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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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가 언급한 대로 영미철학 특유의 분석기법이 돋보인다. 단어의 개념을 규명해내고, 분석하고, 어떤 보편 원리로 적용하는 문제는 철학의 주요 골자 중 하나다. 개념과 보편, 이 책에서 그 소재가 되는 건 '개소리(Bullshit)'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 책은 논문보다는 잘 꾸며진 꽁트같다는 생각도 든다. 혹자가 말하길,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농담은 clever joke에 그치지만 그걸 각잡고 논문으로 발표하면 통찰(insight)이 된다'고 하는데, 이 책이 아마 그 적절한 예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 '개소리'를 다룬다니! 철학은 그만큼 방대한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인간세상에 이토록 이로운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확실히 진리를 잃어버린 세대다. 팩트(fact)라는 말이 특정 정치적 견해를 공고히하는,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자의 포섭을 강화하는 아전인수격 개념으로 전락해버린 세상에서 정확성(correctness)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진정성(sincerely)이 주요한 가치로 부각되어버린 시대다. 교수님(김덕천)이 지적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세상에 무의미에의 의지와 회의주의를 양산해냈다. 삶의 목적과 위계를 잃어버리고 부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개소리가 그렇게 만연한 것이겠지. 사랑의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듯 진리의 가장 큰 적은 '개소리'라는 모토는 이렇듯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시대에 주어진 철학의 역할이 단순한 지적소비에만 그친다면, 철학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리를 향한 믿음. 진리를 확보하는 작업은 무용한 것에만 그쳐야 하는가? 저자는 진지하고 세심한 논의를 통해 이와 같은 주장에 반박하고 철학 본유의 역할을 돌아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페북 스노브들을 까는 글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글이라는데, 본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더 심화되었다. 일베와 나무위키의 등장으로 너도나도 '좆문가'가 되는 세상이다. 특정 견해에 공통된 의사를 펼치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고, 성숙한 민주시민을 참칭하며 모든 사안에 오피니언을 피력하는 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말인데, 이 또한 진리의 상실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허위(falsity)보다는 가짜(phony)에 가까운 개념으로, 정확성의 확보를 상실한 사조는 끽해야 개소리 밖에 될 수 없는 무의미한 논의를 조장할 뿐이다. 한 마디로, 세상에 말들이 너무 많다. 저자는 이 모리배들을 '논문으로 조져버리는' 느낌이다. '말 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를 넘어서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식으로.


 아는 게 많으면 겸손해지는 법. 아무리 유구한 세월이 흘러도 책을 대체할 수 있는 진리매체가 생겨날 수 없듯 정보의 범람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정확성'에의 믿음을 담보하는 사유일 것... 개소리의 철학이 주는 교훈은 대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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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2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거나 잘못 아는 것을 침묵하기보다는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공개하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그런 자세야말로 겸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

일랑일랑 2017-03-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ㅎ 겸양의 맥락에서는 그렇죠^^
 
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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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 변신'. 역시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논술학원 다닐 때 접했던 책이다. 그때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아마 손 댔더라도 몇 자 읽다가 짜증나서 때려쳤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취향을 타는 작가라는 소리인데, 지금도 '카프카'라는 이름이 주는 어두움과 고독감이 참 부담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이 주는 비평적 가치는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이 맞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처럼 말이다. (이 책 또한 교수님1께서 추천해주셨는데, 물론 읽어보지 않았다.)


 '변신'은 꾸준히 비극적인 분위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난해하다. (앞서 카프카의 단편 '선고'가 실려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꿈도 희망도 없다.' 절망, 혼돈 내지 파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그게 나는 아니다. 다만 비평을 통해 자산이 되고, 더 흥미로워지는 작품이기 때문에 '취향'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겠다. (꿈보다 해몽......) 이 소설을 포함한 카프카 문학세계의 전반을 실존주의의 맹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해설은 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카프카를 전공했다는 역자는 '변신'이라는 행위를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한 주인공의 일탈이자 자본주의, 성과주의 체제의 부조리 폭로라고 설명한다. 인간이면서 인간성이 단절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벌레'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벌레가 되었다'는 노골적인 설정이 작품을 이루는 골자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족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더이상 재화교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된(벌레가 된) 주인공은 가족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만다. 이제 '그'는 '그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공은 체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완전히 무력해져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는(이상 - '회한의 장')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인간을 포기하고 얻어낸 해방으로, 주인공에게 돌아온 것은 구원과 같은 예견된 죽음이며, 가족들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생을 생업에 종사하며 글을 쓰다가 요절한 카프카의 일생에 대입하면 작품의 주제의식이 명확해지는 게 참 비장하게 느껴진다. 이러니 어찌 탄복하고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청소년들 읽으라고 추천해주는 20세기 고전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성과주의 체제로부터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어쩌면 그 속에는 '어차피 힘든 세상이고, 잔인한 체제니까 문학전선에 뛰어들 생각이면 마음 똑바로 먹어라. 그런데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하다...'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있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 유행했던)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문학에서 체제순응적인 논리를 학습하기란 아이러니니까. 따라서 문학은 어딘가 어둡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상 너머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들. 그들 내면의 깊이 만큼 문학은 구원에 이르는 양분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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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은 카프카의 예술관이 드러난 짧은 꽁트다. '그것은 뻔하지만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는 것.' 생전 최후의 작품이라는데 죽음을 앞둔 거인의 초연함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영원한 평화'와 비견되지 않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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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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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역시 얇고 넓은 교양서적 답게 논지전개가 일률적이고, 이것을 개별 지식의 나열로 지탱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중  - 고딩 때 읽었을 때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정도로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빈약한 논거나 성급한 주의주장 등(또한 이런 부분들이 대중교양서적의 폐해이기도 하다) 여러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다 심층적인 논의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 재고된다. (그러려고 책 읽는 거니까.) 흥미유도를 위한 서적은 '지대넓얕' 정도로 끝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읽어보지는 않았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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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2
채운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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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다 번의 시크릿과 이지성의 저서들을 위시한 '인문학적 자기계발서'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유해함은 그 좋은 구절들을 '끌어다가' 노력만능주의 자기주문의 논리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왔다.) 특히 '틀을 깨부순다(구조를 해체한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조를 그런 식으로 오독하는 걸 보면 부아가 치밀어오를 지경이다. 10여 년 전에 출판된 '호모-' 시리즈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최소한 이런 책들은 한글을 떼고 교양(liberal arts)을 아주 처음(very first time) 접하는 시기의 유아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편이 낫다. 또한 그말 그대로 그러한 책들은 '노력하라', '행동하라' 식의 유아적인 주문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문학적 자기계발서의 주요 독자인 청소년층은 교양의 유아기적 상태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어디 청소년 뿐이겠는가. 갓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인들은 어떻고. '깨부서라', '행동하라', '노력하라'. 뭐 그리 많은 주문들로 어디 '계몽'까지야 한다는 말인가. 결론은 항상 일차원적 노력만능주의로 수렴하는데. '계몽'하고자 한다면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우매한 대중'들을 계도하겠다는 의도는 구시대적이며, 필패하기 마련이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의 유아기적 상태를 조장하는 대중마취서적들로 계몽을 한다? 이율배반도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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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
헤르만 헤세 지음, 구기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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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아마도 중학교 시절 논술학원을 다닐 때 접했던 책이다. 당시의 난 어른의 권위에 충실히 따르기에는 너무 많이 자랐지만, 방황을 멈추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으므로, 중간도 채 읽지 못 하고 그만둔 것으로 기억한다. 대저 이런 식으로 내가 어린 시절에 놓친 고전이 한 두개가 아니다. 깊이 후회하고 반성한다. 지금이라도 죄다 읽어내어야지.


 세계에는 내적인 방황에 빠져있는 꼬마 싱클레어들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많을 것이다. 1차대전 발발 전의 유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독일의 젊은이들은 확실히 니체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놓여있었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고, 고독하게 걸어나간다는 테제는 당시 피끓는 청춘들에게 조명받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데미안에게서 초인의 목젖이 만져지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광장에서 추락한 광대에게 손을 내미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자기 운명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내할 수 있는 '표지'를 가진 이들에게 데미안은 지도자이자, 초인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기독교-로고스주의의 이원론적 도덕관(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은 (니체에 따르면) 데카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던 바 있다. 싱클레어가 처음 붕괴를 목도했던 세계 역시 기독교적인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후로 그는 점차 순종적인 유아(낙타)에서 방탕한 청년(사자)을 거쳐 운명을 그려내는(어린아이) 단계로 나아간다.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아프락사스는 운명 끝에 당도하여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 올 자신의 형상이자, 세계에 도래할 초인의 또다른 이름인 셈이다.


 개인서사로 투영한다면, 데미안은 세상의 모든 싱클레어들을 위한 책이다. 세계를 깨어버려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한 희망서사. 희망이라는 말이 잔인하게 변질되어버린 오늘날, 잠시 속세를 등지고 '희망'다운 '희망'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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