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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그는 잠시 눈을 쉬게 하려고 신문을 내려놓았고 생각에 잠겨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p. 119)'
스티븐슨 가족은 구월이 되면 시뷰라고 불리는 곳의 허깃 부부에게 객실을 빌려 보름 동안 휴가를 보낸다. 20년째다. 스티븐슨 씨는 그곳으로 가는 열차 안 맞은편 의자에 앉아 졸고 아내를 쳐다본다. 파란 서지 코트와 치마를 입고 있는데 벌써 이 년 전에 산 옷이라 어깨 부분이 바랜다. 아내의 흰 머리카락도 보인다.
스티븐슨 씨가 아내를 만난 건 회사 동료 톰의 여동생이 출연하는 뮤지컬에서였다. 우유 짜는 여자들 사이에서 아내는 황홀한 작은 미의 화신이었다. 신혼여행 때 세인트 매슈스 로드에 있는 허깃 부부 객실을 빌린 인연이 20년간 계속된 것이다. 아이들은 커서 메리는 곧 스무 살이 되고 딕은 열일곱 살, 막내 어니는 열 살이다.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허깃 부부의 객실도 변했다. 검게 변한 가스등 받침대, 닳고 닳은 서랍장, 무너질 것 같은 세면대, 해진 커튼의 가장자리 등등. 스티븐슨 부부가 자는 침대도 가운데가 꺼져 언제 베개 받침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은 객실이 우중충하고 끔찍할 정도 형편없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R. C. 셰리프의 <구월의 보름>은 스티븐슨 가족이 영국에서 가장 햇볕이 좋다는 보그너 레지스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부터 휴가 마지막 날까지 하루하루를 다룬 소설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계획에 흐트러짐 없이 휴가를 보낸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가족은 각자의 방법으로 소소한 행복을 찾아 휴가를 즐긴다.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는 가족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스티븐슨은 저녁을 먹은 다음 파이프 담배를 채우고 자신만의 조용한 길을 따라 걷는다. 스티븐슨 부인은 설거짓거리도 없고, 차려야 할 아침 식탁도, 닦아야 할 신발도,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한 시간을 앉아 그저 게으르게 보낸다. 메리는 남자 친구를 만나는 모험을 즐기고, 딕은 혼자 해변을 따라 나가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지난 일 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들에게는 객차 안에서 떨어져 앉았다가 함께 모여 앉는 것마저도 행복하다.
작가 세리프는 보그너 레지스에서 사람들을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가족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해 그들이 바닷가에서 연례 휴가를 보내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한다. 평범한 가족의 보름간 여름휴가 이야기,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여서 이 소설에 빠지게 된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p. 341, 342)'
확실한 윤곽이나 반전이 없어 지난 일이 희미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의 여름휴가 이야기처럼 나의 언젠가 보름을 떼어 놓으면 <구월의 보름>이 되는 것이다. 행복하다 여기고 감사하게 되는 그런 보름 동안 나날 말이다.
정리를 다루는 유튜브를 아내가 본 모양이다. 앨범을 정리해놓지 않고 죽으면 아이들에게 짐이 된다고 소리를 들었는지 지난 일주일 동안 앨범을 꺼내 놓은 사진을 떼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하면 계속 불러댄다.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이때 기억나?"
"우리 애들이 이렇게 귀여웠어~"
세월이 그때 그 일의 예리한 윤곽을 무디게 해놓아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날 하루가 몽땅 생각나기 시작했다. 사진을 보며 그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행복해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래서 앨범 하나 정리하는 데 하세월일 수밖에 없다.
'천천히 잡지가 그녀 무릎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남편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그들은 이렇게 앉았다.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이 말이다. 다른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 전혀 없었다. (p. 104)'
마주 앉아 본 적이 있었나? 마주 앉기는 했지만 각자 할 일을 했다. 밥을 먹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자세히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사진 가지고 수다 떨다가 앨범 정리하는 아내를 쳐다봤다. 나이보다 젊다는 소릴 많이 듣던 아내다. 게다가 늦게 결혼해 아이를 낳다 보니 또래 아이들의 부모 나이 취급을 받았다.
목에 주름을 발견했다. 흰 머리카락도 눈에 띈다. 나만 나이들은 줄 알았더니 조용히 나이 먹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큰 병을 앓거나 사고가 없어 눈여겨보지 않았던 아내의 모습,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아 아내가 한 말, 아내의 몸짓이 남아있지 않지만... 내 삶에 동반자로 살아줘서 내가 허물어지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지난날들도 스티븐슨 가족의 '구월의 보름' 같은 날들이었다.
'휴가지 해변에서 주워 모은 색색깔의 투명한 유리알들을 유리병에 고이 담아 코르크 마개로 봉해 놓은 다음,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유리알들을 한 알 한 알 꺼내 보며 거기서 발하는 따스한 빛에 용기와 위안을 얻는 것과 같은 그런... (pp. 454, 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