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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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노선을 따라가는 버스에 앉아 생각한다. 이 버스가 바닷가로, 숲속으로, 고즈넉한 들판으로 날 데려다주기를. 하지만 내가 그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 한, 내가 생각한 그곳, 그곳에 절대 갈 수 없다.


<너무 늦은 시간>
공무원 카헐은 약혼자 사빈이 왜 자신과 파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약혼반지를 찾는 기뻐해야 하는 날이긴 하지만, 추가 비용이 있다는 말에 주인이 호구로 여기는 것 같아 화를 냈고, 사빈이 구사하는 영어가 이상할 때 지적하곤 했다. 사빈이 짐을 들일 때도 사빈의 물건이 많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아이랜드 남자들이 여자를 "씹년"이라고 부르는 걸 이상하게 여겨 그냥 아일랜드 관습이라고 설명했다. 사빈이 식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어줄 때도 그러려니 가만히 있었다.

'"당신, 여성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여성혐오자라는 거야?"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캐보면." 카헐이 말했다.
"뭐?"
"파보면'이 아니라 '캐보면'이라고." 그가 말했다.
"봤지?" 그녀가 말했다. "이것도 결국 똑같잖아? 당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요만큼도 봐주질 못하는 거야." ( p. 39)'

카헐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빈을 생각하며 말한다. "씹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하인리히 뵐은 죽으면서 자신의 집을 작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남겼다. 뵐 하우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주인공은 음식을 먹고 글을 쓰려고 하는 데, 독문학 교수라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뵐 하우스를 둘러보고 싶다는 그는 여주인공이 대접한 케이크도 먹고 대화를 나눈 다음 나가다가 한 마디 한다.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건데, 그런데 당신은 작가라면서 하인리히 뵐의 집에서 케이크나 만들고 있군요."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뭐라고요?"
"하인리히 뵐의 집에 와서 케이크나 만들고 옷도 안 입고 수영이나 한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매년 찾아오는데, 항상 똑같아요. 대낮에 잠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집이나 가고!" (p. 76)'


<남극>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며칠 동안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떠난 여자는 감옥을 개조한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끌리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당신한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남자가 말했다. "보살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 " (p. 92)'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남극을 경험한다. 침대에 묶인 채 어릴 때 생각했던 지옥, 반쯤 얼어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지옥을, 그곳에서 영원을 생각한다.


관계가 빠개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무리 친밀한 약혼녀일지라도 "씹년"이라며 여자를 혐오하거나 심지어 그녀에게 주는 건 뭐든지 아깝다고 생각하면 그 친하고 가까운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관계는 엉망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할 걸 상대방이 갖고 있다는 질투에 눈이 멀어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면 낯선 관계는 시작하지도 못한 채 깨져버린다.

아이들과 남편 뒤치다꺼리만 하는 부인이라면 어떤 한 남자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그런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꿈이 영원한 지옥이 되어 관계가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p. 7)'

옮긴이 허진은 10년씩의 차이를 두고 발표한 세 단편을 다양한 남녀 관계를 보여준 작품으로 묶는다. 남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는 한쪽 시각에서 보면 터무니없다. 내가 볼 때 혐오인데 다른 쪽은 그냥 관습일 뿐이다. 오만무례한 행동이 분명한데 한쪽에선 여성작가가 하도 한심해서 하는 충고다. 지금 현실이 행복하지만 또 다른 현실을 엿보려는 객기를 부려본 것뿐인데 그쪽에서는 자신이 꿈꾸던 현실로 끌어다가 묶어 놓는다.

한 쪽이 사라지거나 아님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갈 것이고 나는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지 걸어가면 된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냥 버스에 앉아 있기로 마음을 정하고 내가 평소에 알던 곳이지만 그 목적지로 가면 된다. 한 발은 버스에 걸치고 한 발은 버스 밖으로 내미는 건?... 그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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