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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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혐오’다. 인터넷의 여성혐오부 터 세대 갈등과 지역 갈등에서 비롯한 혐오, 시리아 난민에 대한 혐오. 장애인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학벌주의 체제에서의 혐오 등 사회는 온갖 혐오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이런 혐오의 일면에 ‘내 생각만이 옳고 다른 생각은 틀렸다고 간주하며, 타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극단주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극단주의 개념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혐오와 관련한 문제들을 심리학적으로 진단하기 위한 일종의 매스인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존의 극단주의 연구를 되짚어 보고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한국의 맥락에 맞는 극단주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극단주의는 1)배타성, 2)광신 3)강요, 4)혐오로 구성된다. 단순히 타인을 배척하거나 자신만의 믿음을 고집하는 것만으로는 극단주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해야 하는데, 이러한 극단주의의 예시로 저자는 박사모와 일베, 안티페미니스트, 한국의 극우주의 정당 등을 든다. 또한 저자는 기존의 극단주의 연구가 양적인 측면만 강조되었을 뿐 ‘질적인 측면’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가령 ‘판사들이 토론을 통해 보다 감정적인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와 ‘테러리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토론 이후 테러리즘을 더 지지하게 되었다’는 질적으로는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기존의 집단 극단화 이론에서는 동일한 극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생각이 강해지는 것’ 자체가 ‘극단화’라면 이것은 대단히 공허하고 의미 없는 설명으로, 질적인 측면의 극단을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저자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나 흑인 노예 해방운동을 했던 이들을 극단주의자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보충한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저자는 심리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서구의 담론을 수입하고, 특정 집단의 입맛에 맞게 재가공하는 담론업자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그가 보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질적인 면’들의 예시는 너무나 의도적이라(이를테면 그는 자유한국당을 극단주의 집단으로 분류한다), 자신의 당파성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심리학을 이용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지면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구시대적 사회인식 역시 눈에 거슬릴 정도다. 그는 “IMF 경쟁 위기로 대규모로 직장에서 쫓겨난 한국의 가장들”을 언급하면서 개인에 대한 실제적 위협과 정신적 위협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가부장제의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이 당연하다는 걸 전제로 하는 기술이다. 실제로 IMF 위기 당시에는 실직한 남성들보다 실직한 여성들이 더 많았다. 또한 그는 "2017년의 촛불 항쟁에서도 항쟁 참여자들은 단 한 건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180p)고 서술하는데, 이는 당시 여성 시민들이 겪었던 숱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묵인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몹시 불편하다. 그는 심리학이 사회 현상을 합리화할 뿐인 어용 학문이라고 비판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자신 역시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극단주의를 예방하기 위한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공동의 목표'를 기반으로 한 '국가 공동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양성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가 작금의 퀴어 퍼레이드와 같은 성소수자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가 최소한 구시대적 반쪽짜리 진보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압권인 것은 그가 극단주의의 요소로 배타성, 광신, 강요, 혐오를 제시하면서도 엄밀한 조작적 정의를 거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인지-행동주의로 위시되는 미국 심리학을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최소한 개념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없다면 그것은 양적 사회과학, 곧 심리학의 전거는 아니라는 소리다. 이로써 저자의 공신력은 전문성이 아니라 대중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을 부연하자면, 저자가 '권위주의적 성격'을 극단주의의 매개요인으로 다루면서도 그다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윾튜브나 카광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작금의 극우 스피커들 중에는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바라보고 약자들을 경멸하는 사례들이 굉장히 많다. 진중권은 <네 무덤의 침을 뱉어라>에서 이런 파시즘적 전조를 문제삼은 바 있는데, 저자가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극단주의를 다룬다면 이 부분을 깊게 다루고 넘어가는 편이 더 시의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심리학 서적으로 보면 이 책은 반가울 수 있다. 기존 심리학 서적들은 사회 현상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심리학 책을 펼쳐본 사람들이 책을 덮고 더 답답해지는 경우도 많다. 저자는 "사회 현상이라는 고차적인 현상, 상위 현상은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151p)고 말하면서, 사회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서술은 자칫 '심리학적 환원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저자가 비록 올드한 도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심리학을 다루면서도 나름대로 사회를 적절히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책이다. 종합하면 나는 이 책을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그러나 기존 심리학 서적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리버럴 성향의 기성세대에게 추천한다. 자유한국당을 “극우집단”으로 꼬집는 부분에서는 나 역시 통쾌함을 느꼈기도 하고. 이런 관점에서 학문적 비판은 오히려 부차적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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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마크 A. 호킨스 지음, 서지민 옮김, 박찬국 해제 / 틈새책방 / 2018년 1월


빨래 돌리면서 세탁기 옆에서 읽었다. 정신이 산만해질 때마다, 특히 스마트폰을 하염없이 붙들고 있을 때마다 생각나는 책이다. 철학 개념을 많이 쓰고있기는 한데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내용이 그다지 깊은 논리도 아니라는 말.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계속 들여다 보고 있다거나 가만히 쉬는 동안에도 자꾸만 뭔가를 보고, 읽고, 계획하고, 쓰고, 생각하고 있다면 도움이 될 만한 책.

















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학교 과제 중에 '20대 청년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고르라는 게 있었는데, 장정일 선생이 오늘날의 우파청년을 구상하며 썼다고 해서 읽었다. 하지만 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책이었고 결국 다른 도서를 추천하고 말았다. 작중 거북선생이 자신의 그것을 은에게 삽입하며 '지혜를 전승하는 가장 오랜 방법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가히 압권. 우파청년을 사유하긴 개뿔, 이런 기가 막히는 돌려까기식 호모포빅 레토릭을 동원하고 있는 데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4월>
















희랍 철학 입문
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0년 4월


박종현 선생의 번역으로, 이것저것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꼼꼼한스피드웨건스러운 주석들이 특징이다. 얼마 전부터 플라톤 스터디를 하게 돼서 읽게 됐다. 초반부에서 희랍적 사고 전반을 개괄하며 철학은 사실 언어의 문제라고 역설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령 종과 유의 관계를 보면, 당대 희랍인들은 사물의 이름은 그 사물에 '자연적'으로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약정에 의하여 속하는 것인가'를 물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라틸로스> 편 참고) 이에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이름을 발견한 사람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을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라 무척 놀라운 면이 있다. 사족으로 박종현 선생이 ergon을 역할로 번역하는 바람에 내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적잖이 오해하게 된 바 있다. (...)




<5월>
















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는데, 이 책이 인용되길래 읽게 됐다. 친구랑 같이 봤는데, 사강 소설답게 한때의 사랑을 소재로 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어딘가 세상을 내리까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친구한테 나도 옛날에 베르나르였고 조제 같은 연인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그때부터 걔는 나를 보면 자꾸 베르나르가 생각난다고 그러더라. 역시 연애소설은 한때의 장르다.

















변희재의 청춘투쟁
변희재 지음 / 도전과미래 / 2014년 7월


그냥 어느날 변희재에 꽂혔다. 아마 우파인사에 대한 컬트적 로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의석 감독의 괴작 '애국청년 변희재'도 감상했고 이 책도 읽었다. 초반부 어린 시절을 서술하는 파트가 나름 흐뭇하다. 변희재 본인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뭐 꼭 학문적 궤적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ㅎㅎ). 며칠 전에 변희재씨 법정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안타까웠다. 사석에서 같이 소주 한 잔 하면 참 유쾌한 삼촌형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ㅜㅜ) 언젠가 사석에서 뵐 날을 고대한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진중권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8월


사실 대중 일반에 보여지는 진교수는 지극히 컨셉충의 면모가 다분하다고 보지만(이 책도 그중 하나다), 그의 모두까기비판적인 스탠스 자체는 존경할만 하다. 꼭 변희재씨 저작을 읽고 생각난 건 아니고 얼마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기대보다는 덜 재밌었고 덜 유익했지만 앞으로 우익 파시스트 까는 데 이 책을 본보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역시 플라톤 스터디 때문에 읽게 됐다. 말이 필요 없다. 소크라테스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대중적 연설.

















선을 넘어 생각한다
박한식.강국진 지음 / 부키 / 2018년 4월


얼마 전부터 남북한 평화무드가 전개되고 있는 와중에 읽었다. 1학년 때 북한 관련 교양을 들었었는데 지극히 편향적이고 피상적인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게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때문에 이제야 이런 값진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박한상 교수는 만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굴지의 학자인데, 국내에서는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자신이 해외에서 활동한 것도 국내의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한 편향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를 깨부수는 데 도움이 된다. 세상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레드 컴플렉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 사회에서 북한을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태도다. 그동안 체제유지의 명목으로 북한은 우리에게 무척 비합리적으로 이해되어 왔고, 이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폐해가 야기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정말 선을 넘어 생각해야 할 때다.



<6월>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이태수 외 지음 / 길 / 2015년 3월


지금 읽고 있다. 형이상학은 어렵고 복잡하며 이해하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는 걸 깨우치고 간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시험공부 같은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박홍규의 텍스트를 한 자라도 더 이해하는 것이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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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독서에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야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예년보다는 꾸준히 책을 읽고 있다. 아무튼 학교는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끔찍한 사람들 뿐이고, 독서는 재밌다. 재밌을 줄 몰랐는데 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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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의 청춘투쟁 - 돌직구로 승부한 슬램덩크 세대의 좌충우돌 성장기
변희재 지음 / 도전과미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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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2장은 나름 자전적 요소가 들어 있어서 훈훈하게 볼만 했으나 이후 서사는 날조와 코메디로 가득하다. 변희재는 안 되는 걸 자꾸 고집하고 있는 데서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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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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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에게는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날 그의 구상은 철저히 사변적이고 진부한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신체의 유약함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힘을 숭상하게 된 퀴어'라는 소재는 아무리 봐도 구시대적이다. 장정일이 언급했던 앨런 블룸과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는 동성애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었던 20세기에 있을 법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숨기고 가리는 과정에서 나온 비극이었으니까. 따라서 이 책을 오늘날 퀴어코드로 해석한다든지 우익담론의 논의저변에 올려놓는 것은 무척이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장정일은 소위 우익인사들이 남모르게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데에 나름대로 깊이 있게 사유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은 어딘가 방향성이 이상하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적인 주제의식이 오히려 피곤함을 유발한다. 흡사 다들 뭔가 잘못됐다고 하는데 끝까지 아집을 부리는 꼰대가 연상된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문학의 역할을 강조한다. 정치가를 꿈꿨으나 회의를 느끼고 문학가로 방향을 돌린 금, 뛰어난 문재文才를 타고났으나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한 은의 경우를 대비하며 문학과 권력의 대립항을 세운다. 그런데 왜 하필 문학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장정일의 연혁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졸 학력이지만 다독을 통해 저명한 문필가로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니, 그에게 있어 문학은 구원의 매개 그 이상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위 '열등감이 힘에의 의지를 추동했다'라는 주제의식은, 오히려 장정일의 연혁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자신은 역경을 딛고 내로라하는 좌파 지식인이 되었지만,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우파가 되는 경우도 적잖았을 테니까. 더구나 그게 퀴어를 은폐하기 급급했던 시대적인 한계 때문이라면, 장정일은 우파 청년 은을 구상하는 것으로 그들을 보듬어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조롱하려고 그랬을까.


그런데 대체 우익이란 무엇인가. 작중 거북선생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총량을 놓고 봤을 때 우익은 5%도 써먹을 수 없는 지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을 지탱해온 것은 곧 '힘'과 '권력' 그 자체였으니. 이 만고의 진리로 세상을 천연히 밀어붙인 것 아닌가.'힘은 확실하며, 자명하다. 가진 자들이 힘을 써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는. 이 얼마나 찬탄스럽고 위대하며 불편한 진실인가. 그런데 우익적 가치를 맹렬히 추구하는 자들은 비단 열등감을 가진 이들 뿐인가? 이것은 두고 생각할 문제지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특히나 그게 이런 작품과 같은 식이라면 성급하다.


나는 성장소설의 힘을 믿는다. 그건 자라나는 우리들을 지금 여기와는 다른 어딘가로 데려다 준다. 로드무비처럼 만남과 갈등, 그리고 이별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전보다는 한층 성숙해진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성장소설을 가장한 정치소설이다. 청년들에 대한 고려는 간데 없고 좌파 먹물의 사변만이 돋보인다. 금과 은은 자신들이 보냈던 스무살의 1년, 즉 '이틀'을 통해 제 갈길을 찾는 듯 보이지만, 그 막중했던 이틀은 다시 현실 속으로 용해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책도 나름대로 원대한 사유로 시작했으나 끝내 구시대적인 퀴어코드와 우익에 대한 풍자만이 남아 별볼일 없는 논의거리로 남은 채 끝내 망각될 것이다. 마치 꿈과 삶이 섞인 자리에는 표시도 없다는 작중 표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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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7
이현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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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잡담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적 영역에서 개소리를 할 권리가 있다. (자기검열은 특정 관점을 취하지 않는, 즉 뭔가를 책임지지 않는 태도 만큼이나 위험하다). 일상의 층위가 이렇다면 이상의 영역은 어떨까. 지젝은 선불교의 공空사상을 인용하며, 더 이상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는 게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도구로서, 기왕이면 절대적이고 숭고한 가치에 복무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게 최선인 것이다. 어디까지 타당한 얘기일까.


근본주의보다 더 어려운 것은 어쩌면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다. 그렇잖은가. 혁명도 생각하고 일상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그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인가. 그런데 오늘날 자기 일상이 온전히 혁명의 수행에 저당잡혀도 괜찮을 이는 얼마나 되는가. 지젝이 지적했듯 실재는 그 막대함으로 인해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경험되곤 한다. 가상과 현실의 구도는 수시로 전복되는 동시에 세계의 몰합리를 비추는 거울상으로 기능한다. '가상 중에서 진짜를 구별해 내라'는 지젝의 진단은 얼마나 '현실'에 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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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에게서 물론 극단주의의 매력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극우주의를 다시 보게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민주주의는 결함을 떠안고 있는 체제라는 진단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만큼 계속해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이 독재정을 주장했던 건 유명하다). 권력 행사에의 거부는 윤리적 태도이며,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1999)'처럼 우리는 진리의 투사가 되어 적대적인 이들을 다 때려 부술 수도 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용인되는 것이고.


그렇지만 라캉 이론이 문예비평 너머의 영역에서도 유효한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그것은 거대담론이지, 개인이 스스로 의미 부여에 이르는 데는 (당연하겠지만) 무심하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무의식이나 욕망을 행위의 이면으로 상정하는 게 나는 오히려 고상한 지식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실 억압되어 있는 존재라는 설명은 우리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는 않고 그러한 억압의 사실을 합리화해줄 뿐이다. 흔히 얘기하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 구도로 헤겔을 전유한 지젝의 진단은 단적으로 얘기해서 '판 깨라'는 명령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이건 '지구를 벗어나라' 수준의 지극히 막연한 얘기다. 총체적, 근원적 구도는 모든 것을 말하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라캉의 이론처럼 세상의 이면을 뒤집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는 치트키와 망상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논의될 가치가 있는가? 백면서생으로 고상함을 충실히 내면화한 이들만이 소위 이런 '라캉적 망상'에 빠져들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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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말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는 공허하다. All or Nothing은 매력적이다 뿐이지 지극히 무모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우리의 정치적 결단은 안락한 세계 대신 더 재밌는 세계를 보장해준다는 것 말고 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론 사회주의는 충분히 매력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사회주의가 꼭 혁명과 등식에 놓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일상을 포기한 체제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는post-human 것이다.


그리고 나는 라캉주의 역시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라고 본다. "야, 우리는 사실 상징계에 놀아나고 있는 거야. 낄낄낄" 그거 누가 모르는가. 현실이 지극히 몰합리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어 온 것이다.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쇼펜하우어나 불교의 그것과 다르다. 해방이 아니라 도피다. 지젝이 혁명가가 아니라 혁명을 '꿈꾸는'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지젝은 유보하지 말고 다만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라고 말한다. 응당 맞는 말이다. 따라서 결단을 내리는 바다. 지젝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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