 우리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적응이 필요한 이 예측 불가의 상대와는 장기적인 전략적 상호 작용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낫다. 암을 콕 집어서 제거할 마법의 약을 언젠가 찾아낼 거라는 그릇된 희망에 매달리기보다는 진실을 마주하고 암과 함께하는 불확실한 미래를 받아들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p. 289)'


내 친구, 내 친구의 아내분 그리고 또 가까운 지인 여럿이 암과 투병 중이다. 아니, 암과 함께하는 중이다. 나 또한 가족력이 내게 현실이 되어 모습을 드러낸 암세포와 동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진화에 기대어 암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우리 인류가 생존한 것도 진화 덕분이니 말이다.

많은 열량을 소비하는 반면 적게 움직이고, 화학 발암물질이 주변에 가득하고, 생식 호르몬 수치는 높아졌고, 수면방해에 노출되어 사는, 지금 우리 일상의 변화는 너무 빨리 진행됐다. 진화가 미처 대처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니 암과 잘 지내며 기다리다 보면 암을 훌륭히 치료할 방법을 진화가 결국은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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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날의 문장 수집 - 마음으로 눌러쓰는 예술가들의 첫 문장
부이(BUOY) 엮음 / 부이(BUOY)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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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야 한다, 날들이 텅 빈 채로 흘러가지 않도록."
1892년 3월 9일 태어난 비타 새크빌 웨스트의 작품 <십이일간의 여정> 속 문장이다.

한평생 '비타'라고 불렸다. 비타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작가이자 정원 디자이너로도 알려졌다. 시싱허스트에 조성한 정원은 20세기 영국 정원 디자인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비타는 성역할이 엄격히 구분되는 시대임에도 남성 복장을 하고 여성과 연애를 했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만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울프를 위로하며 교감했다. 울프의 작품 <올랜도>의 실제 모델이 비타이다. 말년에 암을 앓다가 내가 태어나기 바로 1년 전인 1962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나는 양력으로 6월에 태어났다. 음력 생일을 지키다보니 생일이 해마다 달라져 아이들이 아빠 생일을 기억하기데 애를 먹는다. 나와 생일이 같은 토마스 하디는 영국 태생으로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별들은 가끔 우리 집 그루터기 사과나무의 열매들 같아 대개는 아름답고 온전하지만, 더러는 병들어 있지. - <더버빌가의 테스>


매일 아침 필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비타가 말했듯 시간을 건너온 문장을 쓰면서 하루를 채우려는 다짐이다. 텅 빈 채로 하루를 보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내게 남았다.

오늘은 누가 태어났을까. 그는 어떤 문장을 남겼을까. 누군가 태어났기에 하루를 그의 글로 채운다. 나, 나도 누군가의 하루를 채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야할텐데. 그래야 내 생일날만이라도 날 기억해 줄텐데.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만이라도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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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25
서머셋 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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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달은 무엇일까? 그 달의 세계를 찾아 떠날 마음이 있었던 적은? 난 6펜스의 세계에서 사느라 바빠 달을 쳐다볼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다. 강제로 이를테면 6펜스의 세계에서 타의로 쫓겨났다면? 그때는 억지로라도 나의 달을 찾아가는 길에 나섰을까?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가 여느 사람과 다른 인간이라는 인상은 조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 8, 첫 문장)'

<달과 6펜스>는 파리에서 태어난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안정된 삶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다.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예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던 스트릭랜드는 안정된 가정을 뒤로하고 파리로 향한다. 부인 에이미와 주변 사람들은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난 것으로 알지만 스트릭랜드는 단지 그림 그리기 위해서 파리에 왔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와 갖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 줄기찬 격류가 바위를 단번에 산산 조각내듯 과감한 개조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에는 광신자의 열성적인 면과 사도(使徒)의 격렬한 점을 다 가지고 있었다. (p. 83)'

가난이 파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천재성을 알아차린 스트로브의 도움으로 그림에 열중한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 병에 걸린 스트릭랜드는 스트로브와 그의 아내 블란치의 사랑과 돌봄으로 회복하지만 끝내 그들을 배신한다. 마르세유 항을 배회하며 소일거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는 자신이 동경하던 이국땅 타이티로 향한다.

어느덧 마흔일곱 살이 된 스트릭랜드는 타이티라는 대자연 속에서 만나 결혼한 아타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걸작을 완성한다. 나병에 시력마저 잃은 스트릭랜드는 온 정열을 쏟아부어 오두막 벽에 그려낸 대작을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가는 길에 세 여인을 만났다.

그의 부인 에이미는 남편의 욕망에 무관심했다. 에이미는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학계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 잦았다. 문학과 거리가 먼 남편은 그녀에게 열등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준 만큼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다.

타이티에서 만난 아타는 이전의 두 여인과 달랐다. 아타는 스트릭랜드를 사랑하는 데 온전히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그 사랑으로 스트릭랜드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예술가로서 꿈을 이루는 것만 남았다.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고향이 정해져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어쩌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해도 그들은 계속 미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난 곳에선 오히려 나그네 같은 신세로 지낼 뿐이며, (pp. 278, 279)'

스트릭랜드 이방인이나 외톨이로 지내기를 거부했다. 진정한 고향을 찾아 떠났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그는 동그란 구멍 속에 박힌 네모난 못이었다. 어떤 못이라도 구멍에 맞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 나타날 때까지 험난한 모험을 멈추지 않았다.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되는 곳을 마침내 찾았을 때 비로소 그곳에 정착했다. 사람들의 동정과 공감이 있는 곳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걸 뭣 때문에 생각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p. 228)'

사십이라는 늦은 나이일지라도 스트릭랜드가 달의 세계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는 물에 빠져 죽는다. 물속에서 빠져나와야겠기에 그림을 그렸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그만큼 스트릭랜드는 남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마스터피스가 탄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사랑도 이용하고 도움도 이용하고 규범이나 윤리 따위의 개념을 팽개친 채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모든 것을 달의 세계로 가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기심만으로는 말이다.

달의 세계의 도착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스트릭랜드, 그의 예술가로서 여정의 마침표에는 그의 재능에 더해 아타의 사랑과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유토피아, 동정과 공감이 가득한 타이티가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고갱과 스트릭랜드 사이에 차이가 있다. 고갱이 타의에 의해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면 스트릭랜드는 스스로 달의 세계로 향하는 모험을 택했다. 나는... 자의는 아니더라도 고갱처럼 타의로 떠밀려 달의 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에 섰다면? 그 길을 걸어갔을까?

아니, 난 스트릭랜드처럼 죽음과 맞바꿀 정도의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없다. 진정한 나를 찾기에는 사회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스트릭랜드 같은 인물을 만나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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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25
서머셋 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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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달은 무엇일까? 그 달의 세계를 찾아 떠날 마음이 있었던 적은? 난 6펜스의 세계에서 사느라 바빠 달을 쳐다볼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다. 강제로 이를테면 6펜스의 세계에서 타의로 쫓겨났다면? 그때는 억지로라도 나의 달을 찾아가는 길에 나섰을까?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가 여느 사람과 다른 인간이라는 인상은 조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 8, 첫 문장)'

<달과 6펜스>는 파리에서 태어난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안정된 삶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다.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예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던 스트릭랜드는 안정된 가정을 뒤로하고 파리로 향한다. 부인 에이미와 주변 사람들은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난 것으로 알지만 스트릭랜드는 단지 그림 그리기 위해서 파리에 왔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와 갖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 줄기찬 격류가 바위를 단번에 산산 조각내듯 과감한 개조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에는 광신자의 열성적인 면과 사도(使徒)의 격렬한 점을 다 가지고 있었다. (p. 83)'

가난이 파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천재성을 알아차린 스트로브의 도움으로 그림에 열중한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 병에 걸린 스트릭랜드는 스트로브와 그의 아내 블란치의 사랑과 돌봄으로 회복하지만 끝내 그들을 배신한다. 마르세유 항을 배회하며 소일거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는 자신이 동경하던 이국땅 타이티로 향한다.

어느덧 마흔일곱 살이 된 스트릭랜드는 타이티라는 대자연 속에서 만나 결혼한 아타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걸작을 완성한다. 나병에 시력마저 잃은 스트릭랜드는 온 정열을 쏟아부어 오두막 벽에 그려낸 대작을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가는 길에 세 여인을 만났다.

그의 부인 에이미는 남편의 욕망에 무관심했다. 에이미는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학계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 잦았다. 문학과 거리가 먼 남편은 그녀에게 열등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준 만큼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다.

타이티에서 만난 아타는 이전의 두 여인과 달랐다. 아타는 스트릭랜드를 사랑하는 데 온전히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그 사랑으로 스트릭랜드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예술가로서 꿈을 이루는 것만 남았다.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고향이 정해져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어쩌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해도 그들은 계속 미지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난 곳에선 오히려 나그네 같은 신세로 지낼 뿐이며, (pp. 278, 279)'

스트릭랜드 이방인이나 외톨이로 지내기를 거부했다. 진정한 고향을 찾아 떠났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그는 동그란 구멍 속에 박힌 네모난 못이었다. 어떤 못이라도 구멍에 맞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 나타날 때까지 험난한 모험을 멈추지 않았다.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되는 곳을 마침내 찾았을 때 비로소 그곳에 정착했다. 사람들의 동정과 공감이 있는 곳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걸 뭣 때문에 생각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p. 228)'

사십이라는 늦은 나이일지라도 스트릭랜드가 달의 세계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는 물에 빠져 죽는다. 물속에서 빠져나와야겠기에 그림을 그렸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그만큼 스트릭랜드는 남이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마스터피스가 탄생하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사랑도 이용하고 도움도 이용하고 규범이나 윤리 따위의 개념을 팽개친 채 딴 세상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모든 것을 달의 세계로 가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기심만으로는 말이다.

달의 세계의 도착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스트릭랜드, 그의 예술가로서 여정의 마침표에는 그의 재능에 더해 아타의 사랑과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유토피아, 동정과 공감이 가득한 타이티가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고갱과 스트릭랜드 사이에 차이가 있다. 고갱이 타의에 의해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면 스트릭랜드는 스스로 달의 세계로 향하는 모험을 택했다. 나는... 자의는 아니더라도 고갱처럼 타의로 떠밀려 달의 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에 섰다면? 그 길을 걸어갔을까?

아니, 난 스트릭랜드처럼 죽음과 맞바꿀 정도의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없다. 진정한 나를 찾기에는 사회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스트릭랜드 같은 인물을 만나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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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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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해 35년 남짓 머무른 후 그곳에서 퇴직해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이 됐다. 직장을 옮길 기회도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낯섦이 가져올 불편함보다 익숙함을 택했다.


에이모 토올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은 러시아 백작 로스토프가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제한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미국 작가이지만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20년대 러시아를 소설 배경으로 택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국민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고, 부르주아 유한계급들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귀족 출신 로스토프 백작은 과거에 쓴 시(사실은 친구 미시카의 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혁명 이전 공로가 인정돼 총살을 면하고 메트로폴 호텔에 감금된다.

호텔 바깥으로 나가면 그때는 총살이다. 1922년 6월 21일 마지막으로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호텔에 들어간 후 30년이 넘는 세월을 백작은 그곳에 머물렀다. 거센 풍랑이 일렁이는 시대에 개인은, 백작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동안 지내던 스위트룸을 내주고 다락방으로 쫓겨난 로스토프는 좌절한 채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보야르스키 식당의 주방장 에밀, 지배인 안드레이, 수선실의 마리아 등 호텔 내 다양한 직원들과 갖게 된 인간관계는 로스토프가 귀족으로서 품위와 예절, 교양, 유머를 잃지 않고 호텔 감금 생활에 적응해 살아가게 만든다.

'"난 아저씨 콧수염이 없는 게 더 좋아요." 아이가 말했다. "콧수염이 없으니 아저씨의... 용모가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p. 76)'

어느 날 식당에서 로스토프 곁을 찾아온 어린 니나 쿨리코바는 호텔 마스터키를 들고 백작과 함께 호텔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호텔이란 제한된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세계를 넓혀갈 수 있음을 니나를 통해 로스토프는 깨닫는다. 안나 우르바노바와는 감금 상태에서도 사랑을 나누고, 친구 미시카와 우정을 끝까지 지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로스토프는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는다.

'"소피야?" 검은 머리에 상아색 피부를 가진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발이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 높이에서 달랑거렸다. (...) 하지만 백작은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남편, 딸, 체포, 루뱐카, 교정 노동.... (pp. 368, 369)'

세월이 지나 니나가 데리고 니나의 딸 소피야, 그 아이를 키우며 백작은 어느새 60이 넘는 나이가 된다. 그동안 좌절했지만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잘 살았던 로스토프 백작, 소피야로 인해 호텔을 탈출할 이유를 찾는다. 마침내 소피야를 망명시킨 다음 백작은 30년 넘게 감금돼 지냈던 호텔을 빠져나간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p. 52)'

로스토프 백작은 타인에 의해 호텔에 감금됐지만 그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한 직장에 나를 감금했고, 그 환경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직장 생활이 내 인생을 허비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로스토프 백작의 메트로폴 호텔 감금 생활도 그의 인생을 허비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네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육이 세계적인 감각, 세계에 대한 경이감, 그리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감각을 너에게 제공할 거라는 뜻이야." (...)
"우린 지금 지평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그렇죠? 시야의 끝에 있는 지평선 말이에요. 그걸 얻기 위해선 학교에서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것보다 실제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p. 151)'

그렇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니나의 딸 소피야를 보면서 로스토프는 니나가 말한 삶의 지평을 떠올렸고 60이 넘는 나이임에도 실천에 옮겼다. 그 점이 내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직장 생활하면서 맘만 먹으면 삶의 지평을 넓힐 수 기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는데. 가족, 돈, 건강 등등 핑계 댈만한 건 모두 동원해 물리적 공간에 나를 가두는 것도 모자라 정신적인 공간에도 나를 가뒀다.

로스토프 백작은 백작과 같이 있는 게 더 좋다며 호텔을 떠나지 않으려는 소피야를 설득까지 한다.

'"소피야,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아서 두렵구나. 네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난 너를 이 건물의 사방 벽 내부로 한정된 삶으로 너를 끌어들였어. (...). 하지만 네 엄마 말이 정확하게 맞았어. 사람은 금박으로 장식된 홀에서 <셰에라자드>를 들음으로써, 혹은 자기만의 동굴에 갇혀 <오디세이>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는 게 아냐. 사람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딤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거야. 중국 땅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나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섰던 콜럼버스처럼 말이야." (pp. 608)'

요즘 나도 나를 설득하는 중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환경을 지배하고 지평을 넓혀보지 않겠냐고. 로스토프도 60이 넘었지만 그를 둘러싼 테두리를 넘지 않았는가.

'"아빠는 러시아로 돌아온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잠시 후 소피야가 그렇게 물었다. "혁명 이후에 말이에요." (...)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소피야,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이제까지 인생이 나로 하여금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 있게 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어. 바로 네 엄마가 너를 이 호텔 로비로 데려온 날이란다. 그 시간에 내가 이 호텔에 있었던 것 대신에 러시아 전체를 통치하는 차르 자리를 내게 준다 해도 난 절대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pp. 656, 657)'

요즘 도움 좀 받아볼 요량으로 지난 4~5년 동안 알게 된 책 친구들을 온 오프라인에서 수시로 불러내고 있다. 나중에 나도 그들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과 같이 했던 시간만큼 내 인생에서 특별한 건 없었어.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어. 고마워~"

니나, 소피야, 안나 그리고 친구들이 로스토프의 백작에게 그랬듯이 그들이 내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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