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개고기를 먹었고 최근에도 먹었다. 아빠가 개를 도살하는 장면도 본 적이 있고, 엄마가 개를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곁에서 지켜봤다. 개를 도살하는 장면은 어린 시절 봤지만 생생하다. 때리고 불로 지지는 잔인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당시엔 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기를 먹으려면 동물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 집은 식용을 위해 닭, 염소, 오리 등을 많이 키웠으니 동물을 죽여 고기를 얻는다는 것이 익숙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을 벗어나 도시에서 삶을 시작하면서, 개고기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부정적이란 걸 경험했다. “윽. 개고기를 어떻게 먹어.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개고기를 소고기라고 속여서 먹었는데 그날 내내 울었잖아. 사람들은 개를 도대체 왜 먹는 거야? 어떻게 예쁜 개를 먹을 수 있지” 등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또한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미개하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식문화라나?

그들의 입장에서 개는 닭, 돼지 등과 같은 식용 동물과 다른 존재다. 개는 인간과 평생을 같이 하는 반려동물로서 결코 먹을 수 없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겐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자신의 친구를 먹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그들의 입장에서 미개해 보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동물 단체에서 ‘개 도살 금지, 개 농장 폐쇄’ 등을 외치고 있다. 종종 길거리에서 서명 운동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식용 동물과 반려동물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가? 반려동물의 옹호자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애초에 야생의 상태가 없고,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 살았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반려동물, 식용 동물 모두 인간이 필요에 의해 길들인 존재에 불과하다. 모든 동물들은 자연 상태가 있었으며, 인간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 동물이 식용인지, 반려동물인지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해왔다. 같은 동물도 인간의 결정에 의해 식용 동물이 될 수 있고, 반려동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는 반려동물이기 때문에 먹어선 안 된다는 주장은 개의 자연 상태를 거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개를 먹었던 것은 단순히 ‘미개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이야 우리나라가 풍족해 고기를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이는 최근에서야 가능한 이야기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고기를 마음껏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 시절엔 각 가정에서 가축을 키우고 잡아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또한 농경이 주를 이루던 시기에 소는 식용보다 노동력의 가치가 더 컸다. 그들을 먹는 것은 막대한 노동력을 잃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단백질 보충을 하는 수단이 다양해 고기를 먹지 않아도 쉽게 살아갈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사시사철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것도 한몫한다. 하지만 과거엔 저장 및 재배 기술이 많이 발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소가 나지 않는 시기엔 단백질 섭취를 고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동물이 살아있는 동안은 고기가 상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단백지 보충을 위해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미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복날에 삼계탕, 개 보신탕 등을 먹는다는 날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고기 섭취를 많이 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아닐까?

https://n.news.naver.com/article/448/0000279645

나는 인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고착됐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다. 문화를 자연화하고, 그것들이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묻지 않는다. 자신 문화의 관점에서 그 문화를 바라보고 평가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문화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문화엔 이유가 있을 거라 확신한다.

위의 개고기 사례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문화에 대해 가치 평가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그 문화가 형성된 전체 맥락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들이 체득한 문화 감수성에 의해 직관으로 이뤄진다. 그저 ‘좋다, 안 좋다.’ 등으로 타문화를 평가할 뿐이다. 야생동물을 즐겨 먹는 중국인들의 식생활에 대해서 내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시선만 봐도 우리가 타문화를 어떠한 자세로 평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화를 자연이나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단순하게 겉만을 보고 평가해선 안 된다. 이 문화가 만들어진 배경과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합리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필요하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77/0004613566

‘문화의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문화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연구를 담은 책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문화는 없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다. 특히 책의 저자 마비 해리스는 문화가 형성된 원인을 정신 등과 같은 추상적 대상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문화 현상을 분석하는 것을 거부하며, 실재적 대상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분석한다.

문화의 원인을 찾기 위해선 끊임없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 문화의 외관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왜’와 ‘어떻게’를 꾸준히 물어야 한다. 이 책 역시 단순 현상으로 그칠 수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마빈 해리스는 질문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 책에서 다루며 이를 문화의 수수께끼라고 부르고 있다.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숭배할까? 이슬람 민족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뉴기니 원주민들이 화물 숭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녀 차별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일까? 중세 시대에 마녀사냥은 왜 성행했을까?’ 등과 같은 수수께끼가 이 책에서 풀어진다.

특히 암소 숭배와 마녀사냥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왜 인도인들은 굶어죽으면서까지 암소를 숭배하는가? 암소의 수가 필요에 비해 엄청 많고 많은 목초지를 파괴하는데도 이를 방치해두는 것은 외부인의 시선에선 비합리적이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지금 존재하는 소의 수를 줄인 후 그것들을 제대로 키우면 같거나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환경파괴도 덜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 소유의 소를 가장 먼저 줄일까? 마빈 해리스는 부자들의 소가 아닌 빈자들의 소가 그 대상이 될 것이라 말한다. 현재처럼 소의 개체를 조절하지 않고 숭배하는 것은 부의 분배 기능을 하는 것이다. 또한 농경 사회에서 소는 노동력의 중요한 일부다. 기아로 인해 소를 잡아먹으면, 다음 농사는 소의 부재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기아로 굶주리면서 소를 잡아먹는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인도인들은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를 신성시하는 집단 문화를 만들어,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암소 숭배는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 에너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현재 마르고 여윈 것들이지만, 조금은 쓸모가 있는 짐승들을 보존함으로써, 에너지 소비적인 쇠고기 산업을 억제함으로써, 공공 구역에서 혹은 주인의 비용으로 살찐 소를 보호함으로써, 한발이나 기근이 들 때에도 소가 지니고 있는 회복 능력을 보존함으로써, 암소 숭배는 인간 집단이 환경에 대한 탄력 있는 적응력을 지닐 수 있게 이바지하고 있다.

지금 보면 마녀 화형이 잔인하고 비정상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를 견고히 하기 위해 마련된 수단이란 걸 아니 비정상적인 문화라고만 평가할 것이 아니다. 중세가 후반기로 나아가고 있을 때, 기독교의 부패는 지극히 심각했다. 많은 사제들이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부패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의 종교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무너진 신뢰를 쌓고, 공동체를 견고히 했어야 했다. 그래서 외부의 적을 만든 것이다. 악마와 계약을 하는 마녀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듦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더욱 의존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한 개인이 마녀로 잡혀 들어오면, 그들은 다른 마녀의 존재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들은 고문을 통해 자신이 마녀임을 자백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마녀로 몰고 간다. 이는 백성들이 서로를 불신하도록 해 종교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방지했다. 즉, 백성들이 맹목적으로 종교에 의존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하기 위해 마녀 화형이 활용된 것이다. 종교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마녀들의 농간에서 벗어나게 해줄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란 확 심을 심어주기만 하면 됐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났지만,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의 희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마녀 광란은 ‘결함이 있는 제도의 구조적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반대로 그 제도적 구조를 방어하는 필수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점은 그 당시 마녀 광란의 안티 테제를 이루었던 전투적 메시아니즘과 마녀 광란을 비교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을 다 합 시켰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그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를 줄일 수 있는 집단 소명감을 주었고 서로 형제자매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이 사상은 유럽 전역의 대중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그들의 에 너지를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로 집중시켜 무산 영세 대중과 사회의 정상에 있는 자들의 대결을 유도했다.

이와 반대로 마녀 광란은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잠재 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녀 광란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을 소외시 키고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켰고 무기력하게 했다.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 책을 통해 타문화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대상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좋고, 나쁘다.’ 등의 평가는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껏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했다. ‘왜 내가 좋게 평가하는지. 그 대상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는지. 내가 나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묻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문화를 자연화했던 것 같다. 문화가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 품어야겠다. 또한 그 속에서 그것의 토대가 된 합리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이 나라는 이러한 문화를 갖고 있대. 우리와 다르지.’와 같은 감상이나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샅샅이 탐구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마지막 장에 작가는 반문화 주의로 대변되는 히피 문화를 비판한다. 그들이 정신적이고 형이상적인 대상에서만 행위의 이유를 찾는다는 것이 주요 논지다. 난 마빈 해리스가 갑자기 왜 이러한 비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어떠한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피들이 실재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에서 행위의 이유를 찾으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들이 이러한 문화를 갖게 됐는지, 지금껏 자신이 보여준 사례들처럼 유물론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활 양 식의 배경에 감춰진 원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주된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대답은 신밖에 모른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여러 관습과 제도가 그토록 신비스럽게 보였던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문화의 여러 현상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정신화'해 설명하는 것에 더욱 큰 가치를 두도록 교육받아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면밀히 고찰한 각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들이 실제 주위 환경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현상 한길그레이트북스 23
테야르 드 샤르댕 지음, 양명수 옮김 / 한길사 / 199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비 유학을 준비하면서 원진숙 교수님께서 당신의 박사 학위 과정 이야기를 해주셨다. 교수님께선 박사 과정생으로 있으면서 이화 여대에서 강사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 시절 교수님의 대학에서 이화여대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어두컴컴한 터널 속이 교수님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막연한 미래를 위해 매일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공부를 해나갈 것 아셨기에 교수님께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터널이 끝나는 것처럼, 언젠가 공부도 빛을 보기 마련이니.’ 나 역시 공부를 하다가 막연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고 힘들어할 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감에 함몰돼 공부의 여정을 중간에 포기하면 빛을 볼 가능성을 아예 사라진다. 빛이 보이기 전까지 내가 어떠한 발전과 변화가 있었는지 보지 못하지만, 터널을 통과한 후 돌이켜 보면 참 많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성장 기간 없이 어떤 깊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역사다. 그러나 그러한 기간이 일단 지나면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거대 분자의 시기는 단순히 우리가 그린 지속의 도표에 한 부분을 장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어떤 임계점과 같은 것이다. 또 그것은 세포의 출현으로 초기 진화 질서에 단절이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영역에서든’ 정말 새로운 것이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장차 활짝 꽃 피었을 때에야 그것을 알아보고 처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종자와 첫마디를 찾으러 나서도 첫 단계란 항상 감추어져 있고 파괴되어 있고 잊혀 있다.

샤르댕의 ‘인간 현상’을 읽으면서 원 교수님의 조언이 겹쳐 보였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변화의 과정에 있다. 하지만 이 변화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외관상 변화가 있을 때에만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샤르댕은 우리가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불렀다. 즉 조그만 변화들이 모여 전혀 새로운 것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세상을 알아가고, 이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식과 생각의 축적이 아니라 이를 통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가 중요하다.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면서 나 역시 조금씩 변할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나 자신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이때 나는 공부에 대한 회의와 무기력감에 빠져 이를 포기할 수 있겠지. 하지만 원진숙 교수님과 샤르댕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가 눈에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순간에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변화에 대한 몸부림이 바탕이 됐을 때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샤르댕은 신학자인 동시에 지질학자, 생물학자다. 신학과 과학은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샤르댕의 이력은 낯설다. 특히 생물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학문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창조론을 옹호하는 기독교의 전통과 이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샤르댕은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옹호했다. 이는 목적이 있는 진화로 다윈의 진화론과 별개이며 기독교에서도 수용 가능한 입장이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과 달리 진화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은 우연에 의해 생명체가 진화한다고 말하지만, 샤르댕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진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과학이 반박 불가능한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란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현상들의 표면만을 다루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그 이면을 살피는 학문이다. 이면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해석을 통해서만 ‘추측’할 뿐이다. 즉, 인간이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에 자신을 투영해 얻어낸 ‘결론’이 모여 과학을 이루는 것이다.

샤르댕 역시 과학자로서 자신이 관찰한 현상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주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다르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추적하는 과정이니까. 샤르댕은 진화의 대상을 생물을 넘어 정신으로 바라본다. 정신은 또한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존 진화론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물이 진화한다고 보지만, 그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정신적 진화를 통해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그 정신은 하나님과 연결돼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진화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또한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지금껏 인간 문명을 풍성하게 하고, 학문 세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샤르댕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중심을 인간으로 설정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관찰하는 것엔 인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벚꽃이 흩날리는 길거리에 서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은 다른 것을 다르게 볼 것이다. 나는 벚나무를 본다. 내 친구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겠지. 다른 친구는 우리를 바라보겠지. 이렇듯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먼저 주관에 따른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해서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어떤 현상을 우리와 동떨어진 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런 낮은 믿음은 나름대로 필요하긴 하지만 역시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아무리 객관에 따른 관찰도 처음부터 어떤 약속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연구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이룩된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면, 과학자들이 얻어낸 연구 결과가 정말 연구 대상을 밝힌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전에는 사물 바깥에서 사물과 관계를 형성해서 무얼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관계의 그물 안에 그들 자신의 몸과 얼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지질학 식으로 말하자면 변성작용과 내성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 작용 안에서 객체와 주체는 결합하여 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좋건 싫건 간에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드러나고 보이는 것이다.

샤르댕은 정신의 중요성과 함께 사랑을 토대로 한 공동체를 중시한다. 요즘 ‘개인주의야?’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다. 마치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란 듯이 말이다. 샤르댕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 원자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랑을 바탕으로 개인주의가 이러한 부정적인 성질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존 듀이의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의 핵심 주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현대인의 노력이 이론과 달리 또 기대에 어긋나게 의식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길을 취했는가? 물질을 늘렸다.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 어떤 사회 계급이나 뒤떨어진 민족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가 하는 노력이란 것이 아직도 그런 것들뿐이다. 모두 기계화하려는 것뿐이다. 하긴 기계화된 동물 사회의 뒤를 이어 기계화된 인간 사회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놀타 일이 아니다. 사탐의 지성이 과학을 일으켰지만 그 과학마저도 (순전히 사변이고 추상인 한) 사람의 얼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관계는 아직 겉돌고 그래서 더욱 노예화될 수도 있다……. 오직 사랑만이 개체들을 하나 되게 함으로써 개체를 완성할 수 있다. 사랑만이 속 깊은 만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을 상대에게 내주지 않고 어떻게 상대를 완벽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남과 하나가 되면서 ‘내가 된다는 모순된 행위를 실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그런 일이 매일 여러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면 어느 날 전 지구 차원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샤르댕이 말하는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율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을 중심으로 둔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에선 개인은 존중받지 못한다. 개인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쉽게 희생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실로 중요해지면서,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샤르댕의 주장은 과거의 공동체, 전체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아마 그가 바라는 사회는 각각의 개인이 중심에 있으면서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하는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기능주의가 말하는 식의 유기적 연결만으로 그의 공동체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가 구성원들의 유기적인 연결의 결과물이면, 각 구성원은 저 마다의 역할과 특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는 사회가 보이는 특징과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샤르댕은 단순히 유기적으로 개인이 모여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와 개인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무한 반복으로 연결돼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회를 파악하기 위해선 개인을 보고, 그 개인을 파악하려면 또 사회를 보면 된다. 이러한 개인이 중심이 되고 독립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이다.

그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엉켜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원소들이 거미줄이나 망처럼 서로 얽혀 있다고 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물 같은 것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물 역시 나눌 수 없지만 그물의 경우는 비슷한 단위들이 늘어서 있어 원소 하나만 보아도 전체를 알게 되고 반복의 법칙에 따라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알게 된다. 한 공간을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채워나가는 반복의 법칙 속에서는 그물코 하나하나에 이미 전체 모습이 보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oony2 2024-12-21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잘 읽었습니다. 다만 ˝창조론을 옹호하는 기독교의 전통˝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창조론은 신학적인 이론입니다. 과학과는 관련 없는 내용입니다. 샤르댕 신부님뿐 아니라 많은 신학자는 진화론을 당연히 받아들입니다. 물론 기독교 내 극소수의 근본주의자는 이를 과학으로 받아들여 ‘창조과학‘을 믿긴 하지만요. (보수 개신교가 장악한 한국에서는 창조과학을 맹신하는 평신도가 대부분이라는 현실이 참담하긴 하죠...) 아무튼 ‘창조과학‘은 기독교 주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현대과학 이론에 반한다는 오해가 풀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쫓겨난 사람들 -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매튜 데스몬드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기회의 평등’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정치 이야기할 때 끊임없이 이 담론이 등장한다. 기회의 평등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기회가 보장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동등하게 기회가 보장되는 것’에 대해서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다. 나는 이것이 형식적 기회의 평등과 실질적 기회의 평등으로 대변된다고 생각한다.

형식적 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를 신뢰한다. 이 입장에선 세상은 원래 자유롭기 때문에 외부의 간섭이나 제약은 부정된다.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역량을 발휘하면서 각자의 기회를 누리면 된다.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탓이며, 이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개입은 공정성의 훼손을 의미한다.

반면 실질적 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외부의 개입을 중시한다. 인간은 모두 다른 배경과 능력을 갖고 있다.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개인마다 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풍족한 환경과 뛰어난 실력이 뒷받침돼 손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신체적 제약이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기회를 누리는 데 많은 장해물이 있다. 실질적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장해물을 제거하거나 넘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회의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실질적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아무도 갈 수 없는 섬에 ‘기회’라는 물건을 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섬에 갈 수 있는 길까지 보장돼야 한다. 그 길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휠체어를 타 사람에겐 폭이 넓은 다리가 적합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에겐 자동 움직이는 다리가 보장돼야 한다. 갈 수도 없는 길을 만들어 놓고 균등한 기회의 보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기만에 불과하다. 즉 개인이 이 기회를 선택할지 말지를 결정해야지, 상황이 개인으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기회다. 적어도 돈은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돈이 필수적이다. 돈이 없으면 새로운 걸 시작할 수도 없고 실패했을 때의 타격은 어마 무시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조심스러워한다. 예컨대, 어떠한 사람들은 경제적 타격 없이 자식을 사교육을 시키거나, 해외로 어학연수를 보낼 수 있다. 그들은 교육 기회의 평등이라고 여겨지는 학교 교육에서 높은 성과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의 자식들은 혼자만의 힘으로 그들을 따라잡아야 하거나 낙오될 수 있다. 이 성과는 그대로 학벌이라는 표지로서 사회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교육에서 높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오로지 학생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누구는 가난하더라도 개인의 능력이 출중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가난한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입장에 의문이 되는 것은 같은 기회를 누리는 것에 개인마다 쏟아야 하는 힘의 차이가 다르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다. 같은 걸을 하더라도 누구는 어떤 기회비용 없이 쉽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을 걸기도 한다. 이것이 정말 당연한 현상인가.

나는 부모님의 보호막 아래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으면서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성인이 돼서 우리 집이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까지 누려오던 것이 부모님의 무조건적 희생 덕분이었다. 그들은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했다. 엄마는 농사, 요양사, 식당 알바, 냉이 캐기, 도토리묵 팔기, 포도 즙, 칡즙 팔기, 각종 부업 등의 일을 했다. 그 결과 엄마는 지금까지 5번의 대수술을 했다. 또 아빠는 직장을 다니면서 농사, 주식 공부를 틈틈이 했다. 정년퇴임 전 몇 년 동안은 장례식장에서 시체를 옮기는 일까지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게 한 교육적 지원도 못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지 않은 부모에 대해 비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했지만, 나는 어느 누구도 이를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가난의 실체를 보지도 않은 채 ‘기회는 널려있다’라고 무책임하게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 기회를 넘볼 여유가 전혀 없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무조건적 희생이 없다면, 그저 하루하루 버티기에만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들의 자식 세대로 재생산되겠지.

‘쫓겨난 사람들(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들)’은 미국 밀워키 지역의 절대 빈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에 처해있고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통계수치로는 알 수 없는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증언이다. 그들은 밀워키의 이동식 주택에 살고 있으며,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집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린다. 하지만 저자인 매튜 데스몬드가 서술한 가난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매튜 데스몬드는 문화 인류학의 연구 방법인 기술자를 활용해 밀워키의 절대 빈곤에 대해 연구를 한다. 그는 수년간 그들과 머물며 유대감을 쌓으며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을 관찰하고 면담한 기록이 약 5000쪽에 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연구를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의 풍부한 사회학적 지식과 통계 자료는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누구는 이 연구가 우리나라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가난이 만연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책에 서술된 것처럼 우리 사회는 부자가 빈자를 ‘활용’해 돈을 버는 것이 정상적이다.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시대에 절대로 우리의 관심이 ‘부’에게만 집중을 해선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선 빈자에 대한 신경과 더불어,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시도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의 측면에선 가난을 무시하는 것이 개인에게 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구조적인 측면에서 언젠가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가난으로 인해 생기는 무력감이 나에게 절실히 다가왔다. 교육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부터 효능감을 빼앗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걸 막아버린다. 생산적인 일을 하기보단 하루하루 버티는 것에 의의를 둔다. 장기간의 의미를 추구하기보단 지금 현재의 쾌락에 집중하게 된다. 학습에 무기력한 아이들 역시 외와 비슷한 현상을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공부해도 다른 아이들보다 못하니까. 공부를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다.’ 등의 무기력함이 학습을 방해하는 상황이 상상된다. 가난은 더욱 이러한 생각을 강화하겠지.

사회는 발전하고 풍족해지는데, 이러한 절대 빈곤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의미겠지. 성장도 좋지만, 분배에 대해서도 당연히 여기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부로도 절대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아직은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다. 분배를 위한 정책을 위해서 힘들고 긴 투쟁이 지속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 투쟁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한 건의 퇴거는 퇴거당한 가족이 원래 살던 구역뿐 아니라 마지못해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구역까지 여러 도시 구역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강제 이주는 이주의 속도를 높이고 원망과 투자 회수의 속도를 훨씬 더 빠르게 가속화하여 제이스가 말한 "영구적인 슬럼"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영구적인 슬럼의 핵심 고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고 그와 동시에 거길 빠져나가겠다는 꿈을 꾼다는 데 있다.

가난한 흑인 동네 출신 남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투옥이었다면,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퇴거였다. 가난한 흑인 남성들은 잠긴 문안에 갇혀 살았고,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잠긴 문밖으로 내 몰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족은 더 이상 믿을 만한 지원군이 아니었다. 중산층 친척들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아예 도 울 생각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가난한 친척들은 큰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가난하거나 다른 문제가 있거나 [술이나 마약 같은 데] 중독된 상태에 있곤 했다. 법적인 문제 역시 골치였다. 크리스털은 이 때문에 로다 아주머니가 자신이 더 이상 위탁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자 자신을 돌려보낸 거라고 믿었다. 로다는 아들의 마약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발견되는 바람에 기소되어 2년 동안 보호관찰을 당하는 중이었다.

퇴거 그 자체는 왜 어떤 가정은 안전한 동네에 사는데 어떤 가정은 위험한 동네에 사는지, 왜 어떤 아이들은 좋은 학교에 다니는데 어떤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는지를 종종 설명해 주었다. 강압으로 집에서 쫓겨난 트라우마와 퇴거 기록이라는 오점, 그리고 새로운 거처로의 힘들고 황급한 이사는 퇴거당한 세입자들을 더 침체된 위험한 지역으로 내몰았다.

퇴거는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아이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주 안정성은 일종의 심리적 안정성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자신의 집과 사회적 관계에 투자할 수 있게 하고 학교에서의 안정성으로 이어져 아이들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졸업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며, 지역사회 안정성으로 이어져 이웃들이 강력한 유를 형성하고 자신의 구역을 돌볼 수 있게 독려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워낙 빠른 속도로 퇴거를 당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거의 누리 지 못 한다. 저소득 가정들이 이사를 자주 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퇴거를 경험했던 노동자가 해고를 당할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15퍼센트 정도 더 높다. 주거 불안이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경우 이는 집에서 쫓겨나면서 쌓인 스트레스와 그 소모적인 성격이 직장에서의 업무 수행 능력을 짓밟아놓았기 때문일 수 있다. 퇴거당한 가족들이 공공 주택의 수혜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택당국이 신청서를 검토할 때 퇴거와 부채를 감점 요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결과 주택 원조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월세 부담을 진 사람들과 퇴거당한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그 원조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밀워키에서는 비자발적인 이사 경험이 있는 세입자들의 경우 그보다는 덜 어려운 환경에서 이사한 유사한 세입자들과 비교했을 때 장기적인 주택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25퍼센트 더 높았다. 또한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가족들은 가난한 동네에서 더 가난한 동네로, 우범 지역에서 그보다 더 위험한 지역으로 꾸준히 달갑잖은 동네로 밀려간다.

퇴거는 한 사람의 정신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강제 이주의 폭력성은 사람들을 우울증과,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다. 최근 퇴거를 경험한 아이 엄마는 두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여러 만성 우울증 증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퇴거 경험 이 없는 유사한 수준의 엄마들보다 두 배 더 많은 수치다. 수년이 지 난 뒤에도 퇴거 경험이 있는 엄마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엄마들보다 행복 지수와 낙천성, 활기가 떨어진다. 일군의 정신과 의사들은 일부 환자들이 퇴거를 며칠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정신의학 서비스>에 퇴거를 "자살의 의미 있는 전조"라고 지목하는 편지글을 발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 그냥 게임이나 하고 싶었던 한 유저의 분투기
딜루트 지음 / 동녘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틈만 나면 게임을 했던 것 같다. 학교와 학원으로 채워진 일상의 여백을 게임이 채웠다. ‘메이플 스토리’와 ‘던전 앤 파이터’는 내 어린 시절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방학이 되면 형과 나는 번갈아 가면서 게임 캐릭터를 육성했다. 방학엔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몸이 고됐어도 멋모르고 했던 것 같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캐릭터가 성장하니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게임을 했던 이유는 나만의 캐릭터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게임 세계에선 현실 세계에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었다. 게임 세계에선 내가 바라던 모습을 게임 캐릭터에 투영하고 자유자재로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었다. 좋은 아이템을 끼면 다른 유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마치 영웅이 된 듯 양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었다. 몬스터를 사냥했을 때의 쾌감과 그 결과 따라오는 캐릭터의 성장은 나를 게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게임 방식은 플레이어의 꾸준한 시간과 노력이 필수였다.

나의 게임 취향은 호불호가 확실했다. 정교한 컨트롤 능력을 요하는 게임은 선호하지 않았다. 캐릭터 육성을 위해 시간과 노력은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하지만 컨트롤 능력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컨트롤 능력은 비가시적이어서, 나의 노력에 결과물을 곧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맞서는 게임을 하지 않았다. 내가 게임을 하던 시절에 서든 어택, 피파 온라인 등과 같은 경쟁형 게임들 역시 큰 인기였지만 나는 이에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못했었다.

고등학생이 되니 게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없게 됐다. 내가 하던 게임은 이 두 요소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투자하지 않으면 캐릭터들은 도태된다. 현실적 제약과 캐릭터가 도태되는 모습으로 인해 고등학생이 된 나는 게임을 과감히 포기했다. 지금까지도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롤, 배틀 그라운드, 오버워치와 같은 게임들을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나의 정교한 게임 컨트롤을 요구할뿐더러, 매번 다른 유저들과 맞서는 것이 피로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선 운동과 게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둘 모두를 즐기지 않는 남자들은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둘을 모두 즐기지 않는 ‘비정상적인 남자’다. 솔직히 다른 남자들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스스로 나를 비정상적이라고 바라보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을 하지 않으면 그들과 할 수 있는 것들의 제약이 크다.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을 제외하고 일상에서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들이 모이면 운동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이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부끄러운 감점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끼면 안 될 곳에 왔다는 느낌이랄까. 또한 친구들이 운동하러 모일 때에도 나는 운동 신경이 쥐약이기에 이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책은 게임을 하는 ‘비정상적인 여자’의 책이다. 게임을 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남자’로서 게임을 하는 ‘비정상적인 여자’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다가왔다. 사실 게임을 남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린 시절 봤던 PC방의 풍경은 대부분 남자였으니까. 게임에서 여자 유저들을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었으니, 여자아이들은 게임을 즐겨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온 통계를 보니 정말 많은 여성들이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임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게임을 하는 여자가 비정상적인 것도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이유부터 게임 중 겪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게임 세계에선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게임 속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유저들은 자율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 세계가 완전히 현실 세계와 분리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성 플레이어로서 게임 세계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경험했고 이 책에서 이를 고발하고 있다. 21대 정의당 국회의원 류호정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E-스포츠 선수였던 류호정은 E-스포츠 분야에 만연한 불평등과 여성 혐오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권에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나 역시 게임을 하지 않지만 게임에 만연한 혐오를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상대방을 비하하고 욕하는 것이 게임 세계에서 일상이다. 그를 욕하는 것을 넘어서 부모까지 욕하면서 게임을 즐긴다. 한 친구는 이러한 문화 때문에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렸을 때 욕을 많이 한 공간 역시 게임 세계였다. 익명성이 악의를 한 곳에 뭉치기에 효과적이지만, 이에 따른 책임을 솜털처럼 가볍게 한다는 작가의 말이 극히 공감됐다. 익명성을 전제로 한 게임 세계에서 혐오는 어떠한 책임 없이 이뤄지니까 말이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비하하고 우롱하는 걸까. 상대방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이유는 뭘까.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우롱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받는 피해를 상상하는 능력이 결여된 것이라고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당하기 싫은 걸 당당하게 타인에게 하는 변태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가 이렇게 만연한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얼마나 더 심각할까. 여성 혐오, 장애인 비하 등 은 게임 세계에서 더욱 쉽게 일어날 것이다. 작가가 고발하는 게임 내에서의 여성 혐오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나는 게임을 하지 않고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경험한 혐오들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게임 업계는 이를 무시하고 덮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게임이 과거처럼 부정적인 오락물로 여겨지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 이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여가 활동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사적 이득과 같은 목적만을 향해 게임 업계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한 수단의 정당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 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게임의 문화가 싫으면 떠나면 되지 않나? 게임은 현실 세계와 달리 로그아웃이 간편한데, 굳이 정신적 피해를 받으면서 게임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게임을 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고, 그는 게임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한다.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게임으로 생기는 피해를 감수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도 그에게 피해를 줄 권리가 없다. 건전한 환경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그의 권리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다양한 게임들의 상황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다만 내가 구체적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을 알지 못해 작가의 말이 공감 가지 않을 때가 가끔 있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이와 동시에 조금 의아해했던 부분이 있다. 그는 게임 내에서 많은 캐릭터들이 남성 중심적으로 이뤄진다고 비판하면서, 오로지 여성이 중심부의 역할로 구성된 게임을 예찬한다. 그는 여성이 중심이 됐을 때, 이야기의 풍부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사실 그 자체가 어떻게 이야기의 풍부함과 이어지지. 여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와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와 다를 것 없는 일률적인 사회인데 말이다. 그가 바라는 게임 세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화과정 1 한길그레이트북스 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199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엘리아스는 김덕영의 ‘사회의 사회학’을 통해 알게 된 사회학자다. 김덕영은 사회학의 오디세이를 표방하며 12명의 사회학 거장을 소개한다. 사회학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오로지 맨몸으로 이 책을 읽었다. 12명의 학자들 중 몇몇은 처음 들어본 학자기도 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언급된 학자들의 단행본을 읽어본 경험도 전무했다. 그들의 농도 짙은 언어를 짧은 글로써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이론을 소화하기보단 차근차근 김덕영이 이끄는 여정을 따라가는 정도로만 독서를 했다. 사회학자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어떠한 학문을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발판 삼아 거장들의 생각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2명의 거장 중 엘리아스를 가장 처음 만났다. <문명화 과정 1>은 엘리아스의 대표 저작으로서 그의 주요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머리말과 더불어 1,2부로 나눠져 있다. 머리말은 그의 사회학 이론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왜 쓴 지부터, 어떠한 개념틀을 활용해 사회학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사회학을 혼자 공부하는 나에게 머리말은 소화하기 힘들었다. 읽는 내내 독서의 흐름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가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농도 짙은 언어들은 길을 한참 헤매게 했다. 머리말이 이 책의 가장 큰 고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머리말에서 이 책을 포기했을 거라 생각한다.

힘든 머리말을 읽고 나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기다린다. 1부는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 대립이 생겨난 이유와 프랑스에서의 문명 개념을 다룬다. 같은 시기에 이웃한 두 나라는 문화와 문명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엘리스아스는 이러한 차이의 이유를 각 사회에서의 중산층의 역할 및 지위에서 찾고 있다. 2부는 서양의 옛날 관습들을 살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재들로 이뤄져 있다. 식사 중 예절, 생리적 욕구, 코 푸는 행위, 침 뱉는 행위 등에 대해 각 시대마다 서로 다른 규율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관습이 이전의 시대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아스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관습이 변하며, 그 변화의 방향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현재 내 지식으로 소화가 불가능한 책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정도로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문장 수집을 위해 붙여둔 포스트잇만 약 70쪽이 된다. 이것들이 어려운 책이지만 내가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어려운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만난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모두 담고 싶었다. 이 생각들이 한 번에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스스로 만족하지 않은 독서를 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글을 쓸지 고민을 했다. 책을 평가하거나 감상하는 입장보다, 다음번에 이 책을 다시 읽을 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벌 독서는 이 책의 잔상을 남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김덕영의 사회학의 사회학을 다시 꺼냈다. 그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를 서술하는 부분을 천천히 읽었다. 밑줄을 그으며 열심히 읽은 책이었는데도, 모든 부분이 새로웠다. 그래도 ‘문명화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엘리아스의 잔상을 곁들여 읽으니 더욱 많은 것을 건질 수 있었다.

엘리아스 사회학의 중심적인 경험적 - 역사적 관심은 문명화에 있다. 그는 결합태 사회학/ 과정 사회학의 근본 문제를 결합태, 과정 및 문명화로 포착한다. 엘리아스가 보기에 사회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의 발전에 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의 발견이나 정립이 아니다. 그는 사회학이 ‘사회적 사실들의 관찰 가능한 상호 관련성과 법칙성에 대한 모델/ 이론’의 구축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엘리아스에게 사회란 다수 개인들의 상호 결합과 의존과 같다. 그는 이를 결합태로 부른다. 사회가 변동한다는 것은 결합태가 장기간의 과정을 거쳐 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회학은 바로 이 결합태의 변통 과정으로 이론적이고 경험적으로 논구해야 한다.

엘리아스가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엔 외부 세계와 이념의 영역(초월적 아프리오의 영역)인 인간 내부 세계가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내적으로 자조적인 폐쇄적 인간상이 지배적이었다. 엘리아스는 의학을 공부하던 시절 해부학 공부를 통해 인간의 두뇌가 지속적으로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를 매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넘어 타인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개방적인 인간상 관념으로 이어졌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며 철학의 한계를 절감해 사회학으로 개종을 하게 된다. 엘리아스는 사회학자들이 다루는 문제들이 철학자로서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문제들은 무엇보다 구조화된 역사이며, 비-구조적인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과는 상반된다.

그에게 개인과 사회는 모두 과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인간과 관련된 이론을 구성할 경우 과정의 성격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개인을 하나의 과정을 지나가는 존재라고 이해한다. 그 관점에 따라 인간은 항상 움직임 속에 존재하는 과정을 통과하는 존재일뿐더러, 그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발전한다. 그리고 발전이라 함은 연속적인 과정에 내재하는 질서를 일컫는다. 후기의 모습은 전기의 모습으로부터, 청소년은 유아로부터, 성년은 청소년으로부터 형성된다.

엘리스아스는 사회를 개인들의 상호적 의존과 작용의 관계로 해체한다. 사회는 단순히 인간들이 점증적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공동생활은 혼돈, 우연, 무질서 속에서도 아주 특정한 형태를 갖는다. 인간들은 근본적인 사회 의존성에 의해 언제나 특별한 결합태 속에서 집단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사회가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결합태로 이뤄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회는 개인들이 상호 결합하고 의존하는 사회적 그물망인 결합태의 합인 것이다.

결합태의 개념으로 개인과 사회를 파악하면, 이 두 실체를 단순한 기계적 병렬관계나 이분법적 관계에서 벗어나 이해할 수 있다. 즉, 개인과 사회가 상이하며 더 나아가 적대적인 두 형상인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적 강제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우주에서 서로 분리돼 존재하는 두 객체가 아니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측면인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사회학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그에게 개인과 사회는 동일한 인간의 상이하지만 분리할 수 없는 두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이 개인적 존재면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인칭대명사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하나의 인칭 대명사는 다른 인칭 대명사를 전제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의 인칭 대명사는 다른 인칭대명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기능을 하고 의미를 갖는다. 너, 그, 그녀, 우리, 너희 없이는 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너 또는 우리와 같은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과 결부돼 있다. 이는 인칭대명사가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즉, 근본적으로 사회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엘리아스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엘리아스는 궁정 사회를 단순히 하나의 고립된 생활세계로 간주하지 않는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궁전 사회가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이 시대의 궁정 사회는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된 다수 인간들의 사회적 결합태의 특정한 표현이며, 따라서 어떤 한 개인이나 또는 어떤 하나의 인간 집단에 의해서 계획되거나 의도된 결과로 발전한은 아니다.

궁정 사회는 사회 발생적 측면에서 볼 때 중앙집권적 절대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발달한 결합태이다. 국가는 중세적 봉건영주들을 국왕의 단순한 궁정 귀족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이 전의 중세 시대의 가치와 미덕은 궁정 사회적 결합태에서 반문명적인 형태라고 비난받기까지 했다. 또한 사회 발생적 문명화 과정은 심리 발생적 측면에서 궁정 귀족의 세속적 지배계급의 인격 구조와 행위 구조의 변화를 수반했다. 중세의 전투적 사회구조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몸과 육체적인 것의 비교적 직접적인 표출 그리고 감정과 충동의 통제되지 않은 발산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게 됐다.

궁정 사회에서 보듯이 인간은 사회 발생적/ 심리 발생적 측면에서 문명화 과정을 거친다. 현재 역시 문명화 과정에 있다. 문명은 지속적인 균형 상태를 의미하는데, 현대 역시 국가 간/ 국가 내 긴장이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폭력, 아주 야만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엘리아스의 문명화 개념 틀은 이러한 폭력과 야만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