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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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에게는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날 그의 구상은 철저히 사변적이고 진부한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신체의 유약함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힘을 숭상하게 된 퀴어'라는 소재는 아무리 봐도 구시대적이다. 장정일이 언급했던 앨런 블룸과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는 동성애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었던 20세기에 있을 법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숨기고 가리는 과정에서 나온 비극이었으니까. 따라서 이 책을 오늘날 퀴어코드로 해석한다든지 우익담론의 논의저변에 올려놓는 것은 무척이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장정일은 소위 우익인사들이 남모르게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데에 나름대로 깊이 있게 사유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은 어딘가 방향성이 이상하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적인 주제의식이 오히려 피곤함을 유발한다. 흡사 다들 뭔가 잘못됐다고 하는데 끝까지 아집을 부리는 꼰대가 연상된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문학의 역할을 강조한다. 정치가를 꿈꿨으나 회의를 느끼고 문학가로 방향을 돌린 금, 뛰어난 문재文才를 타고났으나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한 은의 경우를 대비하며 문학과 권력의 대립항을 세운다. 그런데 왜 하필 문학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장정일의 연혁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졸 학력이지만 다독을 통해 저명한 문필가로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니, 그에게 있어 문학은 구원의 매개 그 이상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위 '열등감이 힘에의 의지를 추동했다'라는 주제의식은, 오히려 장정일의 연혁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자신은 역경을 딛고 내로라하는 좌파 지식인이 되었지만,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우파가 되는 경우도 적잖았을 테니까. 더구나 그게 퀴어를 은폐하기 급급했던 시대적인 한계 때문이라면, 장정일은 우파 청년 은을 구상하는 것으로 그들을 보듬어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조롱하려고 그랬을까.


그런데 대체 우익이란 무엇인가. 작중 거북선생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총량을 놓고 봤을 때 우익은 5%도 써먹을 수 없는 지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을 지탱해온 것은 곧 '힘'과 '권력' 그 자체였으니. 이 만고의 진리로 세상을 천연히 밀어붙인 것 아닌가.'힘은 확실하며, 자명하다. 가진 자들이 힘을 써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는. 이 얼마나 찬탄스럽고 위대하며 불편한 진실인가. 그런데 우익적 가치를 맹렬히 추구하는 자들은 비단 열등감을 가진 이들 뿐인가? 이것은 두고 생각할 문제지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특히나 그게 이런 작품과 같은 식이라면 성급하다.


나는 성장소설의 힘을 믿는다. 그건 자라나는 우리들을 지금 여기와는 다른 어딘가로 데려다 준다. 로드무비처럼 만남과 갈등, 그리고 이별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전보다는 한층 성숙해진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성장소설을 가장한 정치소설이다. 청년들에 대한 고려는 간데 없고 좌파 먹물의 사변만이 돋보인다. 금과 은은 자신들이 보냈던 스무살의 1년, 즉 '이틀'을 통해 제 갈길을 찾는 듯 보이지만, 그 막중했던 이틀은 다시 현실 속으로 용해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 책도 나름대로 원대한 사유로 시작했으나 끝내 구시대적인 퀴어코드와 우익에 대한 풍자만이 남아 별볼일 없는 논의거리로 남은 채 끝내 망각될 것이다. 마치 꿈과 삶이 섞인 자리에는 표시도 없다는 작중 표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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