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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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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는 삶을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순서나 차례'(43)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중 인물들은 모종의 상실로 인해 이 질서를 잃어버린 듯하다.

환상과 현실이, 독백과 말풍선의 구분이 모호하다. 갑작스럽게 만나고, 헤어지고, 인사하고, 대화하고, 이윽고 사라지기도 하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실재하는 일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오직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만이 선명하다. 신기루 같은 이 소설집은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생각하다가 모든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꿈, 햇빛, 걷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서 재독했다. 그러자 애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꿈속에서 나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고 살 수도 있었다. (94) 그러나 현실에서는 죽은 자가 있는가 하면 산 자, 살아가야 하는 자 또한 있는 법이다. 석용은 유림의 꿈을 꾸며 말을 걸고 싶어 한다. 노인은 딸에게 늦게나마 되묻는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상대를 떠올리고 또 다른 가능성을 상정하는 마음이란 그리움이 아닐까. 그들의 파편을 따라 걷는 일이 애도가 아닐 수 있을까?

이미지와 이미지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중첩되는 느낌을 받았다.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의 친구 유림과 쓸 수 있는 대답의 유림이, 빛 가운데 걷기의 아이와 외출의 화자가 동일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었는데, 자살을 그만두기로 했던 유림이 어떤 이유로 견디는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인지, 할아버지의 시선을 통해서만 비춰지던 아이가 발화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서울과 오아시스,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결합이 잘 어울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써 삶을 조명한다. 작가는 햇빛 아래에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공포스럽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언제까지고 햇빛을 맞고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단어를 열거하는 방식이 자주 사용되는데 소설에서 운율이 느껴진다는 점과 문장의 시각화가 뛰어나다는 점이 좋았다. 특히나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은 자주 접했던 소설의 형식을 탈피한 단편으로 독특했고. 신선한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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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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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세일>


장례식장에 근무하는 화자는 투병 생활 중인 아버지의 죽음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계약직 근로자인 그가 직계가족 할인이라는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 가족의 죽음을 바란다거나 그 죽음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속내가 자칫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았는데, 빈틈이 없는 이야기란 이런 작용을 하는구나 느꼈다. 장례 세일이라는 명료한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지 않다. 죽음에도 돈이 요구되고 가치가 매겨지는 오늘날, 그리고 그것이 장사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고 장례 시스템이 거기에서부터 운용되고 있음을 관철할 수 있었다. ’죽음 비용‘과 ’사람답게‘ 죽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비용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지만 단순히 돈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과 장례식을 둘러싸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배경으로만 사용되는 게 아니라는 것. 아버지의 죽음을 세일즈하며 죽음의 가치 비용을 고민하는 화자를 좇다, 말미에 가서는 이런 소설과 이런 고찰을 설계한 작가야말로 진정한 세일즈맨이 아닌가 싶었다. 박지영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른 작고 얇은 이야기를 층층이 쌓아 올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성공적이라는 것은 아주 공들여 적었거나 작가가 정말이지 유능하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오늘날 장례 의식의 허를 찌르는 글 같다.


<허리케인 나이트>


나는 허리케인을 맞닥뜨리며 오래된 동창 피터의 도움을 받는다. 피터, 다른 이름으로 용준의 아무 때나 연락하라는 말로부터 시작되는 이 조우는 그는 아무 때나 연락해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인 반면 나는 아무 때나 연락조차 편히 할 수 없는 사람인 듯한 대비감을 시사하는 듯해 시작부터 재미있었다. ’앎‘의 세계에 진입하는 일은 때로 당혹스럽고 불편스럽다. 금호동에 거주하던 내가 외고에 진학하면서, 피터와 여행을 떠나면서, 그의 생활권에 잠시간 머무르며 느꼈던 것처럼. 작가는 허리케인을 마주하는 현재와 학창 시절을 교차해 보여 주며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러나 말하지 못하는 불편함에 대해 성공적으로 이야기한다. 허리케인과 밤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연상케 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다소 상투적이고 진부할 수 있다는 것이 지난 나의 생각이기도 했는데 이 우려를 딛고 재미있게 읽은 소설. 어떤 생각은 상흔을 남긴다. 자리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이 흔적을 남기듯이.


때때로 어떤 이야기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되는데, 수상작인 바우키스의 말이 그랬다. 이 소설은 감각하면서 읽었기에 덧붙일 코멘트가 많지 않지만...... 모든 어휘가, 문장이 유려했다. 자주 등장하는 ’어휘‘라는 단어가 소설의 정체성과도 같다고 생각할 만큼.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제대로 읽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다채로운 글이 실려 있어서 좋았고, 전반적으로 생각할 지점들이 많은 소설집이라 언젠가는 파고들며 사유하고 싶다. 최근 읽은 수상작품집 중 가장 다채롭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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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는 사랑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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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 노라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해 대립한다. 그들에게는 불투명한 계약 여부와 커리어 단절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연애 시절부터 서로간 느꼈던 극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소설은 점진적으로 보여 준다. 이때 가사도우미 A 부인이 등장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가 병마가 싸우게 되며 한시적 평화에 그친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내밀한 속사정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나 A 부인은 결코 가정의 구성원은 될 수 없다. A 부인의 집에 초대받았을 당시 내가 묘한 계층 차이를 떠올리고 그녀가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했을 때 노라가 성가심을 느꼈다는 대목이 그 사실을 알린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듯 외부인에 불과한 A 부인의 부재가 이들 가정이라는 내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A 부인이 없는 그들은 일촉즉발의 상태 같다. 그 변화와 미세한 균열을 좇으며 읽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A 부인은 우리를 하나로 잇는 유대감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중략) 그녀의 시선 없이는, 우리는 위험에 빠진 기분이었다. (36)


증명하는 사랑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예상을 빗나가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사랑에 대해 기술하는 내용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아니었다. 공식 하나 없지만 마치 풀이 과정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 대해 증명하고 만다.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고도, 사랑으로 사랑에 도달한다.


보기 드문 강렬함이 존재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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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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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나는 믿어요."


권은과 승준의 관계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점차 확장되어 그물망처럼 이어져 있는 공동체의 세계를 조명한다. 평소 조해진 작가가 나라는 존재를 넘어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의 생애를 들여다보도록 만드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 빛과 멜로디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미련하다. 본인의 집을 선뜻 내어주는 것부터 그로 인한 빚을 갚아나가기도 하고,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헌신한다. 개개인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요즘 이러한 희생은 낯설고 허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빛과 멜로디는 계속해서 말한다.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작은 카메라로도, 악보 한 장으로도.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동시에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인간됨을 벗어나는 구호품 트럭 피격이나 유대인 등록령, 각종 전쟁 언급과 홀로코스트, 인티파다가 언급될 때에는 참담했고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던 일이자 현재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처참했다. 특히나 게리 앤더슨이 화자로 등장하는 챕터에서 울컥했는데, '자신의 생존과 누군가의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170) 생각을 나 또한 자주 하기 때문이다. 늘 누군가에게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당장 내가 그처럼 전쟁터에 내던져진 상태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안전 수칙이나 관련 법규는 어떤 희생으로부터 제정되고는 하고, 나는 동물과 자연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편리하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선한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닌 

참담함을 적확히 바라보게 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는 점이 나는 슬프고도 좋았다.


무엇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가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나스차는 걱정이 많았다. (중략) (225)


무엇보다도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가늠할 수 없는 피해를 만들어내는 전쟁의 참혹함, 인간의 도리를 포기하는 잔혹한 방식, 그 그릇됨에 대해서.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온기가 줄곧 세상을 지속해왔다. 그런 것들이 우리라는 공동체와 세계를 결속시켜 왔다는 사실을 읽으며 떠올렸다. 이런 온기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닌 잠시 잊힌 것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사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과 그 기적 같은 일이 곳곳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책을 통해 봤다. 작은 희망을 시사하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해진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던 날 독서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의 족적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기록했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워서 마다할 도리를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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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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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정 작가가 그려내는 감정은 마치 잘 벼린 칼날 같다.

각기 다른 열 편의 이야기지만 줄곧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느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욕망하며, 욕망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의 끝에서는 그것을 모방하고자 한다.
그 시도는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체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들이 무언가를 선택할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단일한 선택지를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 의문을 ’불평등‘이라는 키워드로 제기한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소 광적일 만큼 그의 배우자와 가정을 부러워하는 희진이나 자연의 순리인 나이 듦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원희, ’꺄흐띠에‘를 좇는 한나 등 그들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시기나 질투심, 열등감 등 많은 표현이 존재하지만 위수정 작가가 그려내는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그 무엇도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좋았는데! 화자가 고주완에게 느낀 것이 말 그대로 끌림이었다는 것, 다른 것이 아니라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매료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사실 그런 유의 끌림은 물리적인 거리든 비유적인 거리를(이를테면 나이처럼) 초월해 이루어지지 않나. 60대의 나이를 가졌더라도, 남부럽지 않을 평화로운 일상을 가졌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나이 듦‘은 욕망을 거세시킨, 즉 욕망의 부재로 꾸며낸 모습이었는데 원희는 젊은 무리를 보며 그들이 무지하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이게 얼마나 인간적인지.

스치듯 읽은 소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 읽었던 위수정 작가의 단편 몇 편이 그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이렇게나 첨예한 문장을 소설집으로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작가가 이야기로 보여주는 죽여야 하는 마음, 있지만 볼 수 없는 것들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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