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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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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서평 작성을 위해 출판사 창비에서 제공받은 도서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정말 간략하게 느낀 점을 말해보자면, 인상적인 대사들이 많았다.

"나는 말이야, 서아 엄마가 곤란한 상황에 놓이면 절대로 못 본 척하지 않을 거예요. 알죠?" (23쪽)

"내가 지난번에 말했죠? 나는 서아 엄마가 곤란한 상황이면 못 본 척하지 않을 거라고." (28쪽)

말의 눈

자신의 딸이 학교 폭력 가해자로 내몰렸을 때, 딸을 위해 목숨을 불사하고 서아 엄마의 일을 도우려고 하는 지희의 대사가.

"진짜 총이었대도 쐈겠지. 당신, 나 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잘됐네. 그래 쏴보니까 기분이 어때?"

"실수였어."

"웃기시네."

윤석이 미친 사람처럼 욕지기를 쏟아냈다. 윤석 옆에 굳은 듯이 서 있던 혜경이 갑자기 주저앉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끔찍해."

"내가 화를 내서? 아니면 소리를 질러서?"

"아니, 당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거. 그게 너무 끔찍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 105쪽

아이를 사고로 잃은 후 감정의 골이 깊어진 윤석과 혜경의 대화가.

"날 벌주고 싶어?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

(중략)

"당신이 내가 받은 벌이야."

맹점 - 136쪽

자기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의국 내 가혹행위에 대하여 문제 삼아 남편이 병원에서 내몰리듯 쫓겨났을 때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안과 전공의의 공석을 차지했던 은애의 대사가.

"따뜻했어요. 나는 선배를 잘 몰라도 작품은 믿거든요. 선배가 따뜻한 사람이라서 작품도 따뜻한 거라 믿어요. 우리는 그걸 잊지 말아야 해요."

"따뜻함?"

"아니. 우릴 따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뼈와 살 - 227쪽

나의 첫 개인전을 매일 보고 왔다는 이선과 나의 대화가.

소설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어떤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까. 속에 내재된 감정들을 어느 순간에 풀어놓는데, 그럴 때마다 묘하게 섬뜩했다. 인물들은 대부분 겉으로 진심을 표현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불합리한 상황을 합리화했고, 어떤 불합리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하는 현실에 굴복하며 피폐해져 갔고, 어떤 사건들을 겪으며 섬뜩한 진심을 표출했다.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추악했고, 누군가의 죽음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절망을 바라는 그 마음을 보고 있으면 섬뜩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해설에서 '소설들은 찝찝한 조짐이 우글거리는 쪽으로 독자를 데려다놓는 쪽에 가깝다'(279쪽) 라고 표현하는데, 글을 읽으며 느꼈던 어떤 묘한 감정에 대하여 해소를 한 기분이었다. 그 찝찝한 소설들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2024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언캐니 밸리'를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는데, 노부인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노부인의 집에 작품으로서 출근을 했고, 어느 날 당신은 누군가가 뿌린 염산에 의해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부인이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수면제를 수시로 약병에 채워넣고, 연장통 든 남자의 뒷배를 봐주며, 대리인을 통해 그림을 사 모았다. 어쩌면 노부인만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살 수도 해칠 수도, 끝내 간직할 수도 있는 사람 아닐까.

언캐니 밸리 -181쪽

아마 글을 처음 읽었을 때에도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음습함을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나 전지영 작가의 단편을 하나씩 읽으며 노부인의 권력과 이기심, 그런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다. 글은 계속해서 나의 시선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노부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를 악인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나의 서술에 속아넘어 간 것인지, 정말로 당신을 망친 범인이었는지. 그러나 노부인은 내게 분명히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소설집의 마지막에 실린 단편 <남은 아이>은 학교 폭력 가해자의 엄마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글이다.

태이는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선우에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 그제야 내가 그 사건으로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선우의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마침내 독립해 집을 떠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어졌다. 대부분의 부모는 미래에 기대어 아이의 일탈과 방황, 소소한 거짓말과 반항을 인내한다. 기댈 미래가 없다는, 어떤 가능성을 잃었다는 사실. 나는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남은 아이 - 266쪽

태이는 선우를 성추행 혐의로 학교폭력위원회에 고발했다. 태이에게 모욕적인 말을 서슴치 않았던 선우의 문자가 공개됐고, 선우는 징계를 받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선우의 엄마, 나는 학폭위가 끝난 뒤에도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태이를 만나고자 했다. 그렇게 만난 태이는 재잘거리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앞에서 순수했던 태이는 나의 상상 속에서 악의를 드러냈다.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나의 의심은 결말에서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는 것, 그것은 <쥐>에서도 표현되었다.

군에서는 심심할 틈 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관사 여자들은 심심찮게 벌어지는 부대 내 폭행이나 부당 진급 폭로 같은 공격적인 기사와 그에 따른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대 내부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유리하면 과장해서 드러내고 불리하면 철저히 소문으로 치부했다. 관사 여자로 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의뭉스러워졌다. 윤진은 그 의뭉스러움을 혐오했다. 마땅히 의심할 만한 일을 무턱대고 믿어서 밝혀져야 할 사실을 훼손하는 것 같았다.

쥐 - 45쪽

쥐는 은근히 우리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뿐,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 쥐구멍을 파놓은 화단에 불을 지른다. 그러나 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쥐의 행방이 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지 못했던 <남은 아이>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쥐>에서 윤진의 발바닥에 달라붙은 설탕마냥 생각하게 된다. 찝찝함에서 끝나지는 않는 무언가.

미리미리 썼으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을 텐데 미루고 미루어서 더 생각을 해볼 시간이 없다. 글을 다 쓴 후에도 찝찝함은 남아 더 생각은 할 수 있을 테니, 비록 두서없이 엉망이 되어버린 서평이 되었지만, 글을 마친다. (이렇게 대책없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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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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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서평 작성을 위해 출판사 창비교육에서 제공받은 가제본 도서

내면의 불안을 깨고 나오는 것은 결국 자신이어야 한다.




꼭 어떤 세계, 틀을 깨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그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알은 세계이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그렇다면 연우에게 큐브는 어떤 세계인가를 생각해본다. 느닷없이 자신과 세상을 완전히 단절시키고 분리하여 그를 고립시켜버린 고독의 공간인가. 어떠한 위험도 덮쳐오지 않는 완전하게 그를 지켜줄 안락의 공간인가. 안락과 고독.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감정은 아니라고 불현듯 깨닫는다.



사람들과의 교류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의 피로도 같은 게 있다. 상대의 마음을 신경쓰는 것, 상대와 갈등을 빚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 등등.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통제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피로하고, 때때로 스스로 큐브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어느 외계 생명체에게 붙잡힌 적도 없으면서 나는 스스로 큐브를 만들어낸다. 나의 큐브와 연우의 큐브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스스로 큐브를 빠져나올 수 있지만, 연우는 그럴 수 없다. 영문도 모른 채 큐브 안에 갇혀 있다. 큐브는 안락의 공간이 아니다.



곁에 딱 붙어 있을 거다. 여기는 거기가 아니라고, 밖이라고, 네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왔노라고, 끊임없이 말해 줄 거다. 그래서 장치 같은 것 없이도 불안하지 않게,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또 언제 채집당할까 무서워하지 않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외로운 줄 모르고 외로워하지 않게 끝없이 말해 줄 거다.

보린 《큐브》 185쪽



이 부분을 읽을 때 확신했다. 큐브 속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연우를 큐브 속에 가둔 존재가 무엇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연우가 믿었던 대로 어떤 괴상한 외계 생명체의 실험이었든, 무의식의 세계였든, 언젠가 일어났을 지도 모를 미래의 어느 순간이었든. 예측 불가하여 불안한 세계일지라도 바깥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세상 모든 곳에서 불어오는 불행의 바람에 맞서야 한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소설에서 우주로 간 최초의 개, 라이카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지어서 무언가 글을 남기고는 싶다만, 이미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만 쓴다. 극 F의 감정형 인간으로서 괜히 찾아봤다가 울면서 글 마저 읽었다는 것만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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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복직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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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작성을 위해 출판사 창비에서 제공받은 도서

지난 마법소녀 시리즈,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서 '나'는 은퇴를 선언했다. '나'의 능력은 대가를 요구했다.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지불했다. 그 대가는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법소녀가 치를 수도 있다. 다른 마법소녀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으며, 소원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할지 알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나'는 마법소녀로서의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번복된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마법소녀로 복직한 '나'는 여전히 반지하에 산다. '나'가 거주하는 반지하에 에어컨은 없다. 그렇게 '나'는 생존을 위해 도서관에 간다. 살기 위한 최소한의 주거 공간을 제공받지 못해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어떤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이 향하는 문화 공간의 예산 삭감에 대한 문제 또는 폐쇄와 같은 일들. 점점 있을 곳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설상가상 '나'의 집주인은 보증금을 천만 원으로 올려 받겠다고 말한다!(양심 있는지?) 리볼빙 빚을 아직 다 갚지 못했는데, 천만 원의 보증금이라니.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그 막막한 빚의 더미에 숨이 턱 막힐 것만 같다.

최악의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나'의 칭호에 대하여 희생의 마법소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는다. 마법소녀로 복직 후 처음 맡은 임무에서 '나'의 능력에 대한 대가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전마협과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됐고, '나'의 집주인은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한다. '나'는 거주 공간에서 쫓겨나는 일에 대해 자신을 잘못을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마법소녀로서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 실수가 이 집에서 쫓겨나야 할 만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113쪽) 부당하고 억울한 현실에 저항할 수 없고, 그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곱씹는 '나'의 마음에 공감하며 나는 또 마음이 아팠다.

쫓겨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극동마법소녀전진본부(이하 극동본부)라는 종교단체가 있다. 가정에서 학대 당하던 두 소녀가 있었고, 소녀들은 도망쳤다. 극동본부는 갈 곳 없는 두 소녀들을 끌어들였다. 두 소녀는 학대의 공간에서 스스로 도망친 것이었지만, 쫓겨난 것과 진배없었다.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소녀들은 끝내 사이비 종교 단체로 밀려났던 것이다. 어쩐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 떠오르는데, 좀 낙원이 있으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이 그토록 끔찍했기 때문에 달아났던 것인데, 끔찍한 생을 겪은 이들에게 삶은 끝도 모르고 가혹해지는 것 같아서.

급하게 마무리짓는 것 같지만, 끝을 내자면

그래, 삶의 해피엔딩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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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리커버)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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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서평 작성을 위해 출판사 창비에서 제공받은 도서

'나'는 죽고자 한다. '나'는 삼백만 원의 신용카드 빚을 가지고 있다. 지금 갚을 수 있을 만큼 돈을 지불하고 남은 금액은 이자와 함께 다음 달로 넘긴다. 리볼빙을 쓰고 있는 '나'의 빚은 이자와 함께 불어난다. 고작 삼백만 원이 없어 죽고자 하는 것. 그러면서도, 가능한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죽는 방법에 대한 궁리를 하는 '나'라는 인물에 공감하고 말았다. 꼭 죽을 결심을 하면서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보다 내가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혹은 세상에 끼칠 피해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나의 죽음, 나의 존재, 나의 안위는 중요하지 않다.

죽음을 결심한 '나'의 앞에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가 나타나 당신은 시간의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건 구원의 한 장면이었다. 나의 쓸모와 가치를 모두 잃고 삶의 의지가 꺾여버린 이에게 당신은 사상 최강의 마법 소녀가 될 것이다, 당신의 힘으로 세상을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며 가치를 일깨우고, 삶의 의지를 불어넣는다. 아직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나를 믿고 힘을 실어주는 존재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원의 서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간의 마법 소녀로 각성하는 것은, '나'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예언을 틀려본 적 없는 아로아가 '나'의 앞에 나타난 까닭은 정말로, 구원이었던 것이다. 아로아는 히드로공항에서 '나'를 향해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말했다. '나'를 지키는 것, 당신을 지킬 운명. "당신이 나의…… 운명인 거예요!" (110쪽) 고백의 순간이 참 찬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한다.

시간의 마법소녀는 어떻게 각성했을까. 마법소녀의 각성 계기는 트리거였다. 그것은 시간의 마법소녀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마법소녀는 "아주 고통스러운 순간에 시간이 제발 멈췄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했고"(116쪽) 각성이 일어났다. 마법소녀로서의 각성은 그 순간 가장 취약한 존재에게 자신을 지키는 힘을 부여받는 순간이었다. '마법소녀로서의 최초의 싸움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투'(119쪽)였다.

'나'의 사례는 어떨까. 시간의 마법소녀는 아로아가 속한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이하 전마협)과 뜻을 같이 하지 않았고, 인류의 멸망을 도모한다. 전마협은 패배할 것 같고, 시간의 마법소녀에 의해 인류는 멸망할 것 같다. '나'는 소망한다. 시간의 마법소녀를 이기고 싶다. 그 마음은 그저 승패에 관한 문제라기 보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대상이 있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소녀의 각성은 그렇게 나,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를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글을 끝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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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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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작가가 이 문장을 처음 썼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더구나 한글 파일의 새하얀 화면이 아닌 노트에 손끝으로 써내려갔을 이 문장에, 어떤 의미를 담았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호정에게 호정의 마음에 있는 그 호수는 얼마나 단단하게 얼었을까. 어떻게 자신이 몹시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무리 꽁꽁 얼었다 한들 작은 틈을 건드리는 순간 깊고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나. 안전하다는 단어가 호수와 어울리는 단어일까. 호수는 사실 안전하다기보다 위험하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과연 호정의 호수는 호수의 바깥일까, 호수의 안일까를 생각했다. 당연하게 호수의 바깥을 생각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 덩어리가 제 숨을 틀어막는 깊은 호수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지켜준다. 겨울의 얼어붙은 호수는 몹시 차갑고, 호수의 밑바닥은 아주 캄캄할 것이다. 그런 곳에 혼자 남겨지는 것은 꽤 쓸쓸할 것이다.

그러나 호정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나는 모두 지켜보았다. 모두, 라고 해봤자 소설 속 호정의 일일 뿐이지만. 호정과 내가 겪은 일들이 같지 않은데 나는 호정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어떤 외부의 일 때문에 곪아갈 때 나는 신경질을 부리고 비뚤어졌다. 그때는 호정처럼 내 곁에 다가와 주는 모든 존재에게 모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럴 때 아무리 춥고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혼자이고 싶었다.

호정도 나와 비슷했더라면 호정이 있는 곳은 호수의 바깥이 아닌 호수의 내부일 것이다. 그곳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은 없을 테니까. 숨이 조금씩 턱턱 막히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한들 그렇게 고요한 상태에 그 외에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 호수의 일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우울증을 겪을 때 물의 속성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나를 죽음에도 몰아넣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가, 나를 다른 무엇보다도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

-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설의 끝을 장식한 문장에도 호수가 있다. 그러나 봄이 온다. 얼어붙은 호수는 봄볕에 녹고, 그 안에 홀로 있을 호정은 호수의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 것이다. 그 호수가 봄볕에, 여름의 열기에 메마를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도 호정은 그 얼어붙은 호수보다도 더 안전한 상태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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