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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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노선을 따라가는 버스에 앉아 생각한다. 이 버스가 바닷가로, 숲속으로, 고즈넉한 들판으로 날 데려다주기를. 하지만 내가 그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 한, 내가 생각한 그곳, 그곳에 절대 갈 수 없다.


<너무 늦은 시간>
공무원 카헐은 약혼자 사빈이 왜 자신과 파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약혼반지를 찾는 기뻐해야 하는 날이긴 하지만, 추가 비용이 있다는 말에 주인이 호구로 여기는 것 같아 화를 냈고, 사빈이 구사하는 영어가 이상할 때 지적하곤 했다. 사빈이 짐을 들일 때도 사빈의 물건이 많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아이랜드 남자들이 여자를 "씹년"이라고 부르는 걸 이상하게 여겨 그냥 아일랜드 관습이라고 설명했다. 사빈이 식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어줄 때도 그러려니 가만히 있었다.

'"당신, 여성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여성혐오자라는 거야?"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캐보면." 카헐이 말했다.
"뭐?"
"파보면'이 아니라 '캐보면'이라고." 그가 말했다.
"봤지?" 그녀가 말했다. "이것도 결국 똑같잖아? 당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요만큼도 봐주질 못하는 거야." ( p. 39)'

카헐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빈을 생각하며 말한다. "씹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하인리히 뵐은 죽으면서 자신의 집을 작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남겼다. 뵐 하우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주인공은 음식을 먹고 글을 쓰려고 하는 데, 독문학 교수라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뵐 하우스를 둘러보고 싶다는 그는 여주인공이 대접한 케이크도 먹고 대화를 나눈 다음 나가다가 한 마디 한다.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건데, 그런데 당신은 작가라면서 하인리히 뵐의 집에서 케이크나 만들고 있군요."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뭐라고요?"
"하인리히 뵐의 집에 와서 케이크나 만들고 옷도 안 입고 수영이나 한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매년 찾아오는데, 항상 똑같아요. 대낮에 잠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집이나 가고!" (p. 76)'


<남극>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며칠 동안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떠난 여자는 감옥을 개조한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끌리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당신한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남자가 말했다. "보살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 " (p. 92)'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남극을 경험한다. 침대에 묶인 채 어릴 때 생각했던 지옥, 반쯤 얼어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지옥을, 그곳에서 영원을 생각한다.


관계가 빠개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무리 친밀한 약혼녀일지라도 "씹년"이라며 여자를 혐오하거나 심지어 그녀에게 주는 건 뭐든지 아깝다고 생각하면 그 친하고 가까운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관계는 엉망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할 걸 상대방이 갖고 있다는 질투에 눈이 멀어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면 낯선 관계는 시작하지도 못한 채 깨져버린다.

아이들과 남편 뒤치다꺼리만 하는 부인이라면 어떤 한 남자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그런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꿈이 영원한 지옥이 되어 관계가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p. 7)'

옮긴이 허진은 10년씩의 차이를 두고 발표한 세 단편을 다양한 남녀 관계를 보여준 작품으로 묶는다. 남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는 한쪽 시각에서 보면 터무니없다. 내가 볼 때 혐오인데 다른 쪽은 그냥 관습일 뿐이다. 오만무례한 행동이 분명한데 한쪽에선 여성작가가 하도 한심해서 하는 충고다. 지금 현실이 행복하지만 또 다른 현실을 엿보려는 객기를 부려본 것뿐인데 그쪽에서는 자신이 꿈꾸던 현실로 끌어다가 묶어 놓는다.

한 쪽이 사라지거나 아님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갈 것이고 나는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지 걸어가면 된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냥 버스에 앉아 있기로 마음을 정하고 내가 평소에 알던 곳이지만 그 목적지로 가면 된다. 한 발은 버스에 걸치고 한 발은 버스 밖으로 내미는 건?... 그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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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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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눈을 쉬게 하려고 신문을 내려놓았고 생각에 잠겨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p. 119)'

스티븐슨 가족은 구월이 되면 시뷰라고 불리는 곳의 허깃 부부에게 객실을 빌려 보름 동안 휴가를 보낸다. 20년째다. 스티븐슨 씨는 그곳으로 가는 열차 안 맞은편 의자에 앉아 졸고 아내를 쳐다본다. 파란 서지 코트와 치마를 입고 있는데 벌써 이 년 전에 산 옷이라 어깨 부분이 바랜다. 아내의 흰 머리카락도 보인다.

스티븐슨 씨가 아내를 만난 건 회사 동료 톰의 여동생이 출연하는 뮤지컬에서였다. 우유 짜는 여자들 사이에서 아내는 황홀한 작은 미의 화신이었다. 신혼여행 때 세인트 매슈스 로드에 있는 허깃 부부 객실을 빌린 인연이 20년간 계속된 것이다. 아이들은 커서 메리는 곧 스무 살이 되고 딕은 열일곱 살, 막내 어니는 열 살이다.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허깃 부부의 객실도 변했다. 검게 변한 가스등 받침대, 닳고 닳은 서랍장, 무너질 것 같은 세면대, 해진 커튼의 가장자리 등등. 스티븐슨 부부가 자는 침대도 가운데가 꺼져 언제 베개 받침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은 객실이 우중충하고 끔찍할 정도 형편없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R. C. 셰리프의 <구월의 보름>은 스티븐슨 가족이 영국에서 가장 햇볕이 좋다는 보그너 레지스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부터 휴가 마지막 날까지 하루하루를 다룬 소설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계획에 흐트러짐 없이 휴가를 보낸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가족은 각자의 방법으로 소소한 행복을 찾아 휴가를 즐긴다.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는 가족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스티븐슨은 저녁을 먹은 다음 파이프 담배를 채우고 자신만의 조용한 길을 따라 걷는다. 스티븐슨 부인은 설거짓거리도 없고, 차려야 할 아침 식탁도, 닦아야 할 신발도,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한 시간을 앉아 그저 게으르게 보낸다. 메리는 남자 친구를 만나는 모험을 즐기고, 딕은 혼자 해변을 따라 나가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지난 일 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들에게는 객차 안에서 떨어져 앉았다가 함께 모여 앉는 것마저도 행복하다.


작가 세리프는 보그너 레지스에서 사람들을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가족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해 그들이 바닷가에서 연례 휴가를 보내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한다. 평범한 가족의 보름간 여름휴가 이야기,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여서 이 소설에 빠지게 된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p. 341, 342)'

확실한 윤곽이나 반전이 없어 지난 일이 희미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의 여름휴가 이야기처럼 나의 언젠가 보름을 떼어 놓으면 <구월의 보름>이 되는 것이다. 행복하다 여기고 감사하게 되는 그런 보름 동안 나날 말이다.

정리를 다루는 유튜브를 아내가 본 모양이다. 앨범을 정리해놓지 않고 죽으면 아이들에게 짐이 된다고 소리를 들었는지 지난 일주일 동안 앨범을 꺼내 놓은 사진을 떼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하면 계속 불러댄다.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이때 기억나?"
"우리 애들이 이렇게 귀여웠어~"

세월이 그때 그 일의 예리한 윤곽을 무디게 해놓아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날 하루가 몽땅 생각나기 시작했다. 사진을 보며 그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행복해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래서 앨범 하나 정리하는 데 하세월일 수밖에 없다.

'천천히 잡지가 그녀 무릎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남편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그들은 이렇게 앉았다.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이 말이다. 다른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 전혀 없었다. (p. 104)'

마주 앉아 본 적이 있었나? 마주 앉기는 했지만 각자 할 일을 했다. 밥을 먹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자세히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사진 가지고 수다 떨다가 앨범 정리하는 아내를 쳐다봤다. 나이보다 젊다는 소릴 많이 듣던 아내다. 게다가 늦게 결혼해 아이를 낳다 보니 또래 아이들의 부모 나이 취급을 받았다.

목에 주름을 발견했다. 흰 머리카락도 눈에 띈다. 나만 나이들은 줄 알았더니 조용히 나이 먹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큰 병을 앓거나 사고가 없어 눈여겨보지 않았던 아내의 모습,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아 아내가 한 말, 아내의 몸짓이 남아있지 않지만... 내 삶에 동반자로 살아줘서 내가 허물어지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지난날들도 스티븐슨 가족의 '구월의 보름' 같은 날들이었다.

'휴가지 해변에서 주워 모은 색색깔의 투명한 유리알들을 유리병에 고이 담아 코르크 마개로 봉해 놓은 다음,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유리알들을 한 알 한 알 꺼내 보며 거기서 발하는 따스한 빛에 용기와 위안을 얻는 것과 같은 그런... (pp. 454,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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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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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도 소개한) 2004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 떠오른다. 실존 인물인 이란 사람 메르한 카라미 나세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나세리는 난민 서류를 분실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번 터미널에서 18년을 지냈다.

영화 <터미널>에서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 국적이다. 그저 멋진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뉴욕으로 향한다.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크로코지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나보스키의 비자가 취소된다. 이때부터 미국에 입국할 수도 조국으로 귀국할 수도 없어 JFK 공항에 머무르는 악몽이 시작된다.

여권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지만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 놓기도 한다.


<여행 면허>는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사람들,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가능하게끔 만들기 위해 이들이 의존한 서류에 관한 내용이다. (P. 26)'

기원전에도 여권은 있었다. 여권은 우리 인류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또 여권은 어떻게 여행 꼭 필요한 것이 됐을까? 여권은 예술과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 정체성, 국가 권력, 국제적 불평등 문제까지 모두 여권에 반영돼있다. 이러한 여권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국경을 넘어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서 여행자는 반드시 여권이 진본임을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서류와 자신이 일치함까지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p. 41)'

1976년 초가을 프랑스 영토에 도착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최근 발급된 이집트 여권을 소지했다. 오래전 사망해 미라가 됐는데 왜 여권이 필요했을까. 신원이 확인돼야 유해 이송이 가능하다는 국제법, 생사와 관계없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프랑스 법률, 사망자조차 출국하려면 서류가 필요하다는 이집트 법률 등 그 이유가 다양하다.

츠바이크는 회고록에서 여권의 발달이 가져온 상실감을 서술하기도 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외국인 혐오증이 유행처럼 번져 각국 정부는 외지인을 점점 더 수상하게 여길 때였다. 정면과 좌우 옆얼굴 사진, 열 손가락 지문, 각종 증명서 등 범죄자를 떠올릴 정도의 굴욕이 여행자에게 부과된다고 츠바이크는 증언했다.

헤밍웨이는 여권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급하고 엉성하게 휘갈겨 쓴 탓에 유명한 'writer 작가'가 아니라 'waiter 웨이터'로 오인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중에 여권 발급처 앞으로 정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세계 난민 실상을 알리는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에서 아이웨이웨이는 수용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리아인 마흐무드와 여권을 바꾼다.

'이 교환은 여권 통제 의례를 신랄하게 패러디한 장면으로, 여권 소지자가 체류할 국민국가에 위협이 되는지 판정하기 위해 서류를 검사하고 소지자를 심문하는 대신,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여권, 자신의 신원, 자신의 시민권이라는 형태로 급진적인 환대를 표현한다. (pp. 266, 267)'


출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스마트 패스 서비스가 지난해 7월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작했다. 간소화와 편리함을 앞세워 여권은 점점 디지털로 변환될 것이 뻔하다. 디지털화는 신원 확인이나 국경 출입 과정 등에서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밀한 내 정보의 저장 및 공유를 더 많이 허용해야 한다.

디지털화된 개인 정보를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하는 움직임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을 거부하는 NSK 국가의 여권, 국경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세계업무기구의 세계 여권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반反여권' 움직임은 더 이상 여권에 '좋은'이나 '나쁜'이란 딱지가 붙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신체는 지나가게 하는 반면 다른 신체는 붙들리는 일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서류로서 말이다. (p. 368)'

어쩌면 보완과 효율성을 핑계로 진행되는 여권의 디지털화는 제2의, 제3의 나보스키를 만들어 공항에 가둬두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반反여권' 움직임이 있어 다행스럽다. 여권 디지털화에 제동을 걸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환대를 받기도 전에 개인 정보를 토대로 누구는 환영하고 누구는 거르는, 그런 통제에 여권이 사용된다면 더 이상 이동성을 보장하는 여권으로서 기능은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어느 누가 뉴욕 JFK 공항의 나보스키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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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뇌과학 - 치매, 암, 우울증, 비만을 예방하고 지친 뇌를 회복하는 9가지 수면 솔루션 쓸모 많은 뇌과학 11
크리스 윈터 지음, 이한음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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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조금 좁은 공간에 아내와 누워있는데 어떤 놈이 아내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왔다. '저리 가!'라고 몇 번을 소리쳤지만 들은 체 만 체 계속 기어 왔다. 안되겠다 싶어 있는 힘껏 그놈을 발로 걷어찼다. 옆에 자던 아내가 '아야~ 으이그 증말~'이라고 소리치며 날 밀쳐내고는 돌아누었다.

잠결에 미안하다고 널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까 하다가 아내가 돌아누었기도 하고 깰 자신이 없어 계속 잤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아니다. 의심스러우면 아내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수면의 뇌과학>의 저자인 30년 경력의 수면의학자 크리스 윈터에 따르면 내가 겪은 일은 이상한 수면 장애 가운데 하나로 '렘행동장애 REM behavior disoder'이다.

'램행동장애는 뇌가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호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나타난다. 그 결과 밤에 꿈을 꾸는 동안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p. 264)'


수면 문제에 시달리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 해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밝힌다. 제대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혹할만하다. 경험해 본 사람을 알겠지만 불면증은 고통도 심하지만 '이러다 내가 죽는 건 아닐까'하는 공포심이 더 대단하다.

'불면증은 잠을 잘 수 없는 상태가 아니며,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이 오지 않는 상태", "잠을 못 이루는 사실을 아주 많이 걱정하는 상태"를 뜻한다. (p. 159)'

우선 수면 문제에 대한 잘못된 속설과 믿음을 짚어가며 잠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흔히 '한 잠도 못 잤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잠을 잤는데 단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인간은 잠을 잔다'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부터 수면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수면 문제는 잠을 충분히 못 자는 문제와 너무 졸리다고 느끼는 문제,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해결을 위해 수면환경, 불면증의 증상과 원인, 심한 불면증의 위험성, 수면제에 대하여, 수면 시간표 짜는 법까지 차례차례 다룬다.


항상 옆에서 자는 아내에 따르면 회사 퇴직 후, 억울한 게 많아서인지 욕을 하는 등 잠꼬대가 심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나도 느꼈다. 몇 년 지나고 나니 회사 꿈을 그다지 많이 꾸지 않게 됐고 잠꼬대도 줄었다.

나처럼 억울해서, 밤 근무 때문에, 걱정거리가 많아서, 경기에서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것이 계속 떠올라서 등등 수면 장애를 겪는 사람이 3명 가운데 1명이다. 모두가 불면증을 앓고 있는 시대다.

앞에 소개한 나의 '렘행동장애'는 실제로 파킨슨병의 전조일 때가 많다고 한다. 이렇듯 수면장애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인가.
'희망적인 것은 수면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몸의 가장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p. 31)'

'수면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스포츠 스타, 군인들의 수면 코치를 맡아온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과학적으로 쉽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제 마음먹기에 달렸다. '렘행동장애'도 내 의지에 달렸다. 다만 시간은 걸릴 수 있다. 살찐 몸을 근육질 몸으로 만들 때도, 외국어를 익힐 때도 시간은 걸리지 않는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수면 문제를 해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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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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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시, 소설, 그림, 조각, 음악, 그 무엇이건 간에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이 고안해낸 그 어떤 장벽도 초월한다는 믿음으로 이 책을 썼다. (p. 6, 지은이의 말)'

퇴직 무렵, 그동안 읽지 못한채 책꽂이에 꽂아놓은 책이나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블로그 대문에도 써놓았듯이 내게 앞으로 남은 생을 책으로 채워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책을 읽는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친구가 되주었다. 두려움이라는 장벽이 퇴직 후 내 삶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들이 있어 그 장벽을 넘어 살아가는 중이다. 책이 맺어준 인연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해협 채널제도 건지섬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작가 줄리엣 에슈턴 앞으로 배달된다. 그 편지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멤버 도시 애덤스가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 앞표지 안쪽에 적힌 줄리엣의 주소를 보고 보낸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립니다. 런던에 있는 서점 이름과 주소를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찰스 램의 작품을 우편으로 주문하려 합니다. (...) 그의 유쾌하고 기지 넘치는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이 인생에서 엄청난 슬픔을 겪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p. 18, 19)'

이를 계기로 줄리엣은 건지섬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호기심을 갖게된다. 북클럽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 그들이 어떻게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견뎌냈는지 알게되고 그 이야기를 <타임스> 컬럼에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모저리 부인의 초대로 돼지고기 파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다 통행금지에 걸려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엘리자베스 메케너의 임기응변으로 탄생한 북클럽이다. 두 명의 회원들 제외하고 책을 가까이 했던 사람은 북클럽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통행금지령을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지섬 문학회 모임이 있었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에 대해 토론했는데 정말 유쾌한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죠, 혹시 읽어보셨나요? (p. 51)'

서간문 형식의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편지에는 건지섬 사람들이 독일군 점령하에 받은 상처가 담겨있다. 불안, 갈등, 질투, 굶주림 등 참혹한 현실, 그 가운데 사랑이 꽃피기도 하지만 이별의 아픔도 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시작된 북클럽은 고아가 된 그녀의 아이 킷을 돌봐주는 등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보살핌과 우정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유머와 따뜻함이 있어 더한 감동을 준다.


책이 맺어준 인연들과 다양한 채널로 책모임을 갖고 있다. 우선 그들과 평어를 사용하면서 나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차려입고 외출도 한다 (가끔 아내와 함께). 그들 덕분에 웃기도 한다. 나이든 사람과 말상대를 해주니 수다도 떤다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잘 안된다).

이 책이 탄생한 배경에도 '문학회'가 있다. 메리 앤이 1980년 건지섬을 다녀온 다음 20년이 지난 후 글쓰기 모임 회원들의 글을 쓰라는 재촉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씨앗이 됐다. 책과 책이야기를 나누는 북클럽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회원들이 절망적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진정한 유대의 힘을 보여줬듯이.

'건지섬 주민들이 독서를 은신처 삼아 독일군 점령기를 견뎌냈듯이 (p. 433, 애니 배로스가 메리 앤 섀퍼를 기억하며)' 나도 책을 사랑하는 책 친구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친구들, 책을 같이 읽는 책 친구들의 유대의 힘에 기대어 '60 이후의 공간을' 책읽는 기쁨으로 견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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