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7
이현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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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잡담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적 영역에서 개소리를 할 권리가 있다. (자기검열은 특정 관점을 취하지 않는, 즉 뭔가를 책임지지 않는 태도 만큼이나 위험하다). 일상의 층위가 이렇다면 이상의 영역은 어떨까. 지젝은 선불교의 공空사상을 인용하며, 더 이상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는 게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도구로서, 기왕이면 절대적이고 숭고한 가치에 복무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게 최선인 것이다. 어디까지 타당한 얘기일까.


근본주의보다 더 어려운 것은 어쩌면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다. 그렇잖은가. 혁명도 생각하고 일상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그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인가. 그런데 오늘날 자기 일상이 온전히 혁명의 수행에 저당잡혀도 괜찮을 이는 얼마나 되는가. 지젝이 지적했듯 실재는 그 막대함으로 인해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경험되곤 한다. 가상과 현실의 구도는 수시로 전복되는 동시에 세계의 몰합리를 비추는 거울상으로 기능한다. '가상 중에서 진짜를 구별해 내라'는 지젝의 진단은 얼마나 '현실'에 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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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에게서 물론 극단주의의 매력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극우주의를 다시 보게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민주주의는 결함을 떠안고 있는 체제라는 진단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만큼 계속해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이 독재정을 주장했던 건 유명하다). 권력 행사에의 거부는 윤리적 태도이며,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 클럽(1999)'처럼 우리는 진리의 투사가 되어 적대적인 이들을 다 때려 부술 수도 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용인되는 것이고.


그렇지만 라캉 이론이 문예비평 너머의 영역에서도 유효한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그것은 거대담론이지, 개인이 스스로 의미 부여에 이르는 데는 (당연하겠지만) 무심하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무의식이나 욕망을 행위의 이면으로 상정하는 게 나는 오히려 고상한 지식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실 억압되어 있는 존재라는 설명은 우리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는 않고 그러한 억압의 사실을 합리화해줄 뿐이다. 흔히 얘기하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 구도로 헤겔을 전유한 지젝의 진단은 단적으로 얘기해서 '판 깨라'는 명령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이건 '지구를 벗어나라' 수준의 지극히 막연한 얘기다. 총체적, 근원적 구도는 모든 것을 말하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라캉의 이론처럼 세상의 이면을 뒤집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는 치트키와 망상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논의될 가치가 있는가? 백면서생으로 고상함을 충실히 내면화한 이들만이 소위 이런 '라캉적 망상'에 빠져들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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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말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는 공허하다. All or Nothing은 매력적이다 뿐이지 지극히 무모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우리의 정치적 결단은 안락한 세계 대신 더 재밌는 세계를 보장해준다는 것 말고 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론 사회주의는 충분히 매력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사회주의가 꼭 혁명과 등식에 놓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일상을 포기한 체제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는post-human 것이다.


그리고 나는 라캉주의 역시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라고 본다. "야, 우리는 사실 상징계에 놀아나고 있는 거야. 낄낄낄" 그거 누가 모르는가. 현실이 지극히 몰합리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어 온 것이다.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쇼펜하우어나 불교의 그것과 다르다. 해방이 아니라 도피다. 지젝이 혁명가가 아니라 혁명을 '꿈꾸는'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지젝은 유보하지 말고 다만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라고 말한다. 응당 맞는 말이다. 따라서 결단을 내리는 바다. 지젝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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