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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사람들 -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매튜 데스몬드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평점 :
최근에 ‘기회의 평등’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정치 이야기할 때 끊임없이 이 담론이 등장한다. 기회의 평등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기회가 보장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동등하게 기회가 보장되는 것’에 대해서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다. 나는 이것이 형식적 기회의 평등과 실질적 기회의 평등으로 대변된다고 생각한다.
형식적 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를 신뢰한다. 이 입장에선 세상은 원래 자유롭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이나 제약은 부정된다.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역량을 발휘하면서 각자의 기회를 누리면 된다.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탓이며, 이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개입은 공정성의 훼손을 의미한다.
반면 실질적 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외부의 개입을 중시한다. 인간은 모두 다른 배경과 능력을 갖고 있다.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개인마다 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풍족한 환경과 뛰어난 실력이 뒷받침돼 손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신체적 제약이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기회를 누리는 데 많은 장해물이 있다. 실질적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장해물을 제거하거나 넘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회의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실질적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아무도 갈 수 없는 섬에 ‘기회’라는 물건을 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섬에 갈 수 있는 길까지 보장돼야 한다. 그 길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휠체어를 타 사람에겐 폭이 넓은 다리가 적합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에겐 자동 움직이는 다리가 보장돼야 한다. 갈 수도 없는 길을 만들어 놓고 균등한 기회의 보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기만에 불과하다. 즉 개인이 이 기회를 선택할지 말지를 결정해야지, 상황이 개인으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기회다. 적어도 돈은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돈이 필수적이다. 돈이 없으면 새로운 걸 시작할 수도 없고 실패했을 때의 타격은 어마 무시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조심스러워한다. 예컨대, 어떠한 사람들은 경제적 타격 없이 자식을 사교육을 시키거나, 해외로 어학연수를 보낼 수 있다. 그들은 교육 기회의 평등이라고 여겨지는 학교 교육에서 높은 성과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의 자식들은 혼자만의 힘으로 그들을 따라잡아야 하거나 낙오될 수 있다. 이 성과는 그대로 학벌이라는 표지로서 사회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교육에서 높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오로지 학생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누구는 가난하더라도 개인의 능력이 출중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가난한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입장에 의문이 되는 것은 같은 기회를 누리는 것에 개인마다 쏟아야 하는 힘의 차이가 다르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다. 같은 걸을 하더라도 누구는 어떤 기회비용 없이 쉽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을 걸기도 한다. 이것이 정말 당연한 현상인가.
나는 부모님의 보호막 아래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으면서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성인이 돼서 우리 집이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까지 누려오던 것이 부모님의 무조건적 희생 덕분이었다. 그들은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했다. 엄마는 농사, 요양사, 식당 알바, 냉이 캐기, 도토리묵 팔기, 포도 즙, 칡즙 팔기, 각종 부업 등의 일을 했다. 그 결과 엄마는 지금까지 5번의 대수술을 했다. 또 아빠는 직장을 다니면서 농사, 주식 공부를 틈틈이 했다. 정년퇴임 전 몇 년 동안은 장례식장에서 시체를 옮기는 일까지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게 한 교육적 지원도 못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지 않은 부모에 대해 비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했지만, 나는 어느 누구도 이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가난의 실체를 보지도 않은 채 ‘기회는 널려있다’라고 무책임하게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 기회를 넘볼 여유가 전혀 없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무조건적 희생이 없다면, 그저 하루하루 버티기에만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의 자식 세대로 재생산되겠지.
‘쫓겨난 사람들(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들)’은 미국 밀워키 지역의 절대 빈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에 처해있고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통계수치로는 알 수 없는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증언이다. 그들은 밀워키의 이동식 주택에 살고 있으며,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집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린다. 하지만 저자인 매튜 데스몬드가 서술한 가난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매튜 데스몬드는 문화 인류학의 연구 방법인 기술자를 활용해 밀워키의 절대 빈곤에 대해 연구를 한다. 그는 수년간 그들과 머물며 유대감을 쌓으며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을 관찰하고 면담한 기록이 약 5000쪽에 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연구를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의 풍부한 사회학적 지식과 통계 자료는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누구는 이 연구가 우리나라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가난이 만연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책에 서술된 것처럼 우리 사회는 부자가 빈자를 ‘활용’해 돈을 버는 것이 정상적이다.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시대에 절대로 우리의 관심이 ‘부’에게만 집중을 해선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선 빈자에 대한 신경과 더불어,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시도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의 측면에선 가난을 무시하는 것이 개인에게 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구조적인 측면에서 언젠가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가난으로 인해 생기는 무력감이 나에게 절실히 다가왔다. 교육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부터 효능감을 빼앗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걸 막아버린다. 생산적인 일을 하기보단 하루하루 버티는 것에 의의를 둔다. 장기간의 의미를 추구하기보단 지금 현재의 쾌락에 집중하게 된다. 학습에 무기력한 아이들 역시 외와 비슷한 현상을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공부해도 다른 아이들보다 못하니까. 공부를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다.’ 등의 무기력함이 학습을 방해하는 상황이 상상된다. 가난은 더욱 이러한 생각을 강화하겠지.
사회는 발전하고 풍족해지는데, 이러한 절대 빈곤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의미겠지. 성장도 좋지만, 분배에 대해서도 당연히 여기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부로도 절대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아직은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다. 분배를 위한 정책을 위해서 힘들고 긴 투쟁이 지속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 투쟁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한 건의 퇴거는 퇴거당한 가족이 원래 살던 구역뿐 아니라 마지못해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구역까지 여러 도시 구역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강제 이주는 이주의 속도를 높이고 원망과 투자 회수의 속도를 훨씬 더 빠르게 가속화하여 제이스가 말한 "영구적인 슬럼"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영구적인 슬럼의 핵심 고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고 그와 동시에 거길 빠져나가겠다는 꿈을 꾼다는 데 있다.
가난한 흑인 동네 출신 남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투옥이었다면,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퇴거였다. 가난한 흑인 남성들은 잠긴 문안에 갇혀 살았고,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잠긴 문밖으로 내 몰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족은 더 이상 믿을 만한 지원군이 아니었다. 중산층 친척들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아예 도 울 생각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가난한 친척들은 큰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가난하거나 다른 문제가 있거나 [술이나 마약 같은 데] 중독된 상태에 있곤 했다. 법적인 문제 역시 골치였다. 크리스털은 이 때문에 로다 아주머니가 자신이 더 이상 위탁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자신을 돌려보낸 거라고 믿었다. 로다는 아들의 마약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발견되는 바람에 기소되어 2년 동안 보호관찰을 당하는 중이었다.
퇴거 그 자체는 왜 어떤 가정은 안전한 동네에 사는데 어떤 가정은 위험한 동네에 사는지, 왜 어떤 아이들은 좋은 학교에 다니는데 어떤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는지를 종종 설명해 주었다. 강압으로 집에서 쫓겨난 트라우마와 퇴거 기록이라는 오점, 그리고 새로운 거처로의 힘들고 황급한 이사는 퇴거당한 세입자들을 더 침체된 위험한 지역으로 내몰았다.
퇴거는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아이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주 안정성은 일종의 심리적 안정성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자신의 집과 사회적 관계에 투자할 수 있게 하고 학교에서의 안정성으로 이어져 아이들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졸업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며, 지역사회 안정성으로 이어져 이웃들이 강력한 유를 형성하고 자신의 구역을 돌볼 수 있게 독려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워낙 빠른 속도로 퇴거를 당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거의 누리 지 못 한다. 저소득 가정들이 이사를 자주 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퇴거를 경험했던 노동자가 해고를 당할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15퍼센트 정도 더 높다. 주거 불안이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경우 이는 집에서 쫓겨나면서 쌓인 스트레스와 그 소모적인 성격이 직장에서의 업무 수행 능력을 짓밟아놓았기 때문일 수 있다. 퇴거당한 가족들이 공공 주택의 수혜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택당국이 신청서를 검토할 때 퇴거와 부채를 감점 요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결과 주택 원조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월세 부담을 진 사람들과 퇴거당한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그 원조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밀워키에서는 비자발적인 이사 경험이 있는 세입자들의 경우 그보다는 덜 어려운 환경에서 이사한 유사한 세입자들과 비교했을 때 장기적인 주택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25퍼센트 더 높았다. 또한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가족들은 가난한 동네에서 더 가난한 동네로, 우범 지역에서 그보다 더 위험한 지역으로 꾸준히 달갑잖은 동네로 밀려간다.
퇴거는 한 사람의 정신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강제 이주의 폭력성은 사람들을 우울증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다. 최근 퇴거를 경험한 아이 엄마는 두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여러 만성 우울증 증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퇴거 경험 이 없는 유사한 수준의 엄마들보다 두 배 더 많은 수치다. 수년이 지 난 뒤에도 퇴거 경험이 있는 엄마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엄마들보다 행복 지수와 낙천성, 활기가 떨어진다. 일군의 정신과 의사들은 일부 환자들이 퇴거를 며칠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정신의학 서비스>에 퇴거를 "자살의 의미 있는 전조"라고 지목하는 편지글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