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여행자 권아람 기자의 에세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빨강 머리 앤」 의 저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자살로 추정되는 약물 과다로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앤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낸 저자는 그렇게 쓸쓸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을까? 온갖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빨강 머리 앤처럼 루스 모드 몽고메리는 상상의 힘을 펼칠 여력조차 없었을까?
저자 또한 새롭게 안 이 사실에 대해 놀라워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정한다.
📖 몽고메리가 앤이 아니듯, 몽고메리는 나도 아니다. 슬프지만 감정이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54p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사랑도 이루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옛 여인들은 이렇게 쓸쓸히 삶을 마감해야 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강인한 여성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있다.
스칼렛을 고전판 커리어우먼으로 생각하는 작가의 인식도 놀랍지만 작가가 스칼렛 뿐만 아닌 스칼렛의 엄마 엘런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부분 역시 흥미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칼렛에게만 집중하는데 작가는 왜 스칼렛의 어머니의 고향 서배너까지 찾아갔을까?
📖 엘런이 처음 타라에 온 날부터, 타라는 변화했다.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엘런은 농장 안주인으로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p.191)
From the day when Ellen first came to Tara, the place had been transformed. If she was only fifteen years old, she was nevertheless ready for the responsibilities of the mistress of a plantation.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같았다. 하지만 스칼렛의 어머니 엘런은 슬픔의 고향 서배너를 과감히 버리고 사랑 없는 결혼을 하지만 그에 맞춰 과감하게 변신한다. 슬픔에 헤어나오지 못했던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달리 상황에 맞춰 자신을 과감히 변신시킨 엘런. 그러고 보면 스칼렛의 강인한 피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부터 물러받은 게 틀림없다.
만약 루시 모드 몽고메리도 엘런처럼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가 있었다면 삶에 일말의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정녕 현실은 현실일 뿐 문학 세계는 허구인 것일까?
하지만 허구의 세계이면 어떤가?
우리에겐 허구의 세계로 현실의 세계를 이겨나갈 힘이 있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은 바닷가의 배경인 쿠바에서 작가는 노인의 한 마디를 생각한다.
📖 희망을 갖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그걸 죄라고 생각하지.


힘든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건 책 속의 한 구절들이 아닌가?
뉴욕,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애틀랜타 등 소설 속 작품들의 도시가 그녀들의 도시였다면 작가가 그 현장을 여행하면서 비로소 '나와 그녀들의 도시'가 된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빨강 머리 앤처럼 계속 상상의 의미를 품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스칼렛 오하라의 어머니 엘런처럼 상황에 맞춰 불사조처럼 살아 가겠다는 뜻이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이며 이 문학여행 에세이는 독자들을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이 책을 읽고 내 안에 여행 욕구가 타오른다. 그 전에 다시 수록된 책들을 찾아 꺼냄으로 그들을 찾아가기 전 책으로 그들을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책이 책을 부르고 여행을 부른다. 이 책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